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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서울비 님이 학교에서 느낀 하루하루의 깨달음, 학생들과 함께 배워가는 그 시간과 풍경을 ‘학교 이야기’에 담습니다. (편집자)[/box]

https://youtu.be/cCW7Ng1EZmI

모든 것이 귀찮아진 어느 오후
티켓을 산다 0시발 태양로케트
멀어지는 지구의 모습 보며
다가오는 태양의 불꽃 보며
모든 것을 생각한다
아~ 아~ 아~ 아~

중2병 향기가 듬뿍 풍겨오는 이 노래를 다들 정신없이 박수를 치며 부릅니다. 정확히 10분 전에 “MBC 전 앵커 최일구 언론인을 소개합니다. 박수 부탁드립니다!”라고 사회자 마이크에 대고 말했는데, 저를 포함해서 다들 지금 왜들 이러는 걸까요? 갑자기 모두 70년대 학교 다닌 동기동창이지 싶습니다.

그는 자신을 진로 탐색 꿀팁을 주러 온 사람이 아니라 개드립치러 온 사람이라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최근에 ‘쌍수’를 해서 얼굴이 예뻐졌다.”

“김정은 개객기”

“’로케트를 녹여라’로 가수의 꿈을 이루었다.”

“당산철교 건널 때 부실공사 보도한 내 덕분에 살아있는 줄 알아라.”

정말로 ‘개드립’은 무한정 염가로 판매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했어요. 아이들이 웃겼다고 평가하는 데 그치지 않고 꽤 유익했다고 평가했던 이 날의 기억,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거죠. 그야말로 무엇을 이루기 위한 꿀팁이라든가 ‘정신 차리고 공부해’ 식의 ‘뽕’이 없어도 유익한 진로 탐색 프로그램은 가능하냐는 질문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실패의 한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배운다

최일구 전 앵커는 어떤 기준에서 직장에서 파업이란 과정을 통해 복직에 실패하였고, 최근에는 경제적으로도 파산 신청하는 등 실패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이죠. 학생들은 파업하다가 직장 잘리고, 돈도 없는 이 아저씨를 보고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을까요?

오히려 실패의 한 가운데 있는 사람과 마주하는 장면은 꽤 괜찮은 질문을 만들어냈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셨어요?”

“진짜 언론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실패를 자처할 때, 그리고 그 대가로 꽤나 버거운 짐을 짊어지는 도중에, 그러니까 아직 그 짐을 홀연히 벗지 못하고 있는 정황에서, 아직도 그 선택이 괜찮다고 생각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내적 가치는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하거나, 성취한 것을 포기한 사람에게서 더욱 자주 찾을 수 있는 것 아니던가요? 근사한 것을 성취 완료했거나, 차마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떤 정신에 대해서 말할 때 그의 말을 모두 믿어주는 것은 힘들지 몰라도, 어떤 언론인이 부당한 정황에 항의하다가 실직하여 애들 앞에 와서 로켓을 녹이며 춤을 출 때, 애들은 연민이 아니라 용기와 정직을 보았던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미성년이야말로 마음껏 실패할 꿈을 꿀 수 있는 나이라면, 아직 실패를 벗어날 실마리를 찾지 못했지만, 엉덩이춤을 멈추지 않고 자존감 충만한 사람들을 그 실패의 와중에 많이 초청했으면 좋겠어요. 그들로부터 배울 게 많을 것입니다.

좌절 슬픔 여자 사람 포기 슬픔

견디는 유머를 배운다

현재 중고등학교의 직업탐방 또는 진로 탐색 프로그램은 겉으로는 개인의 다양한 소질과 적성에 맞게 적합한 진로를 설정하고 그것에 맞게 진학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정보와 만남의 기회를 학교가 제공하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학교가 적극적으로 이끌어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보다는, “당장 다음 달에 누구 와줄 사람 없나?”라는 질문에 가로막혀 전화 돌리느라 바쁜 상황이 연출됩니다. 사람 구하기 힘들어요. 이 가운데 욕 안 먹으면서 아이들도 시시해 하지 않을 사람을 데려와야 할 텐데 검증할 시간은 없으니 특정 직업군이나 직능, 직함을 앞세워 사람을 찾게 되는 거죠. 담당자는 죽을 맛이에요.

게다가 이렇게 진로를 직업이나 직능으로 협소하게 이해하면 “교사가 될 것인가, 기업인이 될 것인가”와 같은 단편적 질문만이 남는데 그 해악은 단지 선호 직업군의 사람 모시기 쉽지 않다는 데만 있는 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청년기에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직업을 취사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많던가요? 오히려 우리 대다수는 “네가 싫어하는 일 A와 B 가운데 뭘 할래? (비정규직이나 무급 인턴으로)”와 같은 질문을 먼저 받을 거에요.

선택 기회가 무한하지 않은데 무슨 과에 진학할 것인가를 선택하도록 돕는 것이 이상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진로 탐색 프로그램이 체계적일수록 덜 유용해지는 면이 생기죠. 자세하고 분화되었으며 더욱 개인적인 정보를 맞추어 제공함으로써 더욱 구체적으로 왜 넌 안 되는지 깨닫게 해주는 수많은 자아 각성, 청춘 프로젝트, 부흥회의 사례가 양산됩니다. 이런 프로그램은 단지 그 자리에 있을 때만 모두들 로또를 꿈꾸느라 기분이 좋을 뿐이에요. 저는 CGV 효과라고 부릅니다. (ㅎㅎ)

가능성 길 진로 선택

차라리 이 시간에 유머를 가르치는 건 어떤가요? 어떤 선생의 말마따나 ‘존나 버티는 정신’이 필요한 시점인 거죠. 현실에서 해학을 발견하고, 일상을 뒤틀어 새롭게 바라보는 능력. 별 해괴한 것들을 실험하고 시도하면서 만들어가는 나만의 예술세계가 왜 매력적인지 20살 이전에 배우지 못한다면 평생 모를 겁니다.

성공을 위해 도전하는 젊은이 말고, ‘성공 조까라 그래! 내가 제일 멋있어!’ 정신의 어떤 사례집 발간이 필요합니다.

직업으로 자신을 규정하고 그것이 자아성취와 동의어라고 생각하면 최일구는 벌써 분열했을 겁니다. 그러나 오늘 최일구 아저씨는 당산 철교가 멀쩡한 게 자신 덕분이고, 로켓을 녹이는 게 더 근사한 자아실현이라고 설파하십니다. (아멘)

그것은 불의한 세상에 고꾸라져버린 후에 정신분열 해서 얻은 해괴한 취미생활 같은 건 아니고, 오히려 로케트 엔진처럼 뜨거운 자기애에 가까웠어요. 어쩌다가 파산했지만, 푼돈에도 괜찮다며 기꺼이 학교에 찾아와 썰을 풀어주시는 걸 보니 그게 계획하는 제2의 인생이 저는 근사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 질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MBC 아나운서가 되나요?

“MBC랑 대한항공이랑 먹고 살려고 시험 봤는데, MBC에 붙으면 됩니다.”

아아, 종이 쪼가리에 영어단어시험문제나 날리는 이 정규직 파리 한 마리가 범접할 수 없는 광활함 아닙니까? 진로를 탐색한다는 것은 이렇게 반드시 직업이라는 키워드부터 시작하지 않아도 좋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모든 순서가 끝나자 소리를 지르며 아저씨랑 사진 찍으러 앞으로 달려나갔습니다.

“최일구 강연자와 함께” 2015년 5월
“최일구 강연자와 함께” 2015년 5월

가도가도 끝없는 태양처럼
인생길은 누구나 험난하지
쉬운 일은 없는 거야
아~ 아~ 아~ 아~
끝없는 우주 한 구석에
한줌도 안 되는 흙덩어리 위에서 왜 인간은 등지며 사는가
웃으며 살자

– 최일구 작사/작곡, [로케트를 녹여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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