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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제네바는 당연히 스파이의 도시가 될 수밖에 없다. 제1차 제2차 대전의 와중에서 계속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을 유치한 도시이자, 온갖 협상이 다 제네바에서 개최됐다. 그러니 각국 대표단은 물론 각국 스파이들이 암약(!)하던 곳 중 하나가 바로 제네바. 당연히 사연 많은 도시이다.

제네바를 배경으로 당대를 떠들썩하게 한 다섯 ‘스파이’ 사건을 소개한다.[footnote]Tribune de Genève지에서 흥미로운 인터렉티브 기사를 발행했다. 제목은 ‘스파이의 도시, 즈네브’(Geneve ville d’espions). 이 글은 이 기사를 참조했다. [/footnote]

1. ‘모스크바’라 불렸던 제네바

라도 Alexandre Rado마르게르타 볼리, 그녀는 바젤의 대학생으로서 이탈리아의 반(反)파시스트 집안 출신이었다. 베른에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녀에게 누군가 ‘접근’했다. 알렉산드르 라도(Alexandre Rado, 사진), 소련의 제네바 정보지국장이었다.[footnote]다만 그는 소련 출신이 아니라 헝가리 출신이었고 그녀는 그의 이름을 알베르(Albert)로 알고 있었다.[/footnote] 그는 그녀를 ‘레드 오케스트라'(Rote Kapelle; 독일을 상대하기 위한 소련의 스파이 조직)에 가입하게 하고, 프랑스어와 암호술, 모스 부호를 배우게 했다.

그녀의 암호명은 로자(Rosa). 그러던 1942년 9월, 그녀는 한스 페터스라는 한 잘생긴 젊은 독일 출신 이발사(!)와 사랑에 빠진다. 둘은 데이트를 시작했는데, 로자는 항상 저녁 데이트를 거절하고 그냥 집에 초대해서 음악을 듣곤 했었다. 한스는 로자를 의심했다. 한스가 직업상 이발사이긴 했어도 독일 국방군 방첩실[footnote]독일 국방군 방첩실(Abwehr), 그의 암호명은 로미오[/footnote] 요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라마폰(당시의 오디오) 밑에 ‘피아노'(당시 암호기 호칭)가 있음은 몰랐지만, 그는 로자의 방에서 책 한 권을 훔쳐낸다.

문제의 소설책
문제의 소설책

소설책으로 위장했지만, 문제의 책은 암호를 작성하고, 해독하기 위한 ‘암호 책’ 책이었다. 한스는 바로 이 책을 훔쳐 독일국방군 방첩부로 보냈고 암호책을 건네받은 독일 방첩부도 깜짝 놀랐다. 이발사가 이런 귀중한 자료를 보내다니. 독일 정부는 로미오에게 철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이런 동향을 스위스 정보국은 모르고 있었을까? 아니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스위스는 당시 중립국으로서 주축국과 연합국 모두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스위스 당국은 1943년 스위스 내에서 스파이 행위를 금지한다는 법을 근거로 로자와 로미오 둘 모두를 체포했다. 당연하겠지만, 로자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지금도 살아있다!)

2. 화살 암살

때는 알제리 전쟁 당시였던 1957년 9월 19일. 마르셀 레오폴드(1902년생)는 이날도 다른 평범한 날과 마찬가지로 자기 아파트 3층(한국식으로는 4층)에 들어가는 중이었다.[footnote]레오폴드의 아파트는 Rive가에 있다.[/footnote]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문을 닫으려던 때 갑자기 레오폴드는 화살을 맞았다. 그는 이 화살을 독화살로 생각했다. 그는 벨을 눌렀다. 놀란 아내가 뛰어나왔고, 화살을 맞은 사내는 아내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암살당했던 현장, 지금도 남아 있다. 출처: espions.tdg.ch http://espions.tdg.ch/chapitre2.html
암살당했던 현장, 지금도 남아 있다. (출처: espions.tdg.ch)

이 화살은 대단히 정교하게 제작된 것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독화살이라 나왔지만, 실제 검시 결과는 내출혈로 인한 사망이었다. 화살이 대동맥에 꽂혀 내부 출혈이 심했던 것이다. 이 화살을 제작한 곳은 프랑스 정보국(DGSE의 전신인 SDECE)인 것으로 알려졌다.

레오폴드는 도대체 어떤 사내였을까? 그는 중국에서 병원과 금융, 광업 사업을 벌여 재벌이 됐다. 그는 사업을 위해 모택동과 장개석 모두에게 무기를 공급했다. 하지만 공산화된 중국은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았고, 그는 고향인 스위스로 쫓기듯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던가. 무기 장사하던 버릇은 사라지지는 않았었다. 레오폴드는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알제리해방전선(FLN)에 무기를 공급했고, 그 ‘비즈니스’는 곧 프랑스 정보당국에 포착됐다.

독화살 살인사건을 다룬 트리뷴 드 즈네브 특별판 (출처: ) espions.tdg.ch http://espions.tdg.ch/chapitre2.html
독화살 살인사건을 다룬 트리뷴 드 즈네브 특별판 (출처: espions.tdg.ch)

그를 살해한 곳은 프랑스 정보부 내의 비밀군사조직(Main rouge; 붉은손)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진범은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3. 바르셸 사건

우베 바르셸(Uwe Barchel)은 갑자기 떠오른 서독의 젊은 정치 스타였다. 재신임 투표로 인해 정권을 잃은 헬무트 슈미트 대신 정권을 차지한 기독교민주연합(CDU)의 헬무트 콜은 정권 교체를 통한 분위기 쇄신을 위해, 그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주지사로 전격 발탁했다.[footnote]실제로는 원래 주지사를 승계했다.[/footnote].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38세였다.

1979년 당시 우베 바르셸의 선거 홍보 포스터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https://sv.wikipedia.org/wiki/Uwe_Barschel#/media/File:KAS-Barschel,_Uwe-Bild-7605-1.jpg
1979년 당시 우베 바르셸의 선거 홍보 포스터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그러던 중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사회민주당(SPD) 정치인 뒷조사를 바르셸이 명령했다는 스캔들이 터졌다. 그는 혐의를 부인했고, 곧이어 열린 의회 청문회에서도 혐의를 입증하기는 어렵다고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바르셸은 공직을 사퇴하고 스위스 제네바로 갔다. 원래 카나리아 제도로 휴가를 갔다가 중간에 제네바로 간 것이었다. 반박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던 그는 1987년 10월 11일 욕조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독일의 케네디'로 불리던 젊은 정치인의 최후. 바르셀은 1987년 10월 11일, 이렇게 발견됐다. (출처: welt.de http://www.welt.de/themen/barschel-affaere/)
‘독일의 케네디’로 불리던 젊은 정치인의 최후. 바르셀은 1987년 10월 11일, 이렇게 발견됐다. (출처: welt.de http://www.welt.de/themen/barschel-affaere/)

바르셸의 죽음 자살일까, 타살일까?

일각에서는 독일 국내 방첩국 요원이 스캔들을 잠재우기 위해 살해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실제로 같은 호텔(Beau-Rivage)에 묵었던 요원이 있었지만, 해당 요원은 자신이 그때 그곳에 있던 이유는 히즈불라에 잡혀 있던 독일인을 석방하기 위해서였다고 1998년 인터뷰를 통해 밝혔다:

“바르셸이 같은 호텔에 묵었다는 사실을 제가 알았더라면… 그는 지금도 살아있을 겁니다.”

모사드 관련설도 있다. 이란으로 판매되는 무기가 지나는 곳이 바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킬 운하가 바로 이 주를 지나간다)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모사드 요원이 암살했다는 설이다. 문제는 이 모사드설을 조사하고 있던 사설탐정이 1992년 역시 암살된 채로 발견됐다는 점이다. 단순 약물 복용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 가설은 모두 증거가 부족하다.

바르셸이 한창 활약할 당시 독일 언론은 그를 ‘독일의 케네디’라고 불렀다.

4. 이란에서 온 킬러

1979년 11월,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이란의 정권을 장악했다. 당시 이란의 샤를 무너뜨린 주체는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세력만이 아니었다. 샤의 폭압적인 정치 탓에 진보주의나 공산주의 등 여러 세력이 호메이니와 합세했고, 혁명 뒤 이들이 또 분리될 것은 분명해 보였다.

카젬 라자비 카젬 라자비(Kazem Rajavi,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동생이 이끈 ‘이란인민성전조직'[footnote]MEK, PMOI, MKO 등 여러 가지 약칭이 있다[/footnote]도 이란 혁명을 주도한 세력 중 하나로 혁명 이후 그는 UN 주재 이란 대사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하지만 호메이니의 이슬람 정권 역시 이전의 샤 정권과 다를 바 없는 폭압 정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라자비는 UN 대사를 사임하고 스위스에 망명을 신청했다.

이를 이란 정권이 그대로 봐줄 리 없다. 호메이니는 ‘이란인민성전조직’을 불법화했고, 카젬 라자비에게 사형을 구형(파트와)했다. 이때가 1986년. 그리고 이란 정보당국은 그를 암살하기 위해 1) 암살 예행연습을 하고 2) 그 뒤에 자라비를 죽이기 위해 스위스에 단체로 암살단을 보냈다. 그 규모는 십수 명에 달했다.

암살 ‘예행연습’은 1987년 8월 10일 벌어졌다.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이란 출신 장성을 부인이 보는 앞에서 총으로 쏴 죽였다. 이제 남은 건 라자비였다. 암살단은 라자비의 행적을 하나하나 감시하고, 적절한 ‘타이밍’을 노렸다. 만약을 대비한 시나리오도 세 개나 준비했다. 하나는 집 폭발, 두 번째는 차량 폭발, 세 번째는 매복 후 암살. 최종적으로 채택한 시나리오는 세 번째였다.

1990년 4월 24일, 제네바 집으로 향하고 있던 라자비를 차량 두 대가 쫓아왔다. 한 대는 라자비 앞에, 다른 한 대는 라자비 뒤에 차를 댔고,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제 우지 기관단총이 불을 뿜었다. 라자비는 현장에서 즉사했다.

살해현장에 모인 이란인들과 친구들 (출처: espions.tdg.ch http://espions.tdg.ch/chapitre4.html)
살해현장에 모인 이란인들과 친구들 (출처: espions.tdg.ch)

이란 정부는 그의 암살 흔적을 지우려 하지도 않았고, 암살단 철수 시켰다(심지어 사용된 차량은 UN 대표부에 소속돼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이들은 물론 지휘자 누구도 잡히지 않았다.

5. 제네바 이슬람센터의 두더지

클로드 코바시(Claude Covassi)는 제네바 태생의 ‘약장이’였다. 이비사(Ibiza; 스페인의 섬)에서 마약을 판매하며 살던 그를 처음에는 스위스 경찰이, 그다음에는 스위스 정보부가 ‘스카우트’했다. 스위스 경찰은 그를 매우 짭짤하게 이용했다. 워낙에 유럽 내 코카인 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클로드 코바시
클로드 코바시(출처: ajib.fr)

경찰에서 ‘코바시의 활약상’을 본 스위스 정보부는 코바시를 이슬람 센터에 투입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하지만 코바시는 스위스 정보부를 실망시켰다. 원래 맡겼던 일은 제네바 이슬람센터 소장인 하니 라마단(타릭 라마단의 형)과 알-자와히리, 그러니까 알-카이다의 2인자 커넥션을 알아보는 임무였다. 하니 라마단은 무슬림형제단의 창립자인 하산 알바나의 외손주로 논란이 무성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코바시는 임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신용카드 사기로 경찰에 붙잡혔다. 그래서 기껏 정보부가 빼줬는데, 그는 시키지도 않았던 이슬람 개종을 하고 아예 라마단의 친위대라도 된 듯이 행동했다. 인터뷰를 자청하여 스위스 정보부가 불법적으로 자신에게 라마단을 어떻게 해 보라 시켰다고 폭로한 다음 그는 이집트로 망명했다.

그리고 2013년 2월 8일, 코바시는 침대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된다. 사인은 약물 남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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