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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플레잉 게임(Role-Playing Game)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특정 역할을 부여받아 수행하면서 게임을 즐기는 장르다. 내가 멋진 갑옷을 입고 강한 무기를 든 전사가 될 수도 있고, 화려한 마법을 시전하는 마법사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네트워크의 질, 즉 인터넷 속도가 빨라지면서 대규모의 게이머가 동시에 같은 세계 속에 접속해서 서로 상호작용하며 각자의 역할에 따른 임무를 수행하는 MMORPG[footnote]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footnote]장르가 탄생했다.

MMORPG 게임들
MMORPG 게임들

이런 롤플레잉 게임은 인간이 직접 의지를 가지고 캐릭터를 키우고 조정하기에 인간의 현실 세계를 잘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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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벨이 곧 법

게임

롤플레잉 게임의 가장 기본은 레벨업이다. 게임회사가 만든 몬스터를 잡거나 퀘스트를 수행하면 경험치를 준다. 이 경험치가 일정 수준 이상 쌓이면 다음 레벨로 넘어갈 수 있다. 이 과정을 ‘레벨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레벨업을 계속해서 높은 레벨(고렙)이 되면 더 어려운 곳에 가서 더 강력한 몬스터를 잡을 수 있게 된다. 더 강력한 몬스터는 더 많은 경험치를 주고, 이런 몬스터는 좀 더 강력한 아이템을 준다.

결국, 레벨업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은 경험치를 쌓고, 더 좋은 아이템을 얻는 선순환이 일어나서 낮은 레벨(‘쪼렙’)의 유저들과 점점 더 많은 격차를 벌린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고렙이 많아지게 되고, 게임 회사는 평균을 생각해 더 어려운 몬스터를 만들고, 신규 유저들은 계속 고렙을 따라가기 어려운 현상이 일어나곤 한다.

계단 레벌 격차

현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있다. 돈(재화)이 많으면 이를 고수익을 보장하는 다른 곳에 투자해서 계속해서 부를 불려 나가는 걸 말한다. 부동산 가격이 폭등할 때, 부자들은 많은 부동산에 투자해서 막대한 수익을 낼 수 있지만, 월급쟁이는 자신이 살 집조차 구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집값이 올라가는 것만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또, 한 분야에 전문성을 갖추게 되면 그 전문가에게 관련 일이 몰리게 된다. 그러면 그 전문가는 계속해서 자신의 전문성을 키울 수 있게 되고 다른 비(非)전문가와의 격차를 벌린다. 그래서 신입은 직장을 구하기 힘들지만, 경력직은 계속해서 양질의 직장을 얻을 수 있게 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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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임드(랭커)

게임

고렙 중에서도 초고렙 유저들은 다른 유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다. 이들은 게임상 ‘네임드’나 ‘랭커’로 불린다. 다른 많은 일반 유저들은 이런 랭커들과 말이라도 한번 하는 걸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랭커가 게임에 등장하면, 그 장면을 목도했다는 것만으로 스크린샷을 찍어 커뮤니티에 올리고 자랑하기도 한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 아닌가?

VIP 사람 유명인

현실

그렇다. 연예인을 거리에서 보면 사진을 찍어 소셜미디어에 올리지 않는가. 아니면 재력가나 어떤 분야에 최고가 된 사람들과 만나보고 대화하는 걸 큰 영광으로 삼지 않는가. 그래서 워렌 버핏과의 점심이 고가에 팔리기도 하고. 사실 별거 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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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버스 타다

게임

‘버스 탄다’라는 용어가 있다. 예전에는 ‘쫄쫄이’라는 표현도 존재했다. MORPG에는 ‘파티 사냥’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2명 이상의 유저가 파티를 맺고(시스템상 그룹 형태로 묶인 후에) 몬스터를 잡으면 해당 몬스터가 주는 경험치를 나눠 갖는다. 보통은 게이머들의 상호작용을 돕고, 어려운 사냥터를 조금 더 쉽게 클리어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하지만 이를 다른 방법으로도 활용할 수가 있다. 쪼렙이 고렙과 함께, 쪼렙은 도저히 잡을 수 없는 몬스터를 잡아 쪼렙이 해당 레벨에는 얻기 불가능에 가까운 경험치를 순식간에 쌓을 수 있다. 이를 일컬어 ‘버스 탄다’라고 부른다. 그러니깐 고렙 친구 한 명이 있으면 다른 쪼렙들은 한참이 걸리는 레벨업을 순식간에 해서 쪼렙 탈출을 아주 빠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버스

현실

‘금수저’는 부모 덕분에 다른 수저 계급과 비교하면 아주 빠르게 ‘현실 경험치’를 쌓을 수 있다. 질 좋은 교육을 받고, 질 좋은 음식을 먹고, 질 좋은 거주환경에서, 질 좋은 옷을 입고 자란다. 당연히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빠르게 높은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래서 현실 세계의 좋은 직업들을 좀 더 빠르고 쉽게 꿰찰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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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질

게임

게임회사의 다양한 수익모델 중에는 아이템 판매가 있다. 현실 세계의 재화(주로 돈)를 내면 게임 상 좋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아이템은 얻는 경험치를 몇 배 증가시켜 준다든지, 아니면 몬스터를 잡을 때 좀 더 효율적인 무기일 수 있다. 그래서 소위 ‘현질’을 하게 되면 그렇지 않은 유저들에 비해 더 편하게 게임을 즐기면서 더 빠르게 레벨업을 할 수 있다.

돈 사람

현실

돈이 많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만, 인생이 편해질 순 있다. 출퇴근을 사람들이 많은 지하철이나 버스로 하는 것보다는 자가용을 타는 것이 훨씬 편하지 않은가. 좀 더 맛있는 음식을 자주 먹을 수 있고, 더 편한 곳에서 잠들 수 있고 말이다. 그리고 위에 ‘버스 타다’에서 말했듯 다양한 현실 세계의 현질로 더 빠르게 좋은 직업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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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기꾼

게임

처음 MMORPG를 접했을 때, 그곳에 상주하던 다양한 사기꾼에게 당했다. 방식도 다양했다. 게임 시스템의 허점이나 버그를 이용해서 사기를 치거나, 아니면 소셜 엔지니어링(Social Engineering) 기법을 활용한 사기까지 말이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최근에 아이템 복제 버그가 발생했다(이건 사실).

그런데 갑자기 한 유저가 접근해오더니 자신이 그 방법을 안다고 아이템을 잠깐 빌려주면 여러 개로 만들어서 자기도 하나 갖고 나도 여러 개 가질 수 있다고 유혹한다. 누가봐도 달콤한 유혹이고, 손해 볼 게 없어 아이템을 건네주는 순간 바로 그 유저는 접속을 종료한다.

이 밖에도 정말 공을 들여 친해지고 신뢰를 쌓은 후 아이템을 가지고 튄다든지, 죽으면 아이템을 떨어뜨리는 시스템을 악용해 유저를 어려운 사냥터로 꾀어내어 죽이고 그 아이템을 들고 튀는 방식 등 정말 그 방법도 창의적이고 다양했다.

사람 사기꾼

현실

하지만 현실에서 사기는 게임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게임에서는 기껏 해봐야 얼마 되지 않는(물론 특정 게임의 특정 아이템은 수백에서 수천만 원에 달하기도 한다) 재화를 뺏기는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인생이 망할 정도의 사기도 빈번히 일어난다. 그래서 게임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건, 게임이 나빠서나 아니면 한국인들의 특성이 그래서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라면 이런 부류의 인간들은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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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친구(신뢰)

게임

우울한 일들만 게임 세계에서 벌어지는 건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한 MMORPG를 하다 우연히 친해진 유저가 있었다. 지금은 그 사람 아이디도, 당시 주고받았던 전화번호도, 이름도 모두 잊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두터운 신뢰를 쌓았다. 서로의 좋은 아이템을 돌려쓰는 건 기본이었고, 일정 기간 게임을 못하는 상황(가령 시험기간)에는 서로의 게임 아이디 비밀번호를 공유해서 대신 키워주기도 했다.

그러니깐 현실 세계로 치자면 서로 아무렇지 않게 큰돈을 빌려주거나 서로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그런 관계였다. 단 한 번도 만나본 적도 없고, 서로 알려준 이름이 본명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게임상에서 보이는 행동만으로 서로를 판단하고 우정을 쌓고 신뢰관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우정 남자

현실

마찬가지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인생을 살며 만나는 사람들은 가족을 제외하고는 전혀 몰랐던 사람들이지 않은가.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서로의 행동과 말을 보고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또,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가, 평생을 같이하기로 약속을 하고 결혼을 하기도 하고. 아니면 난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지만 나에게 많은 호의와 나눔을 베푸는 은사를 만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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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테크트리

게임

스타크래프트에서 유래된 ‘테크트리’라는 말은 어떤 식으로 내 미래를 설계해 나가냐를 뜻한다. 롤플레잉 게임에서는 특정 스킬들(마법이든 기술이든)을 특정 레벨이 되면 배울 수 있는데 보통은 여러 개 중에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 해당 게임을 처음 접하고 유저는 자신의 판단에 기초해 좋아 보이는 스킬을 선택했다가, 고렙이 되고 나니 해당 스킬은 도저히 쓸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초보 때는 유용하지만 강력한 몬스터를 잡기엔 쓸모가 없다든지, 아니면 다른 부분들(체력이나 공격력)을 보조해줘야 하지만 그러지 못해 다른 비슷한 레벨의 유저들에 비해 현저히 사냥 속도가 떨어지곤 한다. 이럴 때 게임 세계에서는, 캐릭터를 레벨 1부터 다시 키우곤 한다. 그래서 이럴 때 하는 말이 ‘테크트리를 잘못 탔다’이다.

계획 기획

현실

많은 사람이 테크트리를 잘못 타곤 한다. 적성에 맞지 않는 대학교 학과를 선택해 자퇴하고 다시 재수한다든지, 직장이 적성에 맞지 않아 이직한다든지, 연애를 잘못해 상처를 받고, 결혼을 잘못해 이혼하고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 현실에서는 테크트리를 잘못 탔다고 레벨 1부터 다시 키울 수가 없다. 그저 현재 상황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할 뿐. 그래서인가. 게임에서는 고렙으로 올라갈수록 테크트리를 잘못한 캐릭터, 소위 ‘망캐’가 별로 없다. 하지만 현실세계에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망캐’가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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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반복(노가다) 

게임

레벨업을 하기 위해서는 몬스터를 잡아 경험치를 얻어야 한다는 건 이미 설명했다. 하지만 레벨이 올라가면 갈수록 이 행위를 더 많이 반복해야 한다. 저렙 때는 그 수준에 맞는 몬스터 몇 마리만 잡으면 바로 다음 레벨을 달성할 수 있지만, 고렙이 되고 나면 다음 레벨로 가기 위해서는 수십, 수백, 어떨 땐 수만 마리의 몬스터를 잡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레벨이 올라가면 갈수록 다음 레벨을 달성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리고 점점 더 몬스터를 잡는 방식이 익숙해져 가고, 이 과정은 단순 반복이 되곤 한다. 그래서 게이머들은 이런 걸 ‘노가다’를 해야한다고 한다.

바디빌더 남자 사람

현실

학창시절을 떠올려 보자. 난 학교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고, 고등학교 때 한번은 평균 50점 정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 고3이 되고 나서 공부를 해볼까 해서 열심히 공부했고, 30점 정도를 올릴 수 있었다(그래서 평균 80점). 하지만 80점에서 90점으로, 그리고 90점에서 91점으로 올리는 건 50점에서 80점으로 올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예를 들어보자. 1만 원이면 파스타 한 접시를 먹을 수 있다고 해보자. 2만 원 파스타는 만 원짜리 파스타보다 확실히 맛있다. 그리고 5만 원짜리 파스타는 물론 더 맛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이 파스타가 만 원짜리 파스타보다 5배나 맛있거나 그렇진 않다. 기껏 해봐야 조금 더 맛있는 정도이다. 하지만 그 98점에서 99점으로, 그리고 99점에서 99.5점으로 올리는 일은 분명히 쉽지가 않고, 그렇기에 우리는 그에 대해 대가를 지급한다.

그리고 이렇게 어느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그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지난한 반복이 계속된다. 그리고 능력 향상은 계단식 그래프를 그리면서 이뤄져서, 노력을 아무리 해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다가 어느 순간 내 향상된 실력을 깨닫게 된다.

그래프 상승 막대그래프 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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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거울인 게임

몇몇 게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이들은 게임을 마약으로 취급하거나 우리 삶을 좀먹는 부정적인 무언가로 바라본다. 하지만 게임은 그저 우리 현실을 그대로 투영하는 거울과 같다. 현실 세계에서 새치기를 일삼는 사람은 게임 세계에서도 다른 유저가 잡은 몬스터가 떨어뜨리는 아이템을 훔쳐 먹고, 현실에서 남을 괴롭히는 이들은 게임에서도 저렙 유저들을 괴롭히는 거로 시간을 보낸다.

어느 사회나 나쁜 사람들은 존재하지만, 반면 약자를 위하고 상호 배려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게임에서도 온갖 인간군상이 다 존재한다. 그러니 게임을 다른 엄청난 세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그저 인간이 서로 어울리며 지내는 여러 사회 공간 중 하나로 바라보는 게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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