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지지자를 위한 탈출구 만드는 법’(이하 ‘트럼프 탈출법’)[footnote]Deepak Malhotra, “how to build an exit ramp for trump supporters” [/footnote]은 힐러리가 대선 토론 후 한창 잘 나갈 때 트럼프 지지자들의 지지 철회를 순조롭게 도울 목적으로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2016년 10월 14일에 게재된 글입니다.
그런데 정작 힐러리는 FBI의 이메일 재수사로 트럼프에게 뒤집어질지도 모를 지경이 됐고, 오히려 한국의 박근혜 지지자들에게 더 필요한 글이 되어 버린 느낌입니다. ‘트럼프 탈출법’의 요약 번역을 빙자해 현재의 한국 상황에 맞게 해설을 붙여 봅니다.
‘트럼프 탈출법’은 열성 지지자가 갑자기 패배를 접하게 됐을 때 주변에서 뭘 어떻게 하는 게 도움이 될지를 논리적으로 제안합니다. 상대가 뼛속까지 믿고 있던 믿음에 의문을 품게 되는 데는 사실과 자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자존심이 강한 이들에겐 증거를 한 다발 가져다 줘봐야 효과가 없다는 거죠. 정말 상대가 근본적으로 입장을 바꾸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입장 변화가 안전하고 망신스럽지 않게 느껴질 ‘탈출구'(exit ramp)를 마련해 주라고 조언합니다.
박근혜를 여전히 지지하는 5%의 국민에게도 ‘박근혜 탈출구’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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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대를 너무 코너까지 몰아붙이지 말라
토론 중 상대를 ‘멍청하다, 틀렸다. 비도덕적이다. 비이성적이다.’라고 몰아세울수록 상대는 자신의 입장 속으로 더욱더 깊이 들어앉게 됩니다. 소위 요즘 하는 식으로 말하면, ‘진지 빠는’ 상태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선 상대는 당신의 논리나 자료 중 단 하나라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으면 그거 하나 붙잡고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합니다. 온라인상에서 정치적 논쟁을 한 번이라도 해 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 겁니다. 바로 ‘정신승리’ 모드로 전환한다는 거죠. 오히려 토론 종료 후 상대의 입장만 더욱더 공고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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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보를 제공한 다음에는 혼자 생각할 시간을 줘라
치열한 토론으로 상대방이 생각을 바꿀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오히려 페이스북에 ‘오늘 이런 정보를 봤는데 관심이 있으면 한번 볼래?’ 정도의 접근법이 차라리 효과적이라는 거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경하거나 당신에게 동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면, 제공받은 정보가 상대의 맘속에 무사히 착륙하게 되는 거고 차차 이게 마음속에서 작동해 생각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거죠. 이게 바로 여론 조사에서 주간 월간 지지율 변동이 생기는 기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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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편향과 싸우기 위해 편향된 입장을 취하지 말라
그런데 어디 1번과 2번처럼 되나요? 신선이 아닌 다음에야.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격론이 벌어질 때 주의해야 할 사항입니다. 대부분 상대는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궤변 그리고 극단적 논리나 자료를 들고나올 확률이 높습니다. 이때 흥분해서 나도 덩달아 상대방과 똑같이 편향된 논쟁 자세를 보이면 망한다는 거죠.
요즘 이런 표현 많이 접해 보셨죠?
“무당, 호빠, 친딸 여부, 노인네들, 아낙네….”
이런 표현 쓰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망할 게 뭐냐고요? 그건 여러분의 진실성 혹은 신뢰도입니다. 상대가 입장을 바꿀 때 결정적인 건 당신이 신뢰할만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이죠. 다시 말해 격렬한 토론 중이라도 상대의 말 중 수긍할만한 점이 하나라도 있다면 겸허히 인정해 주라는 겁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 순간에는 입장을 바꾸기는커녕 당신의 공평함에 일말의 감사 표시도 없을 테지만, 사람이란 게 특이해서 그 순간을 기억하고 나중에 문 뒤에서 감사함을 느낍니다. 바로 그 지점이 변화가 시작되는 지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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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양자택일을 강요하지 말아라
‘새누리당보다는 민주당이 더 좋아!’ 혹은 ‘새누리당보다는 정의당이 훨씬 좋아!’라고 해 봐야 골수 새누리 지지자에게는 씨도 안 먹히는 얘깁니다. 일단 환상이 깨지고 나면 이들은 제3당을 선택하거나 투표에 기권하겠죠. 최근 3당의 지지율 변화를 보시면 알 겁니다.
새누리당에서 빠진 20%도 넘는 지지율이 민주당으로 몰려가긴커녕 오히려 ‘지지 정당 없음’으로 옮겨 갔죠. 이들에게는 새누리당의 라이벌 당(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라고 강요하기보다는 그냥 또 다른 입장을 한번 고려해 보라고 하는 정도가 최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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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체면을 세워줘라
상대가 자신의 기존 입장이 잘못됐다는 걸 인정한다는 것과 현재의 지지 패턴을 변경한다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망신당할 바에야 아예 기존 입장 고수를 선택합니다. 사실 상대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만 해도 대단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상대가 무사히(?) 입장을 바꿀 상황이나 방법을 찾지 못했다면 아직 얘기가 끝난 게 아닙니다. 이에 대한 해법은 다음 장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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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필요한 변명거리를 제공하라
아무리 사소하거나 상징적인 의미일지라도 상대가 ‘내가 이래서 입장을 바꾸는 거야’라고 이야기할 핑계를 마련해 줘야 합니다. 하긴 요즘은 매일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기사가 전부 다 변명거리로 쓰기 안성맞춤인 것들이라 별로 어렵지 않아 보이기는 하지만, 마지막 정신적 장애물을 넘는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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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우리 편’으로 받아주세요
만약 상대방이 입장을 최종적으로 변경했을 때 온라인상이든 개인적 대화에서든 자신이 처벌받거나 공격받는다는 느낌을 들게 하면 안 됩니다. 지인끼리 누가 입장 바꿨다고 처벌씩이나 하겠냐 싶겠지만, 여기서 얘기하는 처벌이나 공격은 미묘한 표현까지 포함합니다.
가령, ‘내가 박근혜는 언제가 사달이 나도 크게 날 거라고 얘기했잖아!’ 같은 것도 상대방 입장에선 공격받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최근 입장을 바꾸고 있는 친박 진영의 인사에게 하는 ‘변절자 XX’라거나 ‘순장조’ 혹은 ‘총대 메는 놈도 자살해 주는 놈도 없다’라는 얘기도 표현 강도만 다르지 맥락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노원구에서 안철수 의원과 맞붙었던 이준석 씨를 페이스북에서 팔로우하는데 댓글 중에 거의 스토킹급 언급도 있습니다. 사실 이준석 씨 정도면 새누리당에서도 얘기가 통할 수 있는 젊은 정치인인데, 지속해서 ‘너도 나쁜 놈이다’라는 메시지를 다는 시민들이 있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그냥 우리 편으로 오겠다고 하면 잠자코 받아주세요. 상대보고 자신의 기존 입장을 버리라고 한 다음에 막상 버리고 왔을 때 헌신짝처럼 내팽개쳐 버리면 앞으로 누가 우리 편으로 오겠습니까?
결론 – 정치적 저축이 필요한 때
요약 번역이라는 단서는 달았지만, 결국 써 놓고는 제 맘대로 해설이 되어 버렸네요. 사실 위에 적은 7가지를 다 한다면 인내심이 신선의 경지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원칙이라도 세워 놓지 않으면 멀리 보면 다음 대선, 가깝게는 박근혜 대통령 교체도 쉽지 않을 겁니다.
예전 이명박 대통령 때 지방선거에서 야당이 대승한 적 있죠. 그때도 투표 내용을 들여다보면 보수 진영의 표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지금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5% 근처에 있고 TV조선을 포함한 보수언론도 정부에 비판적이니 야당과 범민주시민사회가 이긴 거 같죠?
꿈 깨십시오. 정말 눈곱만한 핑곗거리만 있으면 다시 새누리당과 그쪽 대선후보를 지지할 시민이 최소한 40%입니다. 거기에 더해 그분들의 투표율은 여러분이 야당 편이라고 생각하는 20~30대보다 엄청나게 높고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정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에 정치적 저축을 차분하게 해 두시길 바랍니다. 이 ‘좋은'(?) 시절 몇 달 안갈 겁니다.
보유 – 넋두리
하야든 탄핵이든 최소한 돗자리 정도라도 깔려 있어야 뒤로 넘어지든 말든 할 것이 아닙니까. 정말 심각하게 박근혜 대통령을 교체하려면 최소한 현시점에서 야권을 중심으로 임시 내각(총리 포함) 명단 구성에 착수했다는 얘기 정도는 나와야 합니다. 임시 내각 명단이 발표돼야 일반 시민 입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개편된 내각과 비교 거리가 생길 테고, 따라서 판단의 기준점이 생기겠죠.
다시 말해서 그냥 지금처럼 박근혜 정부의 문제점만 지적하며 반사이익에 머물 게 아니라 우리가 확실히 나라를 이끌 비전과 능력과 집권 의지가 있다는 걸 과시하는데 그만이라는 겁니다. 지지자 입장에서도 야권의 수권 능력에 자신이 없는데 하물며 중간층에서 약간 오른쪽에 있는 시민들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죠.
근데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지난번 국회의장 선출 때 경험해 봐서 아실 겁니다. 민주당과 국민의당 그리고 추가로 한 40~50명 남짓한 새누리당의 비박 진영 의원들을 포함하면 얼추 200여 명을 모아서 임시내각의 권위는 인정받겠지만,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면 정말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말로만 나라 염려하는 게 아니라면 서둘러서 더민주, 국민의당, 정의당, 새누리 반박 진영이 실무선에서라도 협의가 착수해야 합니다. 일단 이들이 첫 모임을 시작했다는 보도만 나가도 시민들 사이에 박근혜 대통령 교체에 대한 여론이 훨씬 더 건설적이고 구체적인 방향으로 자리 잡을 겁니다. 그런데 총리는 누굴 세우죠? 김병준 씨나 손학규 씨가 참 아쉬운 지점이죠. 조금만 더 인내했으면 무난한 그림이 그려졌을 텐데.
참고로 여기서 야당에 드리는 말씀은요. ‘집권하고 싶으면 이렇게 해라’가 아니고 ‘제발 좀 숨 쉬고 살 사회 좀 만들게 도와주라’입니다. 그나저나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은 대한민국이 참 많이 발전했구나 싶습니다. 이런 혼란 상황에서 군부 쿠데타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어딥니까? 그게 우리가 지금까지 피를 흘리고 인내하며 축적한 정치적 자산, 민주주의의 저력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민주주의, 공화국 대한민국의 정신이 뿌리에서 흔들렸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국민이 ‘빌려준’ 권한을 최순실에게 ‘던져 버린’ 박근혜는 여전히 청와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