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슬렁(이미영)은 1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다. 각별하진 않아도 만나면 기분 좋은 그런 친구. 그렇게 가끔씩 만나서 교류한 그 친구는 재주가 많았다. 내가 처음 그를 알았을 때 그는 시민단체(CCK) 활동가였고, 몇 해가 지나자 ‘노닥노닥’이라는 마을’놀이'(?)공동체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으며, 또 몇 해가 지나자 난생 처음 그림을 배워서 이내 그림(여행)책을 출판했다.
그런 그의 모습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그렇다, 때로는 너무 진부해서 식상하지만, 항상 가장 중요하다고 사람들이 말하고, 진짜 누구에나 가장 중요한 것, 얽매이지 않은 자기다움, ‘자유’였다. 그는 조직에 있을 때조차 자유로운 활동가였고, 그 틀에서 스스로 벗어나서는 더 자유로운 유목인처럼 보였다. 때로 그 자유가 외롭게 비치기도 했지만, 그건 세상 어떤 좋은 걸 얻어도 반드시 지급해야 하는 대가일 테다.
그런 그가 얼마전부터 ‘과학책방’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주 어울리는 일 같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주 어울리지 않는 일 같았다.
삼청동 과학책방 ‘갈다’에서 오랜만에 어슬렁을 만났다.
- 인터뷰이: 어슬렁(이미영)
- 인터뷰어: 민노씨
- 일시: 2018. 9. 13. 목요일.
- 장소: 서울 삼청동 과학책방 ‘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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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어슬렁이 사는 법
(부제: 어슬렁은 어떻게 사회부적응자인지 아닌지 고민하기를 그치고 스스로 비주류가 되어 즐겁게 살기로 했을까.)
= 자기소개
기본적으론 동네 백수. 항상 비주류를 벗어나고 싶지 않은 ‘어슬렁’ 이미영이라고 한다. 지금은 과학책방 ‘갈다’ 매니저로 일한다.
= 백수, 비주류… 그렇게 살았더니 어땠나.
처음에는 자꾸 남들이 가는 길을 벗어나는 내가 사회부적응자인가 해서 자신감이 없었는데, 내가 끌리는 것을 계속 하다보니까 ‘더 좋은 세상’이 되더라.
= ‘더 좋은 세상’이라고? 진짜? (너무 순진무구하게 ‘거대담론’이라서 깜놀함)
왜냐하면 더 좋은 세상은 저마다 다르니까. (웃음)
= (정색하고) 좋은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맛으로는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랄까.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현재 위치에서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자본을 투여하거나 인간을 ‘갈아 넣거나’ 해야 하는데, 이런 방식에 큰 회의감이 있다. 그래서 시도한 게 ‘노닥노닥’ 같은 프로젝트였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실패해도 크게 망하지 않는 시도들이 내 삶에서 큰 가치가 되었다. 그때 나와 비슷한 시도를 하는 친구들도 생겼다. 민노씨도 잘 아는 신비(장상미)의 ‘어쩌면 사무소’, 이고잉의 ‘생활코딩’이나 ‘오픈튜토리얼스’ 등.
= 실패해도 크게 망하지 않는 시도들이라.
10초 애니메이션 영화제를 기획하는 친구들과 교류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 친구들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공든 탑은 무너지면 타격이 크니까 우리는 1층짜리 탑을 열심히 쌓자고 하더라. (웃음)
= 좋은 세상의 조건이랄까, 가령, ‘좋은 세상 메뉴얼’ 1장 1절엔 어떤 원칙(?)이 적혀 있을까?
나의 목표를 위해서 남을 이용하지 않는다.
= 남을 이용한 삶을 살았던 적은 있나.
있지.
= 언제?
어렸을 때. 기업이나 조직에 있었을 때.
= 그런 삶이 주는 장점이랄까 물질적 안락함이랄까. 월급 통장의 숫자가 ”혼자 밖’에 있을 때보다는 크니까. 그런 건 어떻게 생각하나.
돈의 가치를 크게 못느끼니까 백수로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 내 경우에는 돈이 없어서 거의 드물게 좋은 점은 비싸지도 않은 물건도 아주 귀하게(그래서 신나게?) 살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그러니까 남들은 그냥 쉽게 사는데, 나는 그걸 사기 위해서 며칠 동안 고민하고, 계획하고, 온갖 쿠폰을 써서 100원이라도 싸게 사려고 노력한 끝에 물건을 받을 때의 기쁨, 그런 일상의 ‘소확행’이라고나 할까. 그런 걸 요즘 느낀다. 스스로 쫌팽이 같기도 한데, 또 한편에선 확실히 그런 건 돈이 많으면 느낄 수 없는 감정 같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나도 생각나는 게 있는데, 언젠가부터 소비를 없애면 어떻게 될지 아주 궁금했던 적이 있다.
= 소비를 없앤다고?
그러니까 의식주 중에 여러가지를 직접 해보려고 시도했다.
= 가령?
키보드와 마우스에만 의존하던 손에서 그리기와 만들기를 시도했고, 목공으로 테이블을 만들고, 전기 선과 전구로 간판도 직접 달고, 천을 직조하기도 하고… 끝으로 가면 ‘실’을 만들고 싶어지더라. 그래서 목화솜을 실을 뽑는 방법을 공유하는 워크샵도 가서 물레도 돌려보고. 그런데 끝내 못하는 것은 식물을 키우는 것. 그건 못하더라. ‘의’에서는 식물을 못키우고, ‘식’에서 농사를 못짓고, ‘주’에서도 나무를 못키우는 게 내 한계다. (웃음)
= 돈이 없어도 재밌을 수는 있는데(내 체험의 한도 안에서), 돈이 없으면 확실히 누군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은 포기하게 되더라. 가령, 엄마 좋은 곳으로 여행이라도 보내드리고 싶은데, 꿈도 못꾸는 현실이랄까.
나도 꿈도 못꾼다.
= 당신은 그래도 뭔가 노하우가 있을 줄 알았는데, 실망이다.
노하우 없다. 그냥 부모님에게는 영원히 ‘애’인 것으로, ‘철부지 딸’인 것으로 외면하고 싶다. 나 혼자 만족하면서. (참조: 이 대화는 우울한 분위기가 아니라 다소 철부지 분위기-유쾌한-에서 이루어짐)
= 당신은 다른 사람들은 별로 시도하지 않은 많은 시도를 했고, 그래서 다양한 체험을 했다. 그 체험을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체험의 공유는 가능한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점점 더 나는 소위 말하는 ‘공유’라는 말의 가치를 믿을 수 없게 됐다. 특히나 체험의 가치를 공유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거나 극히 어렵지 않나 싶어서.
당연히 할 수 있지.
= 그렇다면, 가장 공유하고 싶은 체험은 뭔가.
나는 살고, 그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옆에 있는 친구들이 자기 삶에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주는 경우에만 내가 알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지역(광주)에서 문화기획을 하는 친구들이 나에게 와서, 나에게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해줬나.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에 끼워 맞추는 삶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는 내 체험을 전해줬다. 예전에는 몇몇만 그런 것 같았는데, 지금은 조금씩 더 그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고, 그러니까 요즘이 조금 더 희망적이라는 이야기도 해줬다.
= 친구들 반응은?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아주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도 더 구체적인 이야기들, 내가 직접 체험하고, 느꼈던 일들을 예를 들어 설명하니까 적극적으로(‘긍정적으로’) 바뀌더라. 자기 이야기도 나에게 하고.
= 평균적인 혹은 규격화한 삶을 의식적으로 피하는 삶의 장점은 충분히 알겠는데, 혹은 예상할 수 있겠는데, 단점은 뭔가. 한번 더 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사람들이 나를 볼 때 그야말로 비규격 혹은 반골, 반항… 이런 이미지를 연상하는데, 솔직히 내 마음 속 깊은 곳에선 그야말로 규격화한 삶, 가령 7급/9급 공무원의 삶이랄까? 혹은 그냥 튼실한 직장에 다니는 평범한 사람의 삶이랄까… 그런 삶에 대한, 내가 젊은 시절에는 극도로 혐오하고, 무시했던 그 삶에 대한 존경과 열망이랄까, 또 한편에선 애잔한 아쉬움이랄까,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시간 부자의 단점은 내가 내 시간을 계속 계획해야 한다는 거다. 내가 에너지가 떨어졌을 때도 누군가 만나야 하고, 무엇인가 기획해야 하고… 그럴 때는 누군가 나 대신 뭔가 해주고, 나는 거기에 그냥 무임승차하고 싶어진달까.
= 직전 인터뷰에서 윤덕환 박사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자기 정체성에 관한 전반적인 인식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한국인은 ‘주체성 자기’가 강하고, 일본인은 ‘대상성 자기’가 강하다고 말하더라(한 논문의 가설). 그 대표적인 사례로 [편의점 인간]이라는 소설을 언급하기도 했고.
주체적인 삶이 항상 옳고, 대상적인 삶은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그런 자기 인식의 차이도 그저 그저 서로 다른 지역에 사는 문화적인 차이는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슬렁이라는 캐릭터는 ‘주체성 자기’가 굉장히 강한 사람으로 비친다. 실제로도 그런가. 그리고 주체적인 삶이라는 것은 혹시 ‘과장된 신화’는 아닐까.
나 스스로 나를 바라보면 잘 모르겠다. 하지만 민노씨가 하는 그런 이야기(‘어슬렁은 주체적인 인간이지’)를 많이 듣긴 한다. 하지만 나는 그저 평화롭게 즐겁게 살고 있을 뿐이다. 한편, 타인들은 나에게 ‘투사(파이터)’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참 이해가 안 된다.
나에게도 수동적인 정체성은 있다. 다만, 그 정체성의 문제는 양자선택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내 경우에 내향성과 외향성은 서로 어느 것이 크면 다른 한편이 작아지는 ‘제로섬’이 아니라 두 성향 모두 상대적으로 꽤 높은 편이다.
= 체험의 한계는 있겠지만, 요즘 사람들은 자유롭게 즐겁게 사는 것 같나.
아닌 것 같다.
= 왜 그럴까.
우선 CC(크리에이티브 커먼즈) 활동을 할 때는 함께한 친구들, 주변 사람들 모습을 보면서 세상이 막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고’ 사람들이 다였다. 예를 들면, 내 타임라인의 수권정당은 녹색당인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 그래서.
그러다가 조금씩 정규직(‘일반적인’ 혹은 ‘평범한’ 사회인이라는 의미에서)을 만나는 기회가 늘었다. 그분들은 거의 모두 심각한 ‘불안’을 토로하거나 그런 불안이 나에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불안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그분들은 그것을 직접 깨뜨리지 못할까, 왜 깨뜨리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까, 처음엔 몹시 궁금했다.
= 그랬는데.
조금 더 지켜보면서, 저 사람들은 저렇게 살 수밖에 없구나라는 걸 이해하게 됐다.
= 가족? 부모 공양하고, 자식 먹여살리느라?
가족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그 분들의 노력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다. 가족의 중력은 항상 너무 크다.
= 당신은 중력을 벗어난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 거대하고 무거운 ‘가족의 중력’을 벗어나기 위해서 특별한 행동, 가령 소위 사람들이 ‘지랄발광’이라고 말하는, 그런 일탈적 행동, 혹은 결심, 결단 같은 걸 했나.
아니. 그냥 그렇게. 어쩌다보니 자연스럽게 벗어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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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갈다’
= 책방에 왔으니까 책방 이야기를 좀 해보자. 책방 이름이 ‘갈다’인데.
갈릴레오와 다윈.
= 뭔가 허무하구만. (웃음)
사람들이 복닥복닥 싸우는 과정에서 정말 속터지는 상황을 자주 만난다. 가령 기독교, 어버이연합으로 상징되는 그런 상황. 답답했던 마음이 시원해지는 게 과학책에 있었다. 그런 매력이 있다.
= 갈다 매니저 ‘어슬렁’은 뭔가 좀 어울리면서도 과학? 어슬렁? 뭐지? 솔직히 이런 느낌도 든다.
나 공대 나온 여자야. 이게 왜 이래.
= 갈다 매니저로 활동하니 어떤가. 책방은 깜짝 놀랄 정도로 ‘럭셔리’하기는 한데, 뭔가 무생물 같은 느낌이랄까. 텅빈 우주의 진공 같은 느낌이랄까? 초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당연히 ‘어쩌면 사무소’ 같은 소박하고, 정감 있는 그런 느낌을 예상했는데, 그 예상이 완전히 깨졌다.
민노씨가 한가할 때 와서 그렇고. 저녁에는 독서 도임도 있고, 토론 모임도 있고, 꽤 활발하다.
= 고민이 있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소비를 줄이고, 내 손으로 직접 만들고, 직접 사람들을 만나고… 그런 활동은 나를 중심으로 한 활동이었는데, 책방은 점점 더 그렇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니까 ‘갈다’가 내 처음 생각보다 그 규모가 커지면서… 1층만 책방으로 쓰려고 했는데, 2층이 생기고, 지하가 생기고, 마당까지 생겨서… 내가 감당하기 어렵게 됐다. 그래서 ‘관리’만 하게 됐다.
= 그럼 원래는 뭘 하려고 했나. 1층만 책방이었다면.
그냥 동네 책방에서 할 수 있는 거. 혼자 커피를 내리고, 책도 혼자 정리하고, 소모임도 직접 모두 꾸리고… 망가진 것도 스스로 고치고 그런 걸 생각했는데… 지금은 ‘상품’과 ‘서비스’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걸 지킬 수 없게 됐다.
= 상품과 서비스?
책방의 규모가 커지면서 내가 자급자족하는 건 불가능하고, 기존 시스템을 이용할 수밖에 없게 됐다.
= 예를 들면.
등이 망가지면 인테리어 업체를 불러야 한다. 그럴 때는 참 무력감을 느낀다. 처음에 썼던 플라스틱 컵과 빨대가 저녁에 쌓이는 모습을 보면서도 심한 스트레스를 느꼈다. 그래서 빨대는 종이로 ‘언능(얼른)’ 바꿨고, 컵은 조금 더 버티다가 현재는 유리컵으로 바꿨다.
= ‘갈다’에서 추구하는 가치. 행복? 즐거움? 그런 건 뭘까.
사람들이 너무 어이 없는 것 가지고 싸우지 않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 조금 더 합리적인 토론, 인간적인 대화, 이런 것들이 가능하면 좋겠다.
= ‘갈다’는 뭔가 지식인 느낌이 나는 것 같긴 하지만, 대중적인 친화력이랄까, 편안함이랄까. 일단 인상평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런 느낌은 부족한 것 같은데.
그게 현실이고, 과제다.
= 그래서.
책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도 인문사회 책을 읽는 소수 독자 중 ‘일부’가 과학(교양) 책으로 넘어오는 것 같은데,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요즘 많이 궁금하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과학이 과학 안에 머무는 게 아니라 과학의 울타리를 넘는 기획들, 시도들을 갈다에서 하고 싶다.
= 예를 들어서.
가령, 10월 3일부터 ‘블록체인 문화사’ 강연을 할 예정이다.
= 무료? 유료?
1회에 3만 원, 총 8회 24만 원. 약간 비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 너무 비싼 거 아닙니까? (웃음)
우리는 강연자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웃음) 사실 동네 책방 강연에서 수익을 내는 게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것 같다. 모객을 10명 이하로 한다면, 거의 수익은 처음부터 포기하고 출발한다. 아니 마이너스로 시작한다. 그런 어려움이 있다.
= 수익사업으로 생각하는 게 있나.
기관(지차체, 도서관)에 과학서적을 납품(?)할 수 있게 영업을 뛸 생각이다.
= 오, 대단하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습의 ‘반대말’ 같은데?
기존의 상업적인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다. 내 삶의 목표는 반자본주의적인 삶인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적인 삶을 제대로 체험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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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우리가 별로 즐겁지 않은 이유
= 왜 대체로 사람들은 별로 즐겁지 않을까. 내가 봐도 그런 것 같아서.
남의 목표에 맞춰서 살고 있으니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는 기회도 거의 없고. 알게 되는 걸 두려워하니까.
=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 계기가 있었나.
여러 번. 아주 큰 사건은 아니지만, 꾸준하게 여러 번.
= 가령?
가령 그림을 전혀 그려 본 적 없지만, 한번 그려본다던가. 그런 일. 시도. 시도하다가 안 되면, 아, 그게 내 경계구나, 생각한다. 그때 선택은 그래도 한번 더 넘어볼까, 여기서 관두자…
= 더 갈지 말지를 결정하는 선택 기준은?
재미. 실패해도, 나에게 이 시도가 재미가 있나. 그게 한번 시도할까 말까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 어떤 시도들은 굉장히 아프기도 한데. 그리고 영원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시도들도 있지 않나.
아픈 건 있겠지만, 그렇게 영원히 일어날 수 없을 정도의 리스크가 있는 시도는 처음부터 안 한다.
= 해리포터에서 덤블도어가 이런 말을 남기지 않나. “옳은 길과 쉬운 길 중에 선택해야 할 때가 올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영원히 일어날 수 없을 정도의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시도할 수밖에 없는, 그런 때는 없었나.
남들이 이 길이 험난하긴 하지만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할 때에도 나에겐 ‘옆길’이 보였다. 그걸 사람들은 ‘창의적 문제 해결’이라고 하더라. (웃음)
= 웃기고 있네. (당연히 ‘농담’)
ㅎㅎㅎ
=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진심으로 내 삶의 태도가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런 기대나 희망이 있나.
그런 건 없다. 그냥 나는 내가 내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걸 보는 사람이 영향을 받으면 좋지만, 그건 그 사람들의 선택일 뿐, 그런 선택이 나에겐 중요하지 않다.
= 끝으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모를 때가 많은데, 그런 의문을 흘려보내지 말고, 계속 붙들고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때가 온다면, 그러니까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만한 역량을 갖추는 그런 때가 온다면, 그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하는 즐거운 삶을 살면 좋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