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형법상 강간죄는 폭행·협박으로 사람을 강제로 간음할 것을 요건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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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법 제297조 (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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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법원은 강간죄 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은 피해자의 항거(저항)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어야 한다고 해석한다. 그렇게 수많은 가해자가 무죄 판결을 받아왔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거나, 재빨리 도망가거나, 주위에 도움을 청할 여지가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저항할 수 없는 정도의 폭행·협박을 한 것은 아니라는 이유였다.
2017년 2월에 제주에서 일어났던 친족성폭력 사건의 1심 판결도 마찬가지였다. 법원은 언니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온 필리핀 국적의 처제를 성폭행한 형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체구가 작은 편인 피고인이 피해자의 팔을 잡고 몸을 누르는 것만으로는 피해자의 제압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
- 피해자가 피고인을 피해 도망가거나 다른 방에서 자고 있는 아버지와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점
위 사정에 비추어보면, 피고인이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하였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 1심 법원이 말한 무죄 이유다.
그러나 극도의 당혹감과 공포감에 휩싸인 피해자에게, 최선의 능력을 다해 반격하거나 도피 또는 구조 요청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편도체의 두뇌 납치
당신은 구석기시대, 손도끼를 손에 쥔 인간이다. 토끼를 사냥하러 다니는 참이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호랑이가 눈 앞에 나타났다. 당신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애써 용기를 끌어올려 호랑이와 싸울 수도 있다. 큰 소리를 질러 동료들을 불러모으려 할 수도 있다. 어떻게든 도망가기 위해 내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극도의 공포감으로 뻣뻣하게 굳어 꼼짝도 못할 수도 있다. 위의 어떤 반응도 모두 폭력에 대한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반응이다.
- 즉시 자리를 피하는 것
- 꼼짝도 못하는 것
둘 다 본능적인 반응 형태이다.
이런 극도의 흥분 상태일 때는 생존에 필요한 신체 기능을 담당하는 소뇌 편도체가 뇌 전체를 지배한다. 이성적 사고를 담당하는 대뇌 전두엽의 조절 기능은 거의 상실된다. 이를 두고 편도체 (두뇌) 납치(Amygdala Hijack; 편도체가 뇌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현상)라고 한다. 편도체는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하고, 위장 기능을 낮추고, 근육을 긴장시킨다. 더욱 빠르게 달아나거나, 호랑이의 눈으로부터 잘 숨어있도록 준비해주는 것이다.
그에 반해 호랑이와 싸우기 위해 용기를 내는 것이나 동료들에게 구조를 요청하는 것은 모두 이성이 개입된 두뇌 작용의 결과이다. 편도체에 납치된 두뇌에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성폭력 피해상황도 마찬가지다. 위기 상황을 맞닥뜨린 두뇌는 편도체에 납치된다. 피해자는 심리적·정신적으로 몹시 위축되며, 자신이 일반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적은 일조차 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이것은 생존 본능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도 법원은 피해자가 ‘객관적으로’ ‘충분히’ 저항했는지를 놓고 강간의 유무죄를 심리한다.
뒤집힌 유무죄: 기준은 피해자의 구체적 상황과 심리
이 사건 2심 법원은 1심 판결을 파기하고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 피해자는 심리적, 정신적으로 매우 위축되면서 극도의 공포심에 사로잡혔는데, 피고인은 이러한 피해자를 강제로 끌고 가 피해자의 양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아 제압하고, 자신의 몸으로 피해자의 몸을 눌렀다. 이와 같은 유형력 행사는 피해자의 저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의 폭행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한편, 극도로 긴장되고 위축된 상태에서 상황 인식력과 판단력이 현저히 제한될 수밖에 없는 피해자에게 객관적으로 볼 때 충분한 방법으로 구조 요청을 하거나 피고인으로부터 벗어날 조치를 취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설시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피해자는 당시 심리 상태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다.
- “무서워서 몸이 차가웠고, 떨렸고, 힘이 없었다.”
- “소리를 지르고 싶었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는 편도체의 두뇌 납치가 일어났을 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다.
이 사건 2심 판결은,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었는지 여부는 1) 폭행·협박의 내용과 정도, 2) 유형력을 행사하게 된 경위, 3) 피해자와의 관계, 4) 성교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피해자가 성교 당시 처하였던 구체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는 대법원의 2005년 판결을 인용했다.
그리고 ‘피해자가 처하였던 구체적인 상황’을 객관적·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제3자의 기준이 아니라 피해자가 당시 겪었던 심리적·정신적 상태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극도로 긴장되고 위축된 상태에서 상황인식력과 판단력이 제한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였다.
피고인이 피해자의 위축 여부를 인식하였는지 여부와는 관계없이, 피해자가 극도로 긴장되고 위축된 상태인 경우 피고인이 몸부림치는 피해자를 피고인의 몸으로 눌러 제압하는 정도만으로도 강간죄의 폭행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유형력의 정도가 약했으므로 강간할 의도가 없었다는 류의 변명은 향후 힘을 잃을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항거 중심의 강간죄 구성요건 재평가 필요
이 사건 2심 판결은 피해자를 기준으로 폭행·협박의 정도를 판단했다는 점에서 분명 진일보한 판결이다. 그러나 강간죄의 폭행·협박이 피해자가 저항할 수 없는 정도여야 한다는 판례의 기본 태도 자체가 문제다. 피해자가 저항할 수 없는 폭행·협박을 입증하지 못할 우려 때문에 신고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고도의 폭행·협박을 요구하는 범죄는 강간죄와 강도죄 정도이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강간을 정의할 때 피해자의 ‘저항 가부’가 아니라 ‘성관계 동의 여부’를 중점에 둬야 한다고 권고한다. 현재 우리 국회에는 위 취지를 반영한 비동의간음죄 신설을 위한 입법이 여럿 발의되어 있기도 하다. 향후 비동의간음죄 신설을 비롯, 강간죄의 구성요건에 대하여 충분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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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은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의 기획 연재 ‘광장에 나온 판결’ 중 하나로, 필자는 현지현 변호사(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실행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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