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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비 탓에 노인들 대부분이 최소 3일 동안 같은 기저귀를 차고, 가장 바깥쪽 대기저귀는 2주 가량 교체되지 않는다. (중략) 똥은 닦아도 닦아도 계속 나왔다. 화장실에 오기 전 이미 기저귀에 조금 똥을 싸놓았던지라, 엉덩이 전체에 똥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휴지로 해결되지 않아 물티슈를 가져왔다. 변기는 물론 항문과 엉덩이, 기저귀에 묻은 똥을 치우고 나니 겨울인데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한겨레, 숨 멈춰야 해방되는 곳… 기자가 뛰어든 요양원은 ‘감옥’이었다, 2019년 5월13일. 중에서

한겨레

한겨레의 연속 보도, ‘대한민국 요양 보고서’는 적나라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느다란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있는 노인들. 먹는 것도 싸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쉽지 않은 극한의 순간. 그동안 요양원 르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시리즈는 특별했다. 기자가 직접 자격증을 따고 요양보호사로 취업해 노인들 밥을 떠먹이고 똥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켜가면서 지켜보고 기록한 결과다. 발로 쓴 기사고, 몸으로 쓴 기사였다.

“현재 영업 중인 쪽방 5채에서만 매달 1,437만 원 상당 현금 수익을 얻는 셈이다. 1980년대 부친으로부터 쪽방용 건물들을 물려받아 건물주가 된 남매들은 1996년 지하 1층, 지상 5층짜리 빌딩을 인근에 세워 부를 확장했다. 20년 넘게 이 동네에 거주했다고 밝힌 한 주민은 ‘살면서 집주인을 딱 한 번 봤을 뿐’이라고 말했다. 수십 년 동안 대를 잇는 쪽방 운영으로 부를 축적해온 건물주 일가는 베일 뒤에 철저히 정체를 숨겨온 것이다.”

-한국일보, 쪽방촌 뒤엔… 큰손 건물주의 빈곤 비즈니스, 2019년 5월7일. 중에서

한국일보

비슷한 시기에 나온 한국일보의 쪽방촌 르포도 저널리즘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는 좋은 기사였다. 화장실도 수도도 난방도 안 되는 1평 남짓의 쪽방의 월세가 25만 원이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폭리가 가능한 건 쪽방촌이 빈곤의 극단, 노숙인으로 전락하기 전 단계에서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주거 공간이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쪽방촌의 쾌쾌한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현장감 넘치는 기사였다.

현장감 넘치는 기사, 그래도 아쉬운 대목은…

헐리우드에는 아카데미상 수상 공식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footnote]Den of Geek, The oscars, and the tricks to winning one, 2016년 2월25일.[/footnote] 이를 테면 심사위원들 대부분이 새디스트라서 주인공이 ‘개고생’하는 시나리오에 좀 더 높은 점수를 준다는 것 등이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에 출연했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곰에게 물어 뜯기고 얼음물을 가르고 헤엄치는 정도가 돼야 남우 주연상을 받을 수 있다. 당연히 작품성이 있어야겠지만 배우가 고생을 많이 하면 할수록 감동이 커진다는 이야기다.

기자들이 받는 상도 비슷한 공식이 있는 것 같다. 좋은 기사가 상을 받는 건 당연하지만, 언젠가부터 얼마나 고생해서 썼는지 강조하는 기사가 늘어난다. 기저귀를 갈 시간이 없어서 똥을 눈 채로 며칠씩 방치되는 노인들의 사연은 잠깐 구경하러 온 기자들은 결코 얻을 수 없는 이야기다. 쪽방촌 수십 개를 거느리고 수천만 원의 월세를 챙기는 이른바 ‘빈곤 비즈니스’의 실상도 기자들이 수없이 발품을 팔지 않았으면 드러나지 않았을 참담한 현실이다.

정말 좋은 기사라는 걸 전제로 나는 몇 가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한겨레 기사는 요양원의 열악한 환경과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숙명을 뒤섞고 있다. 늙고 쇠약한 노인이 감내해야 할 참혹한 순간은 요양원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다. 열악한 요양원도 끔찍하지만, 근본적으로 우리가 늙고 죽는 것이 모든 비극의 원인이다. 똥 기저귀를 가는 건 기자에게는 스펙터클한 일이지만, 어느 요양원에서나 일상이다.

한국일보의 기사는 쪽방촌을 강제 폐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방치하거나 정부가 밑빠진 독에 물붓 듯 지원할 수도 없는 딜레마를 드러냈다. 평당 임대료 18만 2,550원은 수요와 공급이 만드는 시장 가격인 것 같지만, 세입자들에게는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고, 공급자가 가격을 결정한다는 게 문제다. 구조를 바꾸지 않는 이상 큰손 건물주들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체인지 변화 미래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은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2019년 7월2일)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이 두 기사를 거론하면서 “시간 들이고 땀 흘린 만큼 기사 쓸 수 있다”면서 “기자라는 자존심을 지켜준 그들이 눈물겹게 고맙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권석천의 표현대로 “기사 처리하느라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기자들이 “취재가 사치 부리는 일이 되다 보니, 서로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는 ‘질 낮은 경쟁’에 몰두”하는 게 현실이다.

언론사 논설위원이 다른 언론사의 기사를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나 권석천의 칼럼에는 시스템에 대한 반성이 없다. “나 역시도 기사 쓰면서 어떻게 하면 다르게 잘 베낄 수 있을까 고심했다”면서도 단순히 ‘시간 들이고 땀 흘린 기사’를 ‘취재가 사치 부리는 일이 된 시대’의 대안으로 제안하는 것은 단편적이고 감상적인 접근이다. 자신만의 취재를 해야 좋은 기사가 나온다는 익숙한 결론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눈물겹게 고맙다” 이것으로 충분한가?

“79살 최교실 할머니는 괄약근에 힘이 없어 스스로 변을 보지 못한다. ‘똥 나온다, 똥 나와… 계속 나와. 선생님, 이것 좀 버려주세요.’ 할머니의 침구를 정리하고 있던 기자를 동료 요양보호사가 급히 찾았다. 구멍이 뻥 뚫린 목욕 변기 아래로 초록색 똥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요양보호사가 아랫배를 누르자 5분 동안 대변이 쉬지 않고 나왔다. 포도 3송이보다 크고 묵직한 변은 2㎏ 아령보다 무거웠다. 이날 할머니가 본 대변은 자그마치 10일치였다.”

‘시간 들이고 땀 흘린’ 이 기사의 스펙터클에는 질문이 빠져있다. 더 깊이 현장에 들어가고 더 치열하게 관찰하고 본질을 파고 드는 기사는 당연히 중요하다. 기사의 기본은 취재다. 현실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기사들은 현상을 나열하거나 전시하면서 독자를 관객으로 머물게 만든다. 강력한 이야기를 풀어낼 때는 이야기 안에 갇힐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강력한 이야기를 전달할 땐는 그 이야기 속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강력한 이야기를 풀어낼 때는 이야기 안에 갇힐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이 시리즈를 끝까지 눈여겨 봤던 건 우리가 읽고 있는 숱한 기사들처럼 결국 기자들이 고생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것이 현실이다,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세상을 내가 이렇게 직접 겪어보고 쓴 기사다, 소리치는 듯한 기사들. 독자들은 이런 기사에 박수를 보내지만, 뒤돌아서면 잊어버린다. 그런 기사가 있었지, 그 기사 좋더라, 누군가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지만 보통은 그대로 박제돼서 이야기로 남는다.

한겨레는 서울 강남구 세곡동의 서울요양원을 대안 모델로 제안했다. 정부 예산 269억 원이 투입된 국내 유일의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영 요양원이다. 커다란 창문에 볕이 들고 건물 어디서나 나무가 보이고 노인 2명에 요양보호사 1명이 배치되는 쾌적하고 넉넉한 환경이다. 식당이 따로 있는데 일부러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거실 한쪽의 개방형 주방에서 밥을 짓고 밥내를 실내 가득 채운다는 세심한 배려도 돋보인다.

이곳에는 침대에 손등이 묶여 있는 노인이 없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쉽게 옮길 수 있는 300만 원짜리 해피베드와 누운 채로 욕조에 담글 수 있는 8000만 원짜리 목욕 기계도 있다. 정원이 130명인 이 요양원은 대기자가 1300명이 넘고 평균 3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결국은 공공성 확대가 답이고, 예산 문제가 과제로 남는다. 결국, 정치가 풀어야 할 문제란 이야기다. 스펙터클한 다큐멘터리가 아름다운 정책 제안으로 서둘러 마무리된 느낌이다.

한겨레 기사는 스펙타클한 다큐멘터리가 아름다운 정책 제안으로 서둘러 마무리된 느낌이다. 
한겨레 기사는 스펙터클한 다큐멘터리가 아름다운 정책 제안으로 서둘러 마무리된 느낌이다.

한국일보 ‘지옥고 아래 쪽방’ 시리즈의 엔딩 역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서울시 종로구가 원룸형 안심 공공 주택 건립을 서울시에 제안했다는 훈훈한 소식에 이어 쪽방을 법제 안으로 가져오고, 주거 급여를 현실화해야 한다는 전문가 좌담은 결국 예산 확보가 문제고, 정부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한편으로는 전문가들도 뾰족한 해법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다소 허망한 결말이었다.

쪽방을 숙박업으로 등록하거나 안전 기준을 강화하면 지금 있는 쪽방의 상당수가 폐쇄될 가능성이 크다. 공공 쪽방은 공공 요양원만큼이나 선택받은 일부의 특혜일 수밖에 없고, 주거권 교육을 늘려서 당당하게 수리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결론은 훈훈하기는 하지만 기사 안에 이미 반박이 있다. 서울시가 전대해 재임대한 ‘저렴 쪽방’에서도 수도관 파열 등 건물 수리를 요청했다가 퇴거 당한 사례가 보고된 바 있다.

세상에 아름다운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상은 비극으로 가득하고 참담한 현실을 고발하는 기사도 넘쳐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세상이 저절로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상이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한지 적나라하게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스스로 먹지도, 스스로 변을 보지도, 스스로 곡기를 끊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버티는 노인들에게 우리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한겨레 기사는 현상과 문제를 뒤섞고 있다. 거동할 수 없는 노인에게 콧줄로 음식을 밀어넣는 건 어느 요양원에서나 마찬가지다. 한겨레 기자가 있던 요양원에서는 입소자의 90%가 치매를 앓고 있는데 이들의 상습적인 욕설과 폭력 역시 요양원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벽에 똥칠하는 걸 막기 위해 손에 수면 양말을 씌우거나 손을 묶어 두는 게 문제라면 그 대안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모색을 이 기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질문과 모색이 필요하다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양로원을 찾고 쪽방촌을 찾는 것처럼 언론의 르포 기사는 우리가 얼마나 치열하게 현장을 파고 드는가를 보여주는 소재로 활용된다. 기자들의 체험 르포도 늘어나고 있다. 조선소의 계약직 노동자로 위장 취업하거나 택배 상하차 알바를 하거나 노숙인 체험을 하는 기자들도 있다. 시사인은 조선족들의 삶을 취재하기 위해 대림동에서 한 달 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기자가 주인공이 되는 기사를 많이 본다. 정의를 외치거나 악당을 처단하고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고 비장한 훈계를 늘어놓는 기사도 많다. 등기부 등본을 바닥 가득 늘어놓고 사진을 찍거나 마이크를 들이댔다가 쫓겨나는 장면을 담기도 한다. 폭설을 뒤집어 쓰거나 폭풍우 몰아치는 해안에서 기상 중계를 하는 것처럼 기자가 고생한 이야기는 얼마든지 스펙터클하지만, 정작 본질을 가리기 쉽다.

문제는 비명을 지르지만, 해법은 속삭인다(The problems scream, but the solutions whisper). 솔루션 저널리즘은 문제를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문제에 대한 해법과 결과를 추적하는 언론 보도를 말한다. 언론의 사명은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 의제를 설정하고 민주주의의 확산에 기여하는 것이지만, 솔루션 저널리즘은 좀 더 나가 언론이 대안을 모색하고 해법을 제안하는 단계까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는 문제의식이다.

솔루션 저널리즘은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과정, 그리고 그 결과까지 책임진다.
솔루션 저널리즘은 문제 제기에 그치지 않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과 과정, 그리고 그 결과까지 추적하는 언론 보도를 말한다.

요양원의 문제는 요양보호사들의 열악한 노동 조건과 요양기관의 부정 수급에 있다. 아무리 예산을 쏟아 부어도 보조금 착복을 뿌리 뽑지 않는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것이다. 요양보호사들의 노동 조건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노인들은 존엄을 지킬 수 없다. 쪽방촌의 문제는 수요와 공급, 가격 결정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나마 쪽방조차도 부족한 상황이라 터무니 없이 열악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더 많은 질문이 필요하다. 한겨레 기사가 솔루션 저널리즘이 되려면 요양보호사를 늘리려면 얼마의 예산이 필요한가, 그 예산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기저귀 가는 횟수가 어떻게 늘어나는가, 노인들이 알몸으로 복도를 걸어가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요양보호사의 노동조건이 달라지면 노인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추적 보도를 해야 한다.

한국일보 기사가 솔루션 저널리즘이 되려면 서울시 ‘저렴 쪽방’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종로구가 원룸형 공공 주택을 건립하는 데 필요한 예산과 수용 가능 범위를 검증하고 쪽방촌을 도심 외곽이나 지역으로 이전하는 아이디어, 실제로 지역에 실버 커뮤니티나 민간 차원의 공동 요양원를 구축한 사례와 가능성, 한계까지 짚어야 한다. 상당 부분 정치로 풀어야 할 문제지만, 정치가 스스로 작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솔루션 저널리즘을 위해선 더 많은 질문이 필요하다.
솔루션 저널리즘을 위해선 더 많은 질문이 필요하다.

솔루션 저널리즘 네트워크의 데이빗 본스타인은 솔루션 저널리즘이 아닌 것들을 명확하게 구분하라고 조언한다. 문제 해결의 주인공을 영웅으로 부각시키거나 이것이 해답이다, 이것만 하면 된다고 만능의 해법(silver bullet)을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 전문가의 거대 담론으로 끝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없고 무엇보다도 예산이나 후원, 결국 돈이면 된다는 식의 결론은 솔루션 저널리즘에서 지양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솔루션 저널리즘의 문제의식은 해법을 고민하고 실험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추적하라는 것이다. 언론이 해법을 찾아내라는 것도 아니고 대안을 제시하라는 것도 아니다. 해법을 찾는 과정을 추적하고 변화의 매뉴얼을 제안하라는 이야기다. 그것을 누가 했느냐(who dunnit)보다 어떻게 했느냐(how dunnit)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해법이 주인공이 돼야 한다.

“세상은 원래 이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많은 독자들이 기사를 읽으면서 좌절하고 절망한다. 요양원이나 쪽방촌이나 답이 안 보이는 문제 같지만, 그래서 언론의 역할이 필요하다. “출입처 발생 기사 넘기는 데 정신 없이 하루가 간다.” 권석천이 탄식했던 바로 그 지점에서 질문이 시작돼야 한다. 현상을 중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럼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세상을 바꾸는 주먹밥 프로젝트

‘세계의 비참’을 나열하는 기사는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통탄해서도 안 되고 비웃어서도 안 되고 혐오해서도 안 된다.” 바뤼흐 스피노자는 “오직 이해하는 것만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솔루션 저널리즘은 이해를 넘어 답을 찾는 과정까지 나가보자는 제안이다. 진실을 목격하고 기록하는 것, 정확한 이해는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게 솔루션 저널리즘의 문제의식이다.

여기 두 건의 기사가 있다. 하나는 “독거 노인 130만 시대, 외로움에 더 서럽다”[footnote]한겨레, 독거 노인 130만 시대, 외로움에 더 서럽다, 2015년 1월6일.[/footnote]는 기사다. 우울증 환자의 60.7%가 50대 이상이고, 노년 자살이 급격히 늘고 있다. 60대는 40.7명, 70대는 66.9명, 80살 이상 구간에서는 94.7명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정부가 고독사를 막기 위해 노인 안부 확인 사업을 하고 있는데 8,000명의 생활 관리사가 평균 25명의 노인을 관리한다. 평균 급여는 67만 원 수준이다.

다른 하나는 “칠보 초등학교 아이들의 ‘주먹밥 무상급식’” [footnote]머니투데이, 칠보 초등학교 아이들의 ‘주먹밥 무상급식’, 2011년 8월6일.[/footnote]이라는 기사다. 학생들이 남는 식재료를 모아 주먹밥 도시락을 만들어 이웃의 독거노인들을 찾아 배송한다는 훈훈한 이야기. 이 기사가 단순한 미담으로 그치지 않았던 건 사람이 아니라 해법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근이나 버섯이나 학교 식당에서는 언제나 쓰고 남는 식재료가 있다. 버리면 음식 쓰레기지만, 주먹밥으로 만들면 훌륜한 한 끼 식사가 된다.

아이들은 요리를 배우고 동시에 지역 공동체를 배운다. 주먹밥 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공경용 하하야 대표의 이야기다.

“공부는 잘 하는데 친구들한테 이기적인 행동을 해서 교사들이 걱정하던 아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이웃집 할머니가 주먹밥 드시면서 눈물을 흘리자 함께 울면서 기뻐하는 거예요. 그동안 한 번도 자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면서요. 이후에 아이의 태도가 달라졌다고 해요.” (하하야 대표, 위 기사 중에서)

머니투데이의 기사는 솔루션 저널리즘의 예제가 될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머니투데이의 ‘주먹밥 무상급식’ 기사는 솔루션 저널리즘의 예제가 될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주먹밥 프로젝트, 2개월여 동안 6차례 19명의 이웃 노인들에게 주먹밥을 제공하는 데 추가 재료비로 9만6,000원이 들었다. 남는 식재료를 활용했기 때문에 비용이 크게 줄었고 아이들이 직접 만들기 때문에 인건비도 전혀 들지 않았다. 물론 학교 차원의 지원과 교사의 의지, 지역 사회의 호응이 필요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무상급식이 독거노인들의 무상급식으로 확산된 셈이다.

한국에는 솔루션 저널리즘의 사례가 거의 없지만, 이런 기사는 조금만 보완하면 예제가 될 수 있다. 안타까운 건 칠보초등학교의 실험이 왜 다른 학교로 확산되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 프로젝트가 왜 지속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후속 보도가 없다는 것이다. 솔루션 저널리즘 네트워크에 따르면 솔루션 저널리즘의 핵심은 복제 가능성(replicability)이다. 영웅 스토리나 하나의 미담에 끝나지 않으려면 다른 문제를 겪고 있는 곳에서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해법과 대안은 구체적이어야 하고 데이터로 입증돼야 한다. 한 번의 성공에 그치지 않고 구조의 개혁을 끌어낼 수 있는 본질적인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실패의 경험과 위험 요소까지 충분히 담고 있어야 한다. 솔루션 저널리즘의 결과가 실제로 변화와 실천의 매뉴얼이 돼야 한다. 주먹밥 프로젝트에 그치지 않고 독거노인의 해법으로 지역 학교와 지역 사회의 연계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확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솔루션 저널리즘과 저널리즘 씽킹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지난 2016년 80여개 언론사들이 모여서 “샌프란시스코 홈리스 프로젝트”(SF Homeless Project)라는 이름으로 공동 취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샌프란시스코는 2017년 기준으로 노숙인이 7000명, 노숙인의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 가운데 하나다.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을 비롯한 지역 언론사들이 평범한 시민이 노숙인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추적했고, 여러 정책적 과제들을 직접 실험하고 검증하면서 대안을 파고 들었다.

9개월 동안 협업 프로젝트의 결과, 홈리스 보호소 건립이 앞당겨졌고, 기업 후원도 늘어났다. 노숙인 바우처 제도도 정착됐다. 2018년에는 노숙인 지원법안이 통과돼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기업들에게 추가 세금을 부과하고 노숙인 약물 치료와 보호소 확충, 노숙인 재활 지원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홈리스 프로젝트’는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샌디에이고로 확산돼 ‘샌디에이고 홈리스 어웨어니스’로 이어졌다.

샌프란시스코 홈리스 프로젝트 https://projects.sfchronicle.com/sf-homeless/landing/
샌프란시스코 홈리스 프로젝트

데이빗 본스타인은 “‘이것은 정말 좋은 프로그램이다’, ‘또는 아이들을 도웁시다’, 이런 말을 늘어놓는 걸 솔루션 저널리즘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고 강조했다.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검증된 결과가 있는가, 성공 요인이 무엇이고 어쩌다 가능한 한 번의 사례인지 아닌지, 한계는 무엇인지, 비용이 너무 크지는 않은지, 정치적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도 확인을 해야 한다.

솔루션 저널리즘에도 저널리즘 씽킹이 필요하다. 사실에서 출발해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질문을 끌어내야 한다. 문제를 다시 정의하고 질문과 검증의 반복을 통해 해법을 도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어떻게 현실과 맞서고 있으며 어떻게 현실을 바꾸고 있는지, 문제를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변화에 대한 희망과 확신을 일깨우는 것이 솔루션 저널리즘의 본질이고 목표다.

세상에는 좋은 기사가 많다. 언론의 신뢰가 바닥없이 추락하고 있지만, 저널리즘이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끄는 동력이 될 것이라 믿는다. 해법을 모색하자는 건 현장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현장을 중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번 더 질문을 던지고 문제의 본질을 파고드는 과정에서 해법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자, 그럼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질문을 시작하면 거기서 다시 새로운 취재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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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의 미디어 전략 강좌 

  1. 메시지를 바꿔야 세상이 바뀐다
  2.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만드는 7가지 원칙
  3. 저널리즘 씽킹: 기자들처럼 생각하고 기자들처럼 써보자
  4. 솔루션 저널리즘, 질문으로 시작하자

이 글은 월간 인물과사상에 “이정환의 미디어 전략 강좌”라는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는 글을 슬로우뉴스 원칙에 따라 편집한 글입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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