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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동영상

BBC가 박근혜 탄핵 인용 직후 대한민국의 정세에 관한 인터뷰를 로버트 켈리 교수(부산대, 정치외교학)와 진행하던 중 켈리 교수의 딸과 아들이 서재에 ‘침입’하면서 켈리 교수는 몹시 당황하고, 켈리의 한국인 부인(김정아 씨)도 몹시 당황해 자녀를 급히 방에서 데려나가는 모습이 영상에 담겼다.

위 동영상은 그 해프닝을 켈리 부부의 승낙을 받고, 해당 부분만 편집해 올린 ‘유머 동영상’인데, 3월 16일 현재 BBC 페이스북에서 2천만 회 이상 조회되었고, 유튜브에서도 1천 9백만 회 이상 조회돼 큰 화제가 됐다. 켈리 교수 부부는 BBC와 이 해프닝에 관해 별도로 인터뷰한 것은 물론이고, 한국 언론과도 15일 부산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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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BBC 방송사고 유머 동영상이 난데없는 인종차별 논란에 휘말렸다. 백인 남성 인터뷰 중에 뛰어들어 온 동양 여성이 아이들의 엄마인가 보모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던 것.

엄마파 vs. 보모파 

“동양인이라 해서 보모라고 생각하다니 인종차별주의자!” 라고 분노하는 ‘엄마파’와, “행동이 그래 보여서 보모 같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무슨 인종차별?” 이라고 생각하는 ‘보모파’가 싸우는 중이다.

심리학 교과서적인 답 먼저 말하자면 일단 인종차별(racism)이 맞다. 보모라고 볼 수도 있지 무슨 인종차별씩이나…라고 생각할 사람들을 위해 아래 설명하겠다.

그러나 한편 이 논란의 인종차별 요소를 진작에 간파했던 사람이라도 다른 상황, 다른 쟁점들에서는 얼마든지 다른 입장이 될 수 있으니 자기 자신을 너무 과신하진 말고 아래 내용을 다른 상황들에 빗대어 스스로 돌아보자.

싸움 대결 갈등 승부

1. ‘인종차별적인 뜻으로 조롱한 게 아닌데 무슨 인종차별이냐’ 

인종차별 혹은 인종주의(Racism)란 인종(race)을 근거로 삼은 편견이나 대우를 말하는 것으로, 비하 의도가 없더라도 의도와 별개로 인종차별은 인종차별이다.

2. ‘동양인이라서가 아니고 허둥지둥 쩔쩔매는 행동이 엄마라기보다는 보모 같아서 그런 것’ 

보모파의 주요 주장이고, 인종차별이란 비난에 맞서느라 꽤 정교하게 발전하여 엄마파의 속을 더 긁는 경우가 많다. 그럼 이걸 질문해 보자. 만약 그 여성이 백인이었다면? 아마 똑같이 ‘행동’했더라도 보모파의 수는 현재보다 현저히 적었을 것이다.

아니면, 인터뷰하는 남성이 백인이 아니라 동양인이었더라면? 그럼 아마 뛰쳐 들어오는 동양 여성을 보고 그렇게 즉각적으로 보모라는 생각부터 떠오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저 저 둘이 커플인가보다 하고 말았을 것이다.

즉, 당신의 눈은 의식적 판단을 하기도 전에 그와 그녀의 인종적 형질 차이(distance)를 즉각적으로 감지했고, 따라서 그 둘의 관계를 부부보다는 좀 더 거리가 있는 관계(권력의 거리를 포함하여)로 즉각적으로 지각했으며, 행동에 근거해 자신을 합리화하는 설명이 그 이후에 따라왔을 뿐이다.

3. (위의 2번 자매품) ‘얼굴이 잘 안 보여 동양인인지도 몰랐다’ 

감각과 지각(Sensation and perception)에 관한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길 바란다. 눈으로 들어오는(sensation) 수많은 정보가 다 의식적으로 의도대로 지각(perception)되는 게 아니라서 당신이 의식하지 못했다고 해서 감지하지 못했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당신의 눈은 분명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 색, 곱슬기 없는 일자 생머리와 질끈 묶은 모양, 동그스름한 얼굴형, 다소 어두운 피부색 (얼굴, 팔, 손)을 부지불식간에 감지했고, 이 모든 정보는 매우 순간적이고 자동으로 처리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무의식은 의식보다 강렬하다. 마케팅하는 사람들이 왜 소비자들이 신경 써서 보지도 않는 배경음악이나 색깔 배치 등에 돈을 들이는지 생각해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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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국 가정에 보모가 동양인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을 뿐이지 인종차별은 아니다’

사회문화적 영향에 의한 선입견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앞의 주장들보다는 통찰이 있다. 근데,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한 선입견, 이게 바로 인종차별, 정확히는 서두에서 말한 문화적 인종주의(cultural racism)다.

이 사회 자체가 이미 백인이 갑의 위치에, 유색인종이 을의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은 그런 사회지배구조로 고착되어 있다는 것, 그게 문화적 인종주의다.

‘그게 뭐 나쁜 거냐, 미국에 백인이 다수이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 등의 반론도 예상되는데, 나쁘고 나쁘지 않고를 떠나서 그 기울어진 권력구조 팩트 자체, 그리고 그 팩트를 확대 재생산하는 미디어와 사회구조의 영향 등을 문화적 인종주의라고 부른다.

그런 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백인의 우월성을 내재하게 되고, 그렇게 형성된 개인의 인종주의를 스스로 인식하거나 타파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걸 설명하기 위한 용어이다.

5. ‘나도 동양인인데 내 눈에도 보모로 보였다. 내가 동양인이니 내 생각이 인종차별일 리 없다.’ 

자신의 인종적 범주(소속; affiliation)를 해당 쟁점에 대한 판단근거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예: 여혐 논쟁에 꼭 하나씩 끼어 있는 ‘근데 나도 여자지만’) 문화적 인종주의는 그 문화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소수자도 예외가 아니다.

인종차별 연구에서 흔히 시행되는 아동 실험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 아동들에게 백인 인형과 흑인 인형을 주고 어느 인형이 예쁘냐고 물으면 백인 아동이건 흑인 아동이건 대다수가 백인 인형을 지목한다. 백인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 문화권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백인 인형이 ‘더 예뻐 보이’는 것이다.

바비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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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타파할 대상은 문화적 인종주의 

억울해하는 ‘보모파’들이여. 이해한다.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닌 거 알고, 인종이 아니라 당신 나름의 다른 판단 근거요소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사회문화적 영향에 의한 자연스러운 무의식은 당신의 의식보다 훨씬 강렬하다는 걸 겸허히 받아들이길 바란다.

나아가, 그렇게 사회 곳곳에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져 버린 문화적 인종주의 속에서 누군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닌 그런 말들’에 수없이 노출되어 매일 편견으로 고통받는다는 걸 알길 바란다.

반대로, 분노하는 ‘엄마파’들이여. 무의식은 정의(定義)상 스스로 그걸 의식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이해하고 너무 답답해하지 말자. (물론 나도 답답하다.)

모든 인종차별을 본인 의지에 따른 개인적 인종차별로 치환하다 보면 모순에 빠지고, 강한 저항에 부딪히게 되어 결국 본질이 흐려진다. 백인 인형을 고른 아이에게 이런 게 인종차별인 거 모르냐고 화내거나 답답해하면 아이는 당황하고 삐뚤어진다.

타파해야 할 대상은 문화적 인종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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