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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참사관 시절 국외연수 기간 중 상부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향 보고를 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다.

the300 – 반기문 유엔 총장, 美 연수생 시절 DJ 동향 전두환 정권에 보고

반기문 총장, 연수생시절 DJ 동향 전두환 정권에 보고
5共, 美 망명 DJ 일거수일투족 감시…반 총장 적극 동참 

해당 기사는 위와 같은 제목 아래 전문 사본을 공개한 후 본문에는 “업무와 관계없는 연수생 신분이었다는 점에서 본인의 의사에 따른 적극적 보고가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어 눈길을 끈다”고 적었다.

그 후 반기문 총장의 처신을 비판하는 여론이 비등하다. 하지만 그 보도 덕에 당시 비밀로 분류되었으나 이제 공개된 해당 외교 전문을 본 나는, 당시 국외연수자였던 반기문을 위한 변명을 하고 싶어졌다.

외무부 외교전문 usw-6336

외무공무원의 동향보고, 적극적 부역인가?

문제의 핵심은 기사 내용대로 반기문의 동향보고가 ‘독재정권에 대한 적극적 부역인가’ 하는 점이다. 나는 아니라고 본다. 혹은 ‘최소한 부역이라고 증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외교부 소속인 참사관 연수생이 주재국 공관에 정보 보고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더불어 공관 대표인 대사가 정보를 요약하여 본국에 보고하는 것은 응당해야 할 업무다. 민간인 사찰이나 야당 정치인 감시쯤 되는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참사관 연수생이 해당 나라에서 외교관 취급을 받는지 아닌지를 떠나 세금으로 공부하는 이상 스스로 외교관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마땅하다. 그렇다면 주재국, 그것도 자신이 소속된 연수기관에서 한국과 관련한 움직임이 있을 때 친한·반한 혹은 긍정·부정 이슈를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보고하는 것은 ‘공무원으로서’ 성실한 것이고, 이는 칭찬할 일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그 보고문 내용은 어떤지 살펴보자.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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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바드 대학에 연수중인 반기문 참사관이 1.7 동 대학 교수로부터 입수, 당관에 통보하여 온 바에 의하면 당지 COMPAIGN TO ASSURE A SAFE RETURN FOR KIM DAE JUNG가 주동이 되어 약 130명의 미국 학계, 법조계 인사가 연서한 대통령각하앞 김대중 안전귀국요청 서한을 1.10경 발송예정이라함.

2. 동 서한의 요지는 김대중의 무사귀한과 PUBLIC LIFE의 보장, 이를 통해 국내적인 신뢰를 도모하는 것은 85년 국회의원 선거, 86 아세안게임, 88올림픽 및 88년 대통령선거를 위한 SOCIAL HARMONY의 CRITICAL MOMENT가 될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함.

3. 동 서한에 연서한 인사는 하바드 대학총장, 라이샤워교수, 브레진스키교수, HUNTINGTON 교수, 미네아폴리스 시장등인바, 동 서한은 접수되는대로 파편 송부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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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보건대, 실제 내용은 ‘김대중 동정’이 아니라 ‘하버드 대학 동정’이다. 민간인·정적(政敵) 사찰이라 보긴 힘들다. 그렇다면, 연수생이 자기 공부하고 틈틈이 쉬는 와중에 자신의 연수기관에서 한국과 관련한 움직임이 있는 걸 보고 하는 차원으로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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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외무공무원의 한국 관련 정보 보고 그 자체는 장려할 일일까? 그 움직임이 국내인사 특히 야당 정치인과 관련한 경우에는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좀 더 생각해보자.

설사 다른 내용이었다 하더라도 – 예를 들어 4대강이나 국정교과서 찬·반의 사안이었다 해도, 혹은 나라가 달랐다 해도 – 즉, 네덜란드에 나간 중국 외교관이라 해도, 주재국에서 본국과 관련한 주요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외교관·외교연수생은 국익(?)을 위해서 신속히 사실관계를 보고해야 할까?

당연히 그렇다. 여야의 유불리를 막론하고 빨리 정보 보고를 보내야 한다. 그래야 본국에서 무슨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니까.

실례를 들어본다면, 주 네덜란드 외교관들이 (한국과 관련된 사안으로) 일본을 비판하는 외국학자들의 명단이나 성명서를 바로 입수해서 정부에 보고한 덕분에 네덜란드에서도 일제의 만행을 비판하는 학자나 시민단체가 있다는 게 더 잘 알려진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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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보를 수집해서 어떻게 보고할지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외교관의 임무 중 하나는 본국이 판단할 근거를 수집·보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 전문만 놓고 보면 딱히 문제 삼기 힘들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물론 당시 반기문 총장의 머릿속 의도가 어땠는지는 사실 위주로 기술된 저 전문만 봐서는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모르겠는 걸 가지고 ‘부역’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곤란하다.

당시 반기문 총장의 행동이 본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방해하고 독재자에게 충성하는 ‘영혼 없는 관료’의 행위였을 수도 있다. 그와는 반대로, 외교관이라면 응당 해야 할 일을 성실히 수행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전두환. 80년 광주를 군홧발로 짓밟고, 무수한 폭압으로 정권 내내 무고한 피를 뿌린 전두환.
전두환. 80년 광주를 군홧발로 짓밟고, 무수한 폭압으로 정권 내내 무고한 피를 뿌린 전두환.

그런데 말이다. 생활인으로서 월급쟁이 관료가 ‘외국에서 이러한 여론이 있으니, 김대중을 계속 탄압하면 한국 이미지도 나빠진다, 앞으로 전향적 조치를 취하자’ 같은 바람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행간에 담아 독재정권의 변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본국에 보고한 것이라면?

만약 반기문 총장이나 당시 주미대사가 이런 요지로 항변한다면, 이 전문만 놓고 봐서는 딱히 그 주장을 기각할 근거는 없다. 그래서 실제 당시 분위기가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당시 외교 당사자들은, 미국은 물론이요 한국 외교부도 ‘김대중에 대한 전향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상부에 전달하려 애쓴 정황도 보인다. 상부의 요구와 외부 상황 사이에서 조율하려 애쓴 흔적이 느껴지기도 한다.

실제 반기문의 보고가 당시 주미대사나 반기문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선의의 보고’였다면, 지금에 와서 마치 독재정권에 부역했다는 식 비판에 억울할 노릇이겠다. 하지만 어쩌랴. 그런 비판마저도 감내하는 것이 ‘군사정권을 향해 사표를 던지지 않은’ (고위) 공무원이 감당해야 할 어떤 사명 혹은 숙명 아니겠는가.

반기문에 대한 평가

나는 군사정권 아래에서 일한 모든 공무원이 사표를 던져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위 공무원은 물론이고, 고위 공무원도 일부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그 시절 고시를 본 이들은 모두 ‘적극 부역자’라고 해야 할까?

불의한 세상에서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행동지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항상 고민할 문제다. 그 고민에는 ‘나 자신도 이를 지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포함되어야 한다. 올바른 생활인, 혹은 대중이 함께할 수 있어야 생명력이 이어지고 결국 세상을 바꿀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소신 있게 사표를 던지거나, 용감하게 내부고발을 하는 이들을 우리가 존경해야 마땅하다.

변명은 여기까지다.

반기문 (2015, 출처: ITU Pictures, CC BY) https://en.wikipedia.org/wiki/Ban_Ki-moon#/media/File:Ban_Ki-moon_April_2015.jpg
반기문 (2015, 출처: ITU Pictures, CC BY)

오해를 막기 위해 보태자면, 나는 반기문을 어느 당 대선주자로 나오든 지지하지 않으며 편들어줄 생각도 없다. 그가 한국에서 대선 후보가 된다면, 정의당이나 녹색당 같은 진보정당 후보가 되지 않은 다음에야 동성 결혼, 차별 금지 등 많은 새로운 가치를 담은 의제에 대해서 유엔 총장 시절보다 후퇴한 정책을 내세울 것이다. 그에게나 우리 사회에나 모두 비극이다.

과거 그의 처신은 접어두더라도, 최근 ‘위안부’ 관련 입장은 기존 한국 사회의 성취보다도 후퇴했다. 반기문 총창은 한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새해 인사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께서 비전을 갖고 올바른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게 평가할 것으로 생각한다.”

-반기문, 2016년 1월 1일.

따라서 유엔 총장 퇴임 이후 국내 정치권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것이 두루두루 좋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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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info” head=”외교부 사투리? 정보 은폐 위한 은어?”]

끝으로 외교 전문에 나타난 ‘외교부 사투리’에 관해 짧게 살펴보자. 이번 전문만 해도, 이용한 단어들을 보면 평소에 쓰지 않는 생경한 단어들이 많다.

  • 당관 – 우리 공관
  • 당지 – 우리 공관 관할지
  • 동 대학 – 앞에 언급한 대학
  • 동 서한 – 앞에 언급한 서한
  • 파편 송부 – 파우치(외교행낭) 편으로 보냄

지금이야 전 세계의 모든 한국 대사관이 서울의 외교부와 인트라넷으로 연결되어 전자결재를 해서 전자문서시스템으로 보고가 올라가지만, 예전엔 외교전문을 보내기 위해서 텔렉스를 썼다. (그 전엔 암호화된 전보를 쳤을까?)

이때는 글자 한 자 한 자가 다 돈이었다.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서는 한자어 외래어 외국어를 막론하고 약어를 써야 했다. 요즈음엔 외교 전문도 좀 더 아름답거나 자연스러운 표현을 쓰고, 과거 어투나 용어도 개선하고 있으니, 너무 ‘한국어를 파괴한다’거나 ‘끼리끼리 알아들으려 은어를 쓴다’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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