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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성 법률 에세이

C시 지방법원.

지방 도시 법원에서의 재판은 서울 법원에서의 재판과는 다른 독특한 느낌이 있다. 뭐랄까 좀 더 포근하고 인간적인 느낌이 있다.

후배 K 판사와의 추억 

나는 사건을 진행하기 위해 102호 법정으로 들어섰다. 판사석을 보니 대학 1년 후배인 K 판사가 재판을 진행 중이었다. 나보다는 1년 늦게 사법시험에 합격했던 K. 그동안 통 연락을 하지 않다가 이렇게 10여 년 만에 법정에서 판사와 변호사로 만나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자주 법리적인 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학구파 K. 나는 그와 같은 시골 출신이라는 것에 동질감을 느꼈다. 지금도 기억난다. 어느 겨울. K가 찢어진 운동화를 신고 있는 것을 보고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과외 아르바이트 받은 돈으로 나이키 운동화를 하나 선물했었다. 자존심 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고맙게 받아주던 K. 세월이 많이도 흘렀구나.

나이키 운동화

우연히 방청한 ‘특이한’ 사건 

내 사건 진행 차례가 되어 K에게 슬쩍 눈인사하고 재판을 시작했다. 이미 내가 주장할 내용은 다 서면으로 제출한 상태라 이번 기일에는 재판을 종결지으면 되었다. 다음 기일은 선고기일이라 굳이 내가 출석할 필요가 없었다[footnote]민사 사건의 경우 선고기일에는 변호사가 출석하지 않고 직원이 선고 결과만 파악하는 것이 관례다.[/footnote] 나는 재판 진행을 마치고 변호사석에서 가방을 챙기다가, 다음 사건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건 내용이 좀 특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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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내용

  • 원고는 OO 캐피탈, 피고는 어느 할아버지.
  • OO 캐피탈은 11년 전 할아버지의 아들에게 3,000만 원을 대출해 줬고, 할아버지는 아들의 대출채무에 대해 연대보증을 섰다. 그런데 돈을 빌린 지 6개월 만에 아들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고, OO 캐피탈은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서류 더미에서 이 내용을 발견하고는 할아버지를 상대로 연대보증에 따른 대출채무를 갚으라고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 그런데 이미 연체 기간이 10년이 넘다 보니 이자가 원금보다 더 커서 소송금액은 9,000만 원이 넘었다. 할아버지에게는 집이 한 채 있었는데 OO 캐피탈은 그 집에 가압류를 걸어 놓은 다음 이 사건 청구를 했다. 할아버지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혼자서 재판을 진행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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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판사님, 우리 부부가 평생 일해서 겨우 집 하나 갖고 있습니다. 한 번만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인 사람 남자

만약 이 사건에서 할아버지가 패소하면 OO 캐피탈은 승소 판결문을 가지고 할아버지 집을 경매에 넘긴 후 누군가가 낙찰을 받게 되면 그 낙찰대금에서 자신들의 채권을 회수해 갈 수 있다. 사정이 너무 딱했다.

피고 할아버지의 딱한 사정 

K 판사는 OO 캐피탈 측 변호사에게 질문했다.

“아니, 이렇게 오랫동안 묵혀뒀다가 소송을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변호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죄송합니다. 내막을 알아보니 원고 회사 담당자가 계속 바뀌면서 이 사건 서류가 제대로 관리가 안 되었나 봅니다.”

하지만 소송을 늦게 제기했다고 해서 재판을 안 할 수는 없다. 할아버지는 계속 K판사에게 “판사님, 제발 저희 늙은이들에게 선처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읍소했다. 민사재판이라는 것이 그렇게 하소연한다고 자기 원하는 대로 결론이 날 수는 없다.

K 판사는 OO 캐피탈 측 변호사에게 물었다:

“이 사건, 조정할 생각 없으신가요? 보니까 피고 사정이 딱한 것 같은데.”

K 판사는 원고 청구 금액 중 일부를 양보하게 하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을 볼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그러자 변호사는 사무적으로 답했다:

“저희 의뢰인은 조정할 생각이 없다고 합니다. 그냥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나는 계속 법정에 남아서 그 사건이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K 판사는 아주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K판사의 조언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K 판사의 성품이라면, 이 사건에서 할아버지에게 패소 판결을 내리는 것에 대해 정말 마음 아파할 것 같았다. 하지만 판사는 법에 정해진 대로 재판을 하는 사람일 뿐, 억울하다고 해서 무조건 할아버지 편을 들 수는 없다. K 판사는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할아버지, 이 사건을 혼자서 진행하지 마시고 변호사나 법무사를 통해서 물어보시고 제대로 진행하십시오, 상대방의 주장에 대해서 법적으로 대응하셔야 합니다. 그냥 선처해 달라고 하시면 저희 판사들은 도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이디어 생각 사람

민사 재판에서 판사는 철저히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원고나 피고가 ‘주장한 내용’에 대해서만 판단을 해야 한다(소위 ‘당사자주의’, ‘처분권주의’). 즉, 원고나 피고는 자신에게 유리한 공격, 방어방법이 있을 경우 그것을 법정에서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으면 판사는 이를 판단할 수 없다. 판사가 지레짐작하여 그 내용을 다 판단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 할아버지가 참 딱하다는 생각을 하며 변호사석에서 일어서는데, K 판사가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할아버지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할아버지, 제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리는데요, 기록을 잘 살펴보시면 답변할 내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판사라서 그것을 가르쳐 드릴 수 없고요. 꼭 변호사를 찾아가서 기록 한 번만 봐 달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좋은 방법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K 판사는 이 말을 하면서 세 번이나 나를 쳐다봤다.

‘뭐지? 내게 하는 얘긴가?’

아하! 소멸시효, 그게 해법이군! 

일단 나는 법정을 나왔다. 곧이어 할아버지가 눈물을 닦으며 법정을 나오셨다. 나는 할아버지께 명함을 내밀고는 소송기록을 잠깐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선선히 기록을 내밀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소송기록. 전체를 읽어보는 데 10분이면 충분했다. 나는 왜 K 판사가 아까 나를 그렇게 쳐다봤는지 이해가 됐다.

‘소멸시효 문제로군.’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주었더라도 채권자(빚을 받을 사람)가 일정한 기간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상대방(채무자)은 ‘당신은 왜 오랜 기간 동안 내게 돈 갚으라고 하지 않았소?’라면서 채권자의 청구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일정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권리를 소멸시키는 ‘소멸시효’의 법리이다.

시간 시계

그런데 문제는 재판 과정에서 채무자가 소멸시효의 이익을 얻으려면 채무자 스스로 소멸시효 주장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채무자가 소멸시효 주장을 하지 않았는데 판사가 직권으로 소멸시효 판단을 하게 되면 이는 위법한 재판이 된다.

OO 캐피탈이 할아버지의 아들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 11년 전. 그리고 그 아들이 이자를 갚다가 사망한 것은 10년 6개월 전. 그렇다면 결국 OO 캐피탈은 10년 6개월 전부터 보증인인 할아버지에게 돈을 갚으라는 청구를 할 수 있었는데도 이를 게을리하고 있다가 이제야 그 청구를 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법정에서 한 번만 봐달라고 울면서 애원할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주장만 하면 되는 것이다.

“원고의 채권은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원고의 청구는 기각되어야 합니다.”

오케이! 나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근처 PC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20분 정도 시간을 들여 간단한 ‘준비서면’을 작성한 후 3부를 출력했다.

“할아버지, 이 서류를 지금 법원에 가서 접수하십시오.”

할아버지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래도 변호사라는 사람이 서류를 만들어 주니 신뢰하는 눈치였다.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총총히 법원으로 들어가시는 할아버지.

K 판사의 전화, ‘법에도 인정이 있나요?’ 

그로부터 두 달쯤 지났을 때 나는 K 판사의 전화를 받았다.

“선배님, 그때 그 할아버지 사건은 잘 됐습니다. 오늘 할아버지 승소하셨습니다.”

“어? 그걸 왜 내게?”

“그 할아버지 재판 당일 바로 준비서면 접수됐잖아요. 선배님 작품인 거 압니다.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판사가 그렇게 마음이 물러서 어떡하노?”

“선배님, 제게 책 주셨던 거 기억하세요?”

책이라, 그랬구나. 1992년. 내가 사법시험에 합격한 직후 하숙집을 찾아온 K가 어렵게 꺼낸 말.

“선배님, 혹시 보시던 책, 저에게 몇 권 주실 수 있으신가요?”

법률서적이 워낙 고가여서 나나 K 같은 지방 고학생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부담이 되었다. 나는 “그래, 안 그래도 저 놈의 책들, 징글징글하다. 모조리 가져가 버려라. 난 깨끗한 책 사서 보면 되지.”하면서 20여 권의 책을 줬던 것 같다. K가 이야기를 하니 그제야 기억이 났다. 저 친구는 그때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책

판사는 수많은 분쟁에 대해 양측의 주장을 들어 판단하고 그 결과를 선언하는 사람이다. 변호사는 자신에게 의뢰한 의뢰인의 입장만 대변하면 되지만, 판사는 분쟁 당사자 양측의 주장을 다 들은 후 공정한 결론을 내야 한다. 그 직업적인 고민은 변호사의 그것보다 더 클 수 있으리라.

‘법에도 인정(人情)이 있나요?’

이렇게 질문하는 분들이 있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개인적인 인정에 이끌려 사건을 처리할 때는 또 다른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K 판사처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 판사들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앞으로도 법정에서 K 판사가 따뜻하고도 사려 깊은 재판진행을 해주길 기원하고 또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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