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노래와 영화와 드라마는 우리 시대의 주술사입니다. 마치 무당이 영혼을 부르듯 그들은 추억을 불러옵니다. 이따금 –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 그 추억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편집자)
이 글은 2010년 3월에 쓴 글을 전체적으로 퇴고한 글입니다. [/box]
만약 예술의 종국에는 선이 악에 대해 승리한다고 약속한다면, 그러한 약속은 역사적 진실에 의해 반박될 것이다. 현실에 있어 승리하는 것은 악이고, 그곳에는 단지 어떤 사람이 잠시 동안만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선의 외로운 섬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이것을 감지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 쉽게 만든 약속을 거부한다. 그들은 헤피엔드를 거절한다. (52)
비극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고, 비극의 신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있다. 기쁨은 슬픔보다는 빠르게 사라진다. (60)
– H. 마르쿠제, [미학의 차원](‘The Aesthetic Dimension’, Beacon Press, Boston: 1978), 청하, 서울: 1983. 중에서
‘김병욱 미친 거 아니야?’
[지붕 뚫고 하이킥] (이하 ‘지붕킥’)은 슬픔으로 마무리된다. 여느 멜러드라마의 결론이라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는 이 엔딩은, 그동안 지붕킥을 꾸준히 시청했을 시청자에게는, 그리고 김병욱 PD의 전력을 고려하더라도, 파격적인 결론이다(지붕킥 마지막회가 끝났을 때 상당수 시청자는 ‘김병욱 미쳤네’를 연발했다).
지붕킥은 수목 멜러드라마가 아니니까. 이것은 일일시트콤이다. 매일 저녁을 먹고 나서, 혹은 늦은 저녁을 먹으며 그저 하루의 피곤을 웃음과 함께 날려보내는, 가족들과 함께 보는 지상파 시추에이션 코미디다. 지붕킥은 그런 시청자들의 관습적 기대를, 시트콤이 갖는 현실의 수면제로서의 정치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배반한다. 이 결론은 확실히 불편하다.
지붕킥은 왜 우리(의 기대)를 배신했을까.
이 글은 지붕킥이 작정한 배신, 그 적극적인 배반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글이다.
비참한 현실
지붕킥은 세경과 지훈의 마지막 대화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좀 더 정확히는 세경의 독백에 가까운 대화다. 세경은 그 고백을 통해 대한민국 현존 질서에 대한 깊은 좌절과 슬픔을 토로한다. 이것은 그동안 김병욱 PD가 보여준 변칙적인 내러티브, 가령 등장인물들의 예기치 못한 죽음,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민영의 죽음 따위를 떠올려보더라도 이질적인 풍경이다.
세경의 마지막 고백은 진보적 미디어의 사회 비평 칼럼에서나 읽을 수 있을 만한 언어다. 그것이 낭만적이고, 슬픈 연애담의 형식으로 포장되고 있더라도, 이것은 시트콤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다. 세경의 고백을 통해 지붕킥의 마지막을 다시 되돌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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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공항으로 향하는 지훈의 차 안. 밖에는 비가 거세게 내린다.
세경: 시간 가기 전에 아저씨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뤄져서 너무 좋아요.
지훈: 이민 갈 이유, 안 갈 이유가 반반이었다 그랬지? 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뭐야? 아빠랑 셋이 사는 거?
세경: 네. 그리고 신애한테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지훈: (의외라는 듯, 세경에게 반문하며) 신애?
세경: 언젠가부터 신애가 자꾸 저처럼 쪼그라드는 것 같아서요. 식탐 많던 애가 먹을 것 눈치를 보고, 아파도 병원 갈 돈이 없을까 봐 걱정하고, 그게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가난해도 신애가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S#. 공항에서 세경을 기다리는 신애와 아빠의 모습이 공항 로비 창가로 보인다. 다시 세경과 지훈의 차 안.
지훈: 안 가고 싶었던 이유는?
세경: 검정고시 꼭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대학도 가고. 아저씨 말대로 신분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올라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언젠가 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그 사다리를 죽기 살기로 올라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밑에 있겠구나. 결국, 못 올라간 사람의 변명이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가기 싫었던 이유는, 아저씨였어요. 아저씨를 좋아했거든요. 너무 많이. 처음이었어요. 그런 감정.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설레고, 밥을 해도, 빨래를 해도, 걸레질을 해도. 그러다 문득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고, 부끄럽고, 비참했어요.
지훈: 미안하다. 내가 한 말들 때문에. 그게 상처 주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세경: 아니에요. 다 지난 일이고. 저는 괜찮아요. (…) 그동안 제가 좀 컸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의 끝이 꼭 그 사람과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는 거, 이제는 깨달았고. 그래도, 떠나기로 하고 좀, 힘이 들긴 들었어요. 아저씨랑 막상 헤어지면, 보고 싶어서 못 견딜 것 같아서.
그래도 마지막에 이런 순간이 오네요. 아저씨에게 그동안 마음에 담아둔 말들, 꼭 한번 마음껏 하고 싶었는데. 이루어져서 행복해요. 앞으로 어떤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늘 지금 이 순간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애써 웃음을 짓는다. 차 앞창을 바라보며) 다 와 가나요?
지훈: 어.
세경: 아쉽네요.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지훈: 뭐?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다.)
세경: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 (지훈이 세경을 바라보며, 흑백 톤으로 화면이 멈춘다.)
– [지붕 뚫고 하이킥] 126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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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욱 시트콤
김병욱은 그동안 대한민국 시트콤의 역사라고 할만한 작품들을 연출해왔다. [순풍산부인과] (1998),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2000), [똑바로 살아라] (2002), [귀엽거나 미치거나] (2005), [거침없이 하이킥] (2006)이 그것들이다.
지붕킥의 내러티브는 ‘순풍 산부인과’나 ‘똑바로 살아라’ 혹은 ‘거침없이 하이킥’의 공식을 그대로 확대 변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병욱 PD가 그동안 연출했던 시트콤에는 몇 가지 공식이 있었다.
1. 계급적 욕망
우선 이야기 중심축에는 중산층의 계급적 욕망을 대변하는 선망적 표지가 등장한다.
- 산부인과 의사인 오지명(순풍산부인과)
- 한의사 이순재(거침없이 하이킥)
- 성공한 중견 연기자 노주현(똑바로 살아라)
이 공식은 지붕킥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데, 지붕킥에서 에피소드의 중심 공간은 음식가공업체 사장인 이순재의 가정이다. 부촌의 상징인 성북동 럭셔리 하우스는 김자옥의 한옥과 함께 지붕킥의 공간적인 무대가 된다. 이 계급적 욕망의 표지들은 김병욱 시트콤에 내재된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표면적으로 순화한다.
무엇보다 이런 욕망의 표지들은 시청자 스스로 자신을 전복적인 주체가 아니라 등장인물에게 욕망을 투사하는 수동적 객체로 인식하게 한다. 그런 장치로 인해 시청자는 비로소 관습적인 ‘시트콤 시청자’가 되며, 자신의 현실을 잠시나마 잊도록 마취제를 복용할 수 있는 편안함을 느낀다. 아무리 능동적인 주체도 TV 시트콤 앞에서 사회 평론하는 지식인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2. 허위의식의 폭로
더불어 김병욱 시트콤에선 중산층 가정의 허위의식들을 내부 구성원들에 의해 드러내는 구도를 취하곤 했다. 가부장적 권력자들(이순재, 노주현)은 형식적인 권위만을 인정받고, 실은 가정 구성원에게 철저히 따돌림당하거나, 무시 받는 가짜 권위의 상징으로 표출되곤 했다.
그들은 실력 없이 너무 많은 것들을 가진 자들(‘하이킥’의 이순재와 ‘똑바로 살아라’의 노주현)이거나, 내면의 독백으로 자신의 부도덕을 그저 감상적으로 치유하곤 하는 탐욕스런 자린고비(‘지붕킥’의 이순재)였다. 물론 그들은 드라마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인간적으로 용서받고, 충분히 이해할만한 인물들로 그려지긴 했지만 본질에서 ‘가짜’들이다.
3. 가짜 권위와 전복적 짝패
이들 가짜 권위의 짝패로는 흥미롭게도 당찬 여성형이 등장하곤 했는데. 그들은 마치 구시대의 권위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거나, 그 자리를 대신할 존재처럼 묘사되었다. ‘하이킥’에서는 박해미가 그랬고, ‘지붕킥’에서 오현경이 그렇다.
다만 하이킥의 박해미가 성취 지향적 여성형의 밝은 모습들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구현했다면, 2009년 지붕킥의 오현경은 MB 시대의 자장권 아래서 세속화된 주부의 면모를 온몸으로 드러낸다. 지붕킥의 거의 모든 인물이 어느 정도는 자신들의 감상적 에피소드들을 통해 구원받는 데 비해, 상대적으로 오현경(극중 ‘이현경’)은 끝까지 현실 속의 비정한 리얼리즘을 대변한다.
그녀는 아이에게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투사하고(‘해리 예능 과외’ 에피소드), 학벌주의를 절대적으로 숭상하며(‘서운대’ 에피소드), 남편의 출세를 위해서는 자존심을 팽개치고, 뇌물을 서슴지 않는다(박경림이 등장하는 ‘내조’ 에피소드). 그런 그녀는 극 중에서 한 번도 반성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정보석과 함께 밝은 미래를 꿈꾸며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MB 시대의 판타지다. 낭만적인 결혼 스토리를 통해 그녀의 감상적인 소녀적 취향이 작은 알리바이처럼 제공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세속적 성공의 판타지일 뿐이다.
4. 80년대적 이야기
김병욱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해리를 미워하는 시청자가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돈도 없으면서 신애에게 짜증을 내는 사람이 많다는 걸 발견했다. (중략) [지붕킥]은 1980년대적인 이야기다. 80년대는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폭력의 시대였다. 우리는 많이 진보한 줄 알았는데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게 아닌가 싶다. 경제적인 생존 위기를 피부로 느끼는 사람도 많고 문화적으로도 그렇다.”
– 씨네21, [김병욱] “[지붕킥]은 1980년대적인 이야기”
“계급 갈등에 관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회인이니까 가질 수 있는 생각들을 풀어놓는다. [순풍산부인과] 때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신애의 ‘장래희망’ 에피소드에 들어있다. 우리 사회는 열린 사회라지만 열린 사회가 아니다. 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신애가 세경이처럼 될 가능성이 더 크지 않나. 가진 자(이순재)가 없는 자(세경)에게 절약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도 우리 사회 지도층의 이야기일 수 있다. 내가 희망적이지 않은 세계관을 가져서 그런지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게 [똑바로 살아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보다 더 좋다.”
사회 비판
지붕킥은 대한민국 드라마의 계보 속에서 실종되고, 단절된 사회비판 멜러드라마의 전통을 다시 건져 올린다. 주체적인 공장 노동자(음정희)가 회사 홍보팀과 옥씬각씬하는, 지금으로선 정말 상상하기도 어려운 컨셉의 드라마 [도시인] (이윤택 각본, 최수종, 배종옥, 음정희 주연). 황인뢰(연출)와 주찬옥(각본) 콤비에 의해 시도되었던 여성 중심의 사회비판적 멜러드라마들.
그리고 무엇보다 김운경([서울의 달], [서울 뚝배기], [형], [파랑새는 있다] 등의 각본)이 줄기차게 시도했던, 소외된 도시 빈민들의 생생한 삶과 사랑의 이야기들은 소위 막장 드라마의 득세와 판타지 멜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가식적인 드라마의 팽창과 함께 주변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막장 복수극과 신데렐라 판타지, 그리고 ‘꽃남’ 류의 노골적인 무뇌아 드라마들이 채워나갔다.
지붕킥의 엔딩은 그저 이뤄질 수 없는 연인의 관습적인 슬픔이 아니다. 지붕킥의 결론은 중층적이다. 그것은 시트콤이 갖는 현재성,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적인 슬픔과 절망의 파편들을 불러온다. 그것은 많은 매체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88만 원 세대의 좌절만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트콤이 갖는 현실의 마취제 역할을 하는 판타지에 대한 자기 고백이다. 그래서 지붕킥은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한다. 예술은 당대의 모순을 직시한다. 그리고 희망을 위해서라도, 그 시대의 좌절과 슬픔, 그 야만을 고발한다.
김병욱 시트콤에는 물론 많은 한계와 약점이 있다. 지붕킥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붕킥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2010년 대한민국에서 지상파 시트콤을 소비한다는 행위의 정체에 대해 질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신이 지금 소비하는 이 시트콤은 계급적인 자기기만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것이 기만이었다는 걸, “부끄럽고, 비참한” 현실이었다는 걸, 세경이를 통해 담담하게 토로한다.
세경의 고백은 비정하리만큼 냉정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자기 고백이다. 지붕킥은 시추에이션 코미디 장르에 대한 시청자의 익숙하고, 관습적인 기대를 산산조각낸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지붕킥이 배반한 건 시청자의 자기기만적 기대일뿐이다. 지붕킥은 현실을 기만하는 관습적 시트콤의 결론, 그 판타지로서의 해피엔딩을 의식적으로 거부한다.
이 ‘거부’를 통해 지붕킥은 그저 그런 인기 시트콤으로 기억되는 길을 버리고, 자신의 장르적 관습을 파괴하며, 마치 혁명가라도 된 듯, 아니 반혁명으로 패배한 시민군의 죽음에 조사(弔辭)를 낭송하는 시인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파괴적인 엔딩으로 향한다. 이 엔딩으로 지붕킥은 시청자를 향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난 당신을 배반한 게 아니야.
당신 스스로 이 비참한 현실을 속이고 있었을 뿐이잖아.’
해리를 위하여
이제 드라마가 재현한 멜러나 코믹한 판타지가 아니라, 그 재현의 질료인 잔인한 현실로 다시 돌아오면, 남는 건 정음과 준혁이 아니라, 오히려 해리다.
해리는 성북동의 텅 빈 고급 주택 속에 갇힌다. 해리를 구원할 누구도 남아 있지 않다. 오현경은 해리를 탐욕스런 MB 시대의 아이로 키울 것이 뻔하고, 그렇게 서울대로 보내지는 것만이 일생일대의 목적으로 해리에게는 남겨질 것이다. 그렇게 해리에게는, 이 시대의 야만이 화려한 교양으로, 성공 지표로 치장된 채 숨 막히는 위선만이 철저하게 강요될 것이다.
유일한 친구 신애는 타히티로 떠났고, 어리숙한 아버지는 부자가 되기만을 꿈꾸고 있으며, 세속의 질서에 누구보다 충실한 어머니 현경은 해리에게 더는 세경 자매가 주었던 교훈을 되새겨 주지 않을 것이다. 새 할머니 김자옥은 권위적 훈육으로 해리를 통제할 것이며(‘훈련병’ 에피소드), 할아버지 이순재는 처음부터 해리에겐 관심도 없다. 해리는 빵꾸똥꾸들과의 추억들을 잊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성북동의 고급 주택, 대한민국의 세속적 욕망을 상징하는 공간 속에 해리가 갇힌다.
그리고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 텅 빈 거실 한 가운데서 울부짖는다.
“잘 가, 이 빵꾸똥꾸야~”
이제 해리는 이 무시무시한 시트콤의 영원한 고아로 남겨진다.
그건 정말 슬픈 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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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추.
세경이 멈춘 시간, 해리가 갇혀 있는 공간 속에서 우리의 희망도 봉인된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것도 바라선 안 된다. 어떤 희망도 부질없다. ‘해리를 위하여’ 우리가 지금 당장 무엇이든 하지 않는다면.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중,고등학교때 읽었던 ‘가난’이 더 와닿는게 나이를 먹었기 때문인지,
여전히 시대가 머물러(혹은 회귀)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