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는 치킨집을 차릴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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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제목의 파워포인트가 온라인에서 큰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치킨집 운영도 굉장히 어려우니 전문성을 살려 프로그래밍이나 열심히 하자는 훈훈한 교훈(?)을 주며 끝났지만,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격언이나 우스갯소리인 “코딩하다 막히면 주변 치킨집 사장한테 물어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떠오르게 만드는 계기이기도 하다.
사실, 이 이야기가 프로그래머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윤곽이 드러나는 매년 10월경이 되면, 마치 연례행사처럼 신문과 TV 등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이공계 위기의 실태와 한국의 이공계 인력 현황에 대해 다양한 목소리를 보도하고는 한다. 대학에서는 뛰어난 학자들이 부족하다고 하고, 기업에서는 우수한 연구자들이 없다고 하지만, 한편으로 이공계 학생들은 졸업 후 한참이 지나도록 박사 후 연구원 신분으로 여러 직장을 전전하는 어떤 선배의 도시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
어째서 일선의 과학자들, 공학자들, 그리고 대학원생들은 이런 엉킨 실타래 같은 현실을 이야기하고, “치킨집이나 차리자”라며 자조하게 된 걸까. “왜”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사람들 대부분은 경제적 지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국가경쟁력에 이바지할 과학기술 분야에 돈을 안 쓰고, 다른 분야에 돈을 쓰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혹자가 이야기하듯 우리나라가 아직 “사농공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정책을 만드는 공무원들이 과학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과학자 출신 정치인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일까? 정말 경제적 지원이 문제라면, 풍족한 연구비를 바탕으로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내던 몇몇 스타 과학자들이 연구 조작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이쯤 되면 대학원생들은 비명을 지르고 싶어진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당장 대다수 대학원생의 프로젝트 인건비부터 정상인 것 같지는 않은데… 대학원생은 노동자인가 학생인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 “왜?!”
“왜”라고 묻자면 끝도 없이 물을 수 있기에 금방 지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치킨집 차리지만 않으면 돼!”라는 생각으로 논문을 읽고 연구만 하기에는 아쉬운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이런저런 물음까지 자연스레 드는 것은 막을 수 없다.
“미국 애들은 뭘 먹고 자랐기에 저런 연구를 금방 해내지?”
“듣자하니 프랑스 애들은 해가 지면 퇴근한다던데, 그러면 연구실에서 먹고 자는 우리 랩은 저기보다 항상 성과가 우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필연적으로, 때때로나마, 내가 하는 연구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내 연구가 사람 사는 데 도움이 되는지, 왜 항상 내가 하고 싶은 연구는 한국에서는 하기가 힘든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물론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을 연구한다는 것이 “1 + 1 = 2″라고 배우던 초등학교 시절의 수학만큼 간단하다면 참 편했겠지만, 연구자들은 훨씬 복잡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과학기술정책은 연구자들이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답을 내리고자 할 때 혹은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지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기술정책은 “공부”해야만 하는 대상이며, 공부의 범위는 흔히 연구 개발(Research and Development)이라고 일컬어지는 R&D 정책에 국한되지는 않고, 되어서도 안 된다. 즉,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한다는 것은 다양한 과학기술 관련 분야에 대해 다각도의 어쩌면 이질적일 수도 있는 접근방식을 제시하는 것이다.
어떤 공부를 하는가
과학기술정책이라고 할 때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떠올리는 R&D의 대표적인 연구분야로는 기초과학 분야에 대한 정부의 연구비지원 정책, 과학기술인력정책, 여성과학자 육성정책, 연구비 평가 시스템 등이 있다. 분야마다, 연구 특성마다, 혹은 연구 집단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연구비 규모에 있어 적정 연구비는 어느 정도이며 효과 및 효율을 어떻게 평가하고 지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주로 경제적 측면에서 다루게 된다.
또한, 이러한 논의는 국내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국제 관계 차원에서 논의되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정부뿐만 아니라 산업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과학을 위한 정책
에너지 정책은 다양한 이슈를 모두 아우르는 좋은 예시다. 가령 “에너지 자원이 부족한 국가의 에너지산업은 어떻게 형성되고, 개발되고, 발전할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21세기의 저탄소-지속가능 에너지 체제(regime)에서 20세기 주요 에너지자원인 석유산업기술은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인데, 에너지통계 분석을 통해 OECD 국가들의 에너지 정책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더 나아가서 국가별 사례조사를 통해 석유산업기술발전의 과거와 현재를 공공정책과 관련 기술연구기관의 역할 그리고 산업계와의 상호작용을 중심으로 분석해 볼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량적(quantitative) 의미의 과학기술정책도 시간적, 공간적 의미에서 그 범위를 넓힐 수 있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조금 더 시야를 넓혀 정성적인(qualitative) 방법으로도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해 볼 수 있다. 가령, 과학기술인력정책은 경제적 지원과 같은 정량적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문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산을 늘린다고 해서 반드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기에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과학기술인력정책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며, 대표적으로 한국의 학술연구정책을 이야기해 볼 수 있다. 한국 학술연구능력의 급속한 성장은 과학기술정책 기조와 고등교육 관리방식, 그에 따른 대학의 학과체제, 각 학술 분야 내 연구분야, 학술활동문화 등 다방면의 변화를 수반해왔으나 이를 포괄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정책의 실행자인 대학의 교수 및 학자들과 이를 대변하는 대학 및 학계의 능동성에 초점을 맞춰 특정 시기, 예를 들어 80년대와 90년대 한국의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그들의 활동이 과학기술정책과 고등교육정책의 궤적형성형에 미친 영향을 밝힐 수 있다. 즉, 역사적 접근을 통해 학술과학과 고등교육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당시의 정책들이 가지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밝혀, 정량적 지표가 아닌 정성적 방법으로도 정책의 효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해 볼 수 있다.
접근법은 다양하지만, 지금까지 이야기한 과학기술정책은 큰 틀에서 “과학을 위한 정책(policy for science)”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에너지, 혹은 인력 육성과 같은 과학기술 관련 분야의 발전을 위해 어떤 정책이 얼마나, 어떻게, 왜 유효(혹은 유해)한지에 관한 연구를 의미한다. 하지만 “과학을 위한 정책”만을 ‘과학기술정책’이라고 정의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정책을 위한 과학
이를 메우기 위해, 생각을 뒤집어 “정책을 위한 과학(science for policy)”을 공부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접근에서는 정책적 의미에서 과학적 발견과 그 사회적 응용을 재평가한다. 주로 공공정책의 영역에서, 과학이나 기술이 큰 사회적 이슈를 일으키거나 혹은 중요한 과학적 사실이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정책을 위한 과학”의 좋은 연구 주제다.
최근 들어 카이스트를 괴롭히는 결핵이 대표적인 사례다. 결핵은 높은 감염성으로 인해 공중보건 정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질병 중 하나다. 비록 대중은 결핵을 과거의 질병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질별관리본부에 따르면 결핵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환자와 사망자를 발생시켰으며, 한국은 아직도 OECD 국가 중 결핵 감염률이 가장 높다.
이에 따라 보건당국을 포함한 전문가들은 여전히 결핵 퇴치에 신경을 쏟는다.
- 정부가 내세우는 결핵 퇴치정책에서의 결핵
- 언론에 비치는 결핵 등 여러 담론 속의 결핵
- 과학적, 의학적 의미의 결핵
- 이들 관계가 보건정책의 형성과 적용에 주는 다양한 영향을 분석해 볼 수 있다.
더불어 그 과정에서 결핵이란 질병이 한국사회에 어떤 의미로 존재해 왔는지, 결핵을 관리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여러 취약계층집단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석하는 것은 보건의료정책, 공공정책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또한 과학기술정책의 일부이기도 하다.
과학기술과 사회관계 중심의 과학기술정책
“정책을 위한 과학”의 틀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각종 공공정책과 깊이 연관된 연구를 통해 과학기술 그 자체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중심으로 과학기술정책을 생각할 수 있다.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ology Studies, STS)이나 인류학적 접근 등을 통해 이 관계를 검토하는 시도는 국가의 정책적 이상이 가지고 있는 암묵적 가정과 그로 인해 수반되는 다양한 현실(reality) 간의 관계나 간극을 규명해 낼 수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 과학기술정책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가 1945년에 펴낸 보고서 “과학, 그 끝없는 미개척지”(Science the Endless Frontier)에서 그가 제안했던 선형모델(linear model; 기초 연구에 대한 투자는 응용연구 및 산업에 도움이 되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일방향적 모델)은 지금까지도 과학기술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지만, 동시에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부시의 보고서가 기본적으로 과학기술활동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을 전제하고 있고, 기초, 응용 및 산업 그리고 사회문제 해결로 이어지는 각 단계 사이의 상호작용을 단순화하며, 과학자 집단을 사회와의 상호작용 없는 독보적 집단으로 정의하는 등 ‘관계’의 측면에서 사회의 현실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다양한 연구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공공정책들이 과학기술과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접근이 과학기술정책에 주는 함의가 더욱 중요해졌다. 실제로, 앞서 예시로 들었던 결핵 관련 문제처럼 과학적 사실의 발견과 그 응용이 항상 모든 사회문제를 해결하지는 않는다는 걸을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하나의 사회문제는 또 다른 사회문제와 연결되고 그에 따라 보이지 않던 다른 관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질병을 이야기하며 환경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는 데에는 높은 과학적 불확실성이 존재하는데, 이로 인해 관련 정책수립 과정에는 과학적 사실뿐만 아니라 다양한 행위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회정치적 입장 차이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석면의 위해성은 그 사용의 역사가 큰 만큼 과학적으로는 유의미한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만, 개별 사례에서 석면에 대한 노출과 그에 따른 질병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데에는 여전히 높은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 이러한 개별 사례에 대한 연구는 과학의 불확실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분야의 정책 형성과 집행 과정을 조명함으로써 환경과 의료 분야에서 과학과 정책 사이의 관계를 재고하게 한다. 이와 같은 방향의 연구는 과학기술정책이 그 자체로서뿐만 아니라 공공정책 일부로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해야 한다
사실 과학기술정책은 대중적인 의미에서 와 닿는 분야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글을 읽게 될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과 과학기술분야 종사들에게 있어서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생계와 직접 연관된 분야다. 그렇기에 더욱 이 글을 빌려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한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정부의 과학기술정책을 담당하는 사람이 누구고, 관련 법들과 정책이 무엇이고, 연구비가 얼마 지원되는 등, 결과적 사실로서 인지할 수 있는 과학기술정책에서 더 나아가 이런 결정이 왜, 어떻게 만들어지고 과학기술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보는 것까지를 과학기술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현대 사회에서 과학기술과 사회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과학기술정책을 한다는 말은 어찌 보면 사회정책을 한다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학기술정책은 ‘아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대중들은 어쩌면 많은 연구자와 정책 집행자들까지도, 어려워 보인다는 이유로, 혹은 흥미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고 바쁘다는 이유로 다른 누군가에게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고민을 떠넘기고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한다는 것에 왕도는 없고, 그렇기에 누구나 공부해 볼 수 있다.
이 글이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아주 명확한 방법론이나 특정 연구 주제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왜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우리가 연구실 회식에서, 동문들 술자리에서 혹은 학교 내부 커뮤니티에서 별생각 없이 내뱉는 푸념이나 한탄 중에는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아까운 것들이 많다.
다들, 자신만의 문제의식을 붙잡고 “우리나라 연구자들의 미래”나 “국가과학기술정책이 나아야 할 방향” 같은 커다란 문제에 대해 작지만 아름다운 청사진을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이 청사진이 그저 그런 한여름 밤의 술안주로 끝나 버릴지도 모르지만, 그 술자리가 다음 날 아침까지 이어질 수 있게 만드는 연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 더, 자주, 많이(!) 과학기술정책에 관해 이야기하자.
아니, 해주세요!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하자?
과학기술이란 말을 너무 자주 들어서 과학과 기술이 별개라는 것을 잊게 됩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이란 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학문입니다. 주어진 조건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결과에 대한 원인을 반복적으로 증명하며 이론으로 적립하죠.
반면 기술이란 효과를 얻기위해 효율이 높은 방법을 사용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럼 과학기술이란 무엇인가? 두 가지 단어가 어떻게 합성되었는가? 전혀 별개의 의미를 왜 합성했느냐에 질문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과학기술정책이란 단어도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이나 과학기술정책이란 단어는 사람을 선동하기 위해 ‘정치’에서 쓰이며 주로 세금을 분배받기 위한 집단에서 퍼트린 조어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공계인을 독자로 두고 쓰신 글인지 궁금합니다.
스스로를 지극히 평범한(?) 이공계人이라고 생각하는 저는 이 글을 이해하기가 힘이듭니다.
아직 ‘과학기술정책’이란 것에 대해 알지 못하고 공부도 하지않은 입장에서 읽어내려갈 때 용어들도 낯설고, 모호한 표현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읽다보면 갑자기 논리저내가 점프 되는 듯한 느낌도 몇 번 받았구요..(당연히 알지?라고 귓속으로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알기만하지 말고 공부하자! 라고 하셨지만 공부는 커녕 무엇인지도 ! 하고 머리위로 느낌표가 뜨지 않습니다.
한줄요약하자면,
혹자가 글을 다 읽었으니 과학기술정책이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무런 대답도 못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