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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여름, 노르웨이에서 테러가 일어나 77명의 무고한 생명이 숨졌을 때, 모두 노르웨이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지 불안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범인이 잡히기 전이어서 앞으로 어쩌면 시민의 자유가 제한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고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는 분위기도 있었다. 유색인 이민자는 괜한 주눅에 밖에 나가기도 조심스러웠다. 사회 전체가 충격에 휩싸여 누구라도 툭 건드리면 울음이 터질듯한 분위기였다.

2011년 7월 오슬로 폭발 테러 30분 뒤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https://ko.wikipedia.org/wiki/2011%EB%85%84_%EB%85%B8%EB%A5%B4%EC%9B%A8%EC%9D%B4_%ED%85%8C%EB%9F%AC#/media/File:Oslo_view_of_city.jpg
2011년 7월  22일 오슬로, 테러 30분 후의 모습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옌스 스톨텐베르사고가 있고 그 다음 날, 옌스 스톨텐베르 노르웨이 총리(사진)가 유가족을 앞에 두고 연설했을 때, 거리에 장미를 들고 나와 있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손을 맞잡았다.

“우리는 여전히 충격에 빠져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테러리즘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류애입니다. 안일함은 절대 아닙니다. 현장에 있던 한 소녀가 누구보다 잘 말해주었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그만큼의 증오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우리가 함께함으로 얼마나 큰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상상해보세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저, 그리고 노르웨이 전체가 여러분의 상실을 진심으로 아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위로가 될 수도,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돌아오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어두운 곳을 지날 때 우리 모두 격려와 위로가 필요합니다. 지금이 그때 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 당신을 위해 있습니다.”

-옌스 스톨텐베르, 2011년 7월 23일 오슬로 성당에서

복수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길 

스톨텐베르 수상은 연설을 통해 노르웨이는 미국이 9·11 테러 이후 감행했던 복수와 처벌의 길을 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암시했다. 수상의 연설 이후 반대파인 우파까지도 이례적으로 전적으로 공감하며 지지한다고 밝혔다.

북유럽 사람들은 ‘노르웨이가 9·11 테러 이후의 미국처럼 되길 원치 않는다’며 ‘서로를 의심과 불안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다’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오히려 ‘브레이크는 우리 안에 있다.’며 내부에서 자성하는 소리가 커졌다.

Endre Krossbakken, "오슬로 2011년 7월 24일", CC BY https://flic.kr/p/a6EaJv
Endre Krossbakken, “오슬로 2011년 7월 24일”, CC BY
Rødt nytt, utoya_250711, CC BY SA http://www.flickr.com/photos/rodtnytt/5975429977/
Rødt nytt, “우토야(utoya) 2011년 7월 25일”, CC BY SA

노르웨이 정부는 우토야의 비극이 일어난 지 20일 후인 2011년 8월 12일 위원회를 꾸렸다. 명망 있는 여성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전 경찰청장, 전 코펜하겐시 경찰총장(덴마크), 연구자, 전 노르웨이 철도 대표, 장군(전임 국방 정보국장), 교수, 전 노르웨이 적십자 부사장, 의료협회장, 핀란드 경감 등이 포함됐다.

안데르스 브레이빅 테러의 진행을 밝히고, 사건이 벌어졌을 때의 대처방안, 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응을 폭넓게 평가하고 이후에 있을 공격을 방지·대응하기 위한 방법을 구상하라는 미션을 주었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붙여 ‘7월 22일 위원회’라 불렀다. 조사 기간은 1년이었다. 북유럽은 무언가를 구상할 때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모아 위원회를 꾸리는 것이 필수다. “위원회부터 꾸리지?”하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다.

폭력은 막되 자유는 침해하지 않는 

위원회는 경찰이 좀 더 빠르게 대응했더라면 사건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 결론 내렸다. 7월 22일 위원회의 보고서를 통해 몇 가지를 제안했다. 군과 경찰과의 협조 강화, 경찰력 보강, 정부 고위층이 참석하는 위기관리 회의, 위기 시 법무부의 지휘체계와 매뉴얼 등이 포함되었다.

스톨텐베르그 총리는 경찰의 대응이 늦어 사건이 커지는 것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사과하며 안전 증진과 테러방지에 대한 자구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정보보호국, 인권센터, 학계, 법조계에서 반테러리즘법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지속해서 표명했다.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폭력과 싸우되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려운 원칙을 두고 여러 그룹이 줄다리기를 했다.

L.C. Nøttaasen, "Candles for Norway", CC BY https://flic.kr/p/a6dgnr
L.C. Nøttaasen, “Candles for Norway”, CC BY

노르웨이에는 이미 테러리즘에 관한 법률이 있었다. 2001년 미국의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린 9·11 테러 이후 테러 자금 조달의 억제를 위한 국제조약을 만들어졌다. 노르웨이의 테러리즘에 관한 법률은 이를 국내에서 인준한 것이었다. 기존의 형법에 테러리즘의 정의와 형량을 추가했다.

우토야의 비극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난 2013년 여름 노르웨이는 기존 형법에 한 구절을 추가했다.

형법 147조d; 누구든지 테러리스트 조직을 형성하거나 참여, 회원을 모집하거나 경제적 물질적 지원을 한 경우도 테러리즘으로 간주해 처벌한다.

노르웨이에서는 테러리즘을 다루고 있는 형법 147조와 148조를 반(反)테러리즘법(Anti-terrorism law)이라고 부른다.

테러’방지법’이 아니라 ‘반테러법’인 이유 

테러리즘방지법과 반테러리즘법은 뉘앙스가 다르다. 방지법은 테러 가능성이 보이는 경우 발본색원 하겠다는 것인데, 그럴 경우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 노르웨이의 반테러리즘법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의 집행에 관한 내용이 아닌 테러리즘에 어떤 활동이 포함되는지에 대한 범위 규정을 담고 있다.

당시 사람들의 관심사는 브레이빅이 저지른 것과 같은 반인류적 범죄에 반테러리즘법을 적용해 처벌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법이 도입되고 난 후에도 적용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처음으로 새로 추가된 반테러법에 근거해 법정구속 된 사람은 2014년 2월에 나왔다. 시리아의 극단주의자 그룹에서 활동한 죄목이었다.

nrkbeta, "Oslo after the terror", CC BY SA https://flic.kr/p/a7Vi9L
nrkbeta, “Oslo after the terror”, CC BY SA

2016년 2월 23일, 내가 곤히 잠들었던 지난밤, 우리나라 국회 안팎에서 필리버스팅으로 분주했던 모양이다. 테러방지법이 내 귀엔 정부비판방지용 반민주주의법으로 들리는 이유는 뭘까. 브라운 박사도 울고 갈 만큼 가뿐하게 시대를 과거로 돌리는 정부. 창조경제는 모르겠고 온고지신 창조정치 중인 대통령.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난 남의 나라 수장의 연설을 다시 찾아 들으며 위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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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1. 세월호 특조위도 거의 유명무실해졌고… 제대로 된 기초 없이 성급하게 일만 만들어내온 한국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민주화를 이뤄내겠다면서 시민이 참여할 통로는 보장하지도 않은 채 일부 정치가들에게 모든 걸 떠맡기는 형태로 만들었고 이걸 기득권층이 꽉 잡고 있으니 솔직히 새누리는 엉터리법을 들고 나와서 우겨도 딱히 거칠 게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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