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저조한 성적을 보인 것을 끝으로 공화당 경선에서 하차한 뉴저지 주지사 크리스 크리스티(Chris Christie, 1962년~현재, 캐리커처)가 지난주 금요일(2월 26일) 트럼프에 대한 공개지지(endorsement)를 밝혔다.
공개지지 선언은 나오는 시점이 중요하다. 단순히 결정했다고 발표하는 게 아니다. 효과가 극대화하는 시점, 즉 경쟁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순간 혹은 지지받는 후보의 상승세를 굳힐 수 있는 순간에 발표하도록 부탁한다. 루비오가 가장 아플 때고, 슈퍼 화요일을 앞둔 주말이 가장 화제가 될 효과적인 시점이다.
크리스티는 워싱턴 D.C.의 기성 정치인들을 비판하며 이번 선거에서 반(反)기축세력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오바마에 대해 좋게 평가했던 과거, 뉴저지 내에서의 정치적인 스캔들은 물론, 궁극적으로 기축세력과 특별히 구분되지 않는 이미지의 한계 등으로 의미 있는 지지율을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
크리스티가 이번 공화당 경선에서 가장 강한 이미지를 남긴 것은 물론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직전에 있었던 토론회였다. 마르코 루비오를 강하게 밀어붙여 당황한 루비오가 같을 말을 계속 반복하게 만든 것. 결국, “고장 난 로봇”이라는 별명을 선사함으로써 루비오의 상승세를 꺾는 데 기여한 것이 말하자면 크리스티가 이번 대선에서 한 가장 큰 기여였다.
루비오와 트럼프의 근접전
루비오는 이제까지 토론회에서 가급적 트럼프와의 싸움을 피해왔다. 루비오로서는 트럼프와 정면대결을 한 후보들 중에서 덕을 본 사람이 없다는 교훈이 있었고, 트럼프로서는 순위 낮은 후보를 굳이 공격해서 언론의 관심이 쏠리게 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이 있었다. 그래서 진행자가 둘 사이에 ‘스파크’를 일으키려 할 때마다 루비오는 “나는 트럼프와 싸우려고 나온 것이 아니라 힐러리와 싸우려고 출마한 것”이라는 정치적인 표현으로 피해갔다.
하지만 이제 3자 레이스가 된 공화당 경선에서 루비오는 더는 그런 아웃복싱을 할 수 없다. 그래서 본격적인 트럼프 공격을 시작했는데, 그게 어제(2월 26일)의 공화당 토론회였다. 물론 청중의 야유에도 끄떡하지 않고 오히려 청중을 모욕하는 트럼프가 루비오의 공격에 아랑곳할 리 없었고, 루비오는 그날 밤 토론회에서 그동안 트럼프의 입 앞에서 쓰러진 후보들(랜드 폴, 젭 부시)이 느꼈던 기분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체험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루비오가 가진 이미지다.
다른 후보들과 달리 정책도 나쁘지 않고, 외교 지식도 풍부하며 더욱이 성실한 루비오가 가진 모범생의 이미지. 거기에 (크루즈와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음에도) 유난히 어려 보이는 ‘새파란’ 이미지가 루비오에게 있다. 그런 루비오를 공격하는 크리스티와 트럼프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다면 중학교에서 싸움질하고 다니는 깡패(bully)가 얌전한 모범생을 막무가내로 놀릴 때를 생각해보면 된다.
깡패는 반 아이들이 빙 둘러서 웃으며 구경하며 응원하는 상황에서 ‘범생이’를 놀리면 수업시간에 펄펄 날면서 발표를 잘하던 학생도 할 말을 잃고 놀림감으로 전락하지 않는가. 물론 트럼프와 크리스티가 가진 체구, 말버릇, 표정, 뉴욕(뉴저지) 억양 같은 깡패 이미지도 큰 몫을 한다.
게다가 공화당 후보들 중에서 미디어 사용에 가장 능숙한(savvy) 두 후보가 크리스티와 트럼프 아닌가. 미디어에 능숙한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이 어떻게 보이느냐에만 민감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가진 이미지의 장단점 파악도 빠르다. 뉴햄프셔 프라이머리 직전에 루비오를 손가락질하면서 놀려댄 크리스티는 말 잘하는 루비오가 어떤 순간에 말문이 막히면서 땀을 뻘뻘 흘리는지 완벽하게 파악했고, 루비오의 약점을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그런 크리스티에게 맞고 쓰러졌던 루비오가 사우스캐롤라이나와 네바다에서 기운을 차리고 다시 링에 뛰어들어서 덤벼든 사람이 트럼프였다.
크리스티-트럼프 태그팀
‘왜 하필 트럼프에게 덤볐느냐’고 할 수는 없다. 토론회의 공격-방어 구도는 전적으로 그 후보의 순위와 다음 경선지의 역학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잡아 죽일 듯 물고 뜯고 있는 트럼프와 크루즈지만, 바로 얼마 전만 해도 서로 러닝메이트를 하자고 할 만큼 사이도 좋고, 토론회에서 공격도 삼갔던 것도 그런 이유다. 젭 부시가 트럼프에게 매번 박살이 나면서 불쌍할 만큼 처절하게 덤벼들었던 것도 부시의 위치는 곧 죽어도 트럼프를 공격해야 하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루비오는 이제 죽으나 사나 트럼프에게 덤벼야 하는 위치에 왔다.
이번 주 공화당 경선구도는 프로레슬링의 흔한 레퍼토리를 보는 느낌이다. 한 선수가 링 위에서 일방적으로 맞고 있는데, 때리던 선수가 링 밖에 있던 동료 선수와 태그를 하고, 그렇게 교체되어 들어온 선수가 계속 때리고, 또 태그를 해서 다시 교체해서 들어온 선수가 또 때리는 그런 ‘불쌍한 레슬러’ 레퍼토리.
CNN이 주최한 어제 토론회가 끝난 후에도 트럼프의 루비오 놀리기는 계속되었다. 아니, 어쩌면 토론회보다 토론회가 끝난 후의 트럼프 인터뷰가 더 큰 파괴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트럼프는 그 특유의 입담으로 끊임없이 반복했다.
“(내가 공격을 하니까) 루비오가 겁먹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떨더라.”
“러시아, 중국 같은 나라들과 담판을 해야 할 사람이 그렇게 담이 작아서 쓰겠느냐”며 시청자에게 ‘루비오 = 어린 범생이(애송이)’라는 이미지를 각인했고, 효과가 상당해 보였던 게 사실이다. 물론 뉴햄프셔 토론회에서 크리스티가 루비오에게 비슷한 색칠을 해서 산산조각내지 않았더라면, 그런 트럼프의 말이 그렇게 잘 먹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의 태그팀(tag team)이 루비오와 공화당 기축세력을 효과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태그팀의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 크리스티가 트럼프를 공개 지지한 것이다.
하느님 맙소사! (Good Lord Almighty!)
뉴저지 주지사 크리스 크리스티가 트럼프에 대한 지지를 밝혔다는 소식을 들은 (조지 W. 부시 정권 시절 국토안보부 장관을 지낸 ) 톰 리지가 한 말이다. 톰 리지만이 아니다. 공화당 지도부는 지금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졌다. 아니, 이미 지난 몇 달 동안 ‘이러다가는 당이 붕괴한다’는 공황에 빠져있던 공화당이 드디어 붕괴의 시작을 알리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공화당의 마지막 남은 기대는 루비오에게서 희망의 불씨를 살려 트럼프를 저지해보는 것이었다. 루비오의 전략처럼 트럼프는 ‘공화당원들로 하여금 자신이 진정한 비즈니스맨, 진정한 보수라고 믿게 만들어서 표를 빼앗아가는 사기꾼(con man)’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기축세력의 분노를 접한 지도부는 행동이 느렸고, 기축세력은 루비오에 대한 지지를 밝히기를 주저하면서 루비오는 힘에 부쳤고, 그러는 사이에 기회를 본 크리스티가 루비오에게 큰 상처를 내고 내려갔다.
뉴햄프셔 토론회에서 둘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공화당 지도부는 서둘러 불을 껐어야 했다. 어떻게든 크리스티를 말려서 공화당의 새싹 루비오를 보호하고, 크리스티-트럼프의 핵융합이 일어나기 전에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공화당에는 선장이 없다. 선장 노릇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힘이 없거나 여기저기 눈치를 보기에 바쁘다.
의원들을 비롯한 선출직들은 자신의 지역구에서 점점 자라고 있는 트럼프 지지세력에게 미움을 살까 두려워 몸을 사리고, 다른 후보에 기부금을 낸 사람들은 트럼프가 집권하게 되면 받을 불이익을 두려워하고 있고, 다들 이러저러한 대책을 논의하지만, 회의실을 나오면 자신의 득실을 계산하기에 바빠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민주당 우세인 미국 동북부에서 가장 무게 있는(!) 공화당 기축세력인 크리스티가 중진으로서는 처음으로 반(反)트럼프의 대오를 깨고 트럼프 등에 올라탄 것이다. 붕괴의 첫 신호다.
트럼프의 물밑작업
“나는 공개지지(endorsement) 따위에는 관심 없다!”
이렇게 큰소리치는 트럼프지만, 사실은 뒤에서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개 지지를 얻으러 다녔다. 사라 페일린의 지지도 그렇게 얻었다. 그리고 루비오가 트럼프에 대해 직접 포문을 열 것으로 예상했던 공화당 토론회 당일, 트럼프 부부는 크리스티 주지사 내외를 자신의 ‘트럼프 타워’에 초대해서 부부동반 식사를 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트럼프는 지난 몇 주 동안 크리스티에게 전화와 미팅을 통해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지지 선언 약속은 이미 그 자리에서 얻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발표는 미뤘다. 그리고 예상대로 목요일 토론회에서 루비오가 트럼프를 정면으로 공격했고, 트럼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루비오를 놀려댔다. 루비오를 비롯한 나머지 후보들의 트럼프 공략은 실패했고, 다음날인 금요일 트럼프는 크리스티와 함께 단상에 올라 폭탄선언을 했고, 공화당은 건물 바닥이 내려앉고 있음을 깨달았다.
뉴욕타임스는 공화당이 이번 사태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반세기 전 민주당이 미국 남부를 통째로 잃었던 것에 버금가는 대규모 유권자 이탈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막후 정치의 실종
지금은 미국 남부는 당연히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미국에는 ‘남부 민주당원(Southern Democrats)’이라는 유명한 부류가 존재했다. 남부의 정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진보적인(liberal)’ 이 부류는 동부 도시를 중심으로 한 진보세력과 중서부·남부 중심의 보수세력 중간에서 미국 정치가 극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준 중요한 힘이었다.
[티핑 포인트]로 유명한 말콤 글래드웰은 2009년 8월 뉴요커에 기고한 글에서 그렇게 남부에 존재하던 진보적인 사람의 대명사로 하퍼 리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 등장하는 백인 주인공 애티커스 핀치를 들었다. 그래드웰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앨라배마에는 공화당원들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footnote]
“There were no Republicans to speak of in the Alabama of that era, only Democrats. Politics was not ideological. It was personal.”
– Malcolm Gladwell, ‘The Courthouse Ring’, The New Yorker(2009. 8. 10)
[/footnote]
물론 글래드웰이 기사에서 사용한 “진보적인(liberal)”이라는 의미를 오늘날 진보세력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지만 KKK가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고 흑인을 아무렇지 않게 폭행(lynching)하던 시대에 흑인에 대한 차별이 남아 있었어도 온정적(paternalistic) 태도, 점진적 개혁 태도는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었다.
남부 민주당원들과 함께 사라져 가기 시작한 것이 있으니 바로 ‘막후 정치’다. 한국에서는 요정에서 술과 식사를 하면서, 미국에서는 시가(cigar) 연기가 가득한 뒷방에서 양당의 정치인들이 위스키를 마시며 암암리에 서로 조건을 주고받으면서 협상하는 장면이 연상되는 이런 막후 정치는 흔히 워싱턴 인사이더들의 담합이라고 규탄을 받았고, CNN을 비롯해 각종 미디어의 발전으로 24시간 정치인 감시가 일상화되면서 사실상 사라지다시피 했다.
하지만 항생제를 쓰면 유익한 균까지 죽인다는 사실을 인류가 뒤늦게야 발견한 것처럼, 미국은 막후 정치를 종식하고 난 후에야 그런 막후 정치가 가지고 있었던 순기능을 깨닫기 시작했다.[footnote]유타 주지사를 역임한 마이클 레이빗이 이번 크리스티-트럼프 연합이라는 대형 사고를 두고 “There is no mechanism. There is no smoke-filled room.”이라고 개탄한 것이 바로 공화당에서 막후 정치의 순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는 바로 그 말이다.[/footnote] 하지만 공화당으로서는 그 깨달음이 너무 늦게 왔다. 트럼프가 크리스티 부부를 초대해서 구워삶는 동안 공화당 지도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