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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뮤즈: 슬로우뉴스 3년

뮤즈(muse, 혹은 무사; Μουσα).

뮤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홉 여신이다. 이 아홉 여신은 역사와 찬가, 음악과 현악, 희극과 비극, 천문학과 춤, 서정시와 서사시 등 예술의 각 분야를 관장한다.

  • 클레이오 (Kleio, Κλειώ) – 역사
  • 우라니아 (Urania, Οὐρανία) – 천문학
  • 멜포메네 (Melpomene, Μελπομένη) – 비극
  • 탈리아 (Thalia, Θάλεια) – 희극
  • 테르프시코레 (Terpsichore, Τερψιχόρη) – 춤(무용)
  • 폴리힘니아 (Polyhymnia, Πολύμνια) – 찬가
  • 에라토 (Erato, Ἐρατώ) – 서정시, 독창
  • 에우테르페 (Euterpe, Eὐτέρπη) – 음악, 서정시
  • 칼리오페 (Calliope, Καλλιόπη) – 현악, 서사시

하지만 오늘날 뮤즈라는 단어는 아홉 여신을 직접 가리키기보다는 창조적 영감에 관한 비유로 쓰인다. 뮤즈는 예술가와 작가에게 감흥과 영감을 주는 존재들, 기어코 예술적 불꽃을 피우게 하는 존재다.

천일동안

슬로우뉴스가 벌써 3년이다.

익숙한 노래 제목처럼, 그리고 그 노래 가사처럼, 천일동안 난 우리의 열정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자명하게도,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 열정처럼 쉬 꺼지기 쉬운 게 또 있을까. 놀라움이 지겨움으로, 기꺼운 열정이 그저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하는 의무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 모든 놀라움도 그저 지겨운 습관의 재료일 뿐이다.

그럼에도 슬로우뉴스를 하면서, 때로 속상했지만, 자주 행복했다.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매체라 하더라도 누군가의 진실한 목소리를 듣고, 누군가의 간절한 외침을 전하며, 또 누군가의 유쾌한 실험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 잠시나마 함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그리고 그 속에 있는 ‘또 다른 나’일뿐인 당신의 삶을 더불어 맛볼 수 있다는 것, 더불어 꿈꿀 수 있다는 것, 더불어 속상해하며 함께 울 수 있었다는 건, 그래, 축복이었다.

무시무시한 속도 속에서 그저 시스템의 주인이 먹잇감을 주며 울리는 종소리에 침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진 말자고, 게임이나 영화나 어느 날 등교길에 혹은 출근길에 벼락처럼 만나는 지하철 그녀의 생머리처럼 마음 설레는 무엇이 될 수는 없어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소중했던 친구에게 따뜻한 저녁밥이라도 대접하고 싶은 그 마음의 동무는 되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편집하고, 또 때로 글을 썼다.

시대의 욕망에서 잠시 물러나 나 자신을, 내 주변의 친구와 이웃을, 내 가족과 형제를 돌아보자고 우린 슬로우뉴스를 창간하면서 다짐했었다. 들풀(Deulpul)이 슬로우뉴스 창간을 축하하며 김광규 시인의 시를 빌려와 했던 말, “아픈 애기를 업고 뛰어가는 여인도 보는” 그런 세상.

그 풍경을 힘들 때마다 종종 떠올렸다. 그런 세상을 슬로우뉴스 독자와 필자 그리고 동인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 싶었다.

우리 시대의 뮤즈

우리를 설레게 하는 뮤즈는 누구일까. 우리를 들뜨게 하는 뮤즈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무엇으로 설레고, 어떤 순간에 살아 있음을 느끼며, 또 무엇을 통해 스스로 생을 축복하며 열정을 불태울까.

우리는, 아니 나는 이미 그 대답을 안다. 여전히 속도는 매력적이다. 느림은 성찰과 고요에는 닿지 못한 채로, 속도의 시스템 속에선 그저 불안과 강박의 소용돌이만을 불러올 뿐이다. 우린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빈곤을 근심하지는 않지만, 경쟁과 속도에서 나만 혼자 엿되면 안 되지 불안해하면서 죽을 만큼 근심한다.

그 해맑은 아이들이 바닷속에 가라앉고, 병원은 가수를 죽이며, 대학이 무너지고, 유치원 교사는 어린아이들을 때린다. 지상파 8시 뉴스는 유치해서 더는 볼 수 없는 저질 시트콤이 된지 오래고, CF 속 미끈하고, 풍만한 그녀들은 그토록 쉽게 마음을 흔든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게임 속 아이템을 완성해야 한다는 집념 어린 강박은 기어코 우리의 상상력을 무장해제한다.

원작자를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그저 트래픽 키워서 크게 한 건 하자는, 그저 잘 팔리면 장땡인, 묻지 마 저작권, 묻지 마 컨텐츠, 묻지 마 미디어. 하지만 그런 미디어에 돈 벌면 장땡인 묻지 마 투자가 이어진다.

내 나이에서 까마득하게 멀리 있는 아이들, 그저 길가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걸어가는 모습만으로도 나는 부러워 미칠 것 같은 그 젊음이 내가 진심으로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그 묻지마 미디어들을 슬로우뉴스보다 ‘훨씬 더 쿨한 뉴 미디어’로 소비한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안다.

묻지 마 생산, 그 도저한 침묵과 진공의 시스템에서 묻지 마 소비가 생겨나고, 그걸 자연스럽게 지하철과 버스 속 무료한 시간의 ‘일용할 양식’으로 소비하는 습관이 생기고, 그 습관은 아주 단단해졌다. 누가 누구를 욕하겠나. 내가 너인 걸, 우리가 이미 자기인걸.

저널리즘과 뮤즈 

저널리즘의 뮤즈는 누구일까. 무엇일까. 혹은 저널리즘은 누군가에게 뮤즈의 역할을 하기는 할까. 할 수 있을까. 오늘, 저널리즘이 일깨우는 영감이라는 건 과연 존재하는 걸까.

그저께,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안수찬 기자, 아니 한겨레21 편집장은 “현장 페티시(fetish)가 있다”고 말했다. 현장 페티시라는 말이 헤어진 뒤에도 계속 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난 안수찬의 뮤즈는 ‘현장’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 현장에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슬픔이 기쁨이 안타까움이 분노가 그 희로애락과 그 희로애락이 담긴 표정과 목소리가 안수찬의 뮤즈구나, 내 멋대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슬로우뉴스 편집장으로서 나의 뮤즈는 누구일까. 무엇일까. 슬로우뉴스의 뮤즈는 누구일까. 무엇일까. 무엇이어야 할까. 그리고 독자에게 슬로우뉴스는 단 하루만이라도, 무뎌진 습관의 껍질을 깨는 뮤즈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서로 삶을 일깨우는 뮤즈들이 될 수 있을까. 슬로우뉴스가 그 뮤즈들이 맘껏 노래하고, 춤추며 대화하는 뮤즈의 정원이 될 수 있을까.

돈과 섹스, 폼나는 직업과 학벌, 더 큰 차와 더 큰 집, 잘생긴 남자친구, 섹시한 여자친구… 나라고 원하지 않을까. 나도 원한다. 이미 세상은 ‘그것들’이 점령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기쁨, 우리 시대의 속도, 우리 시대의 욕망은 짝말, 슬픔과 느림 그리고 희생이라는 그 짝말을 가지고 있는 걸까.

소망은 오직 슬픔이라는 뿌리에서만 태어날 수 있다. 그런데 행복이 관계적이듯, 슬픔은 관계적이다. 우리를 살게 하는 거대한 추상명사, 가령 사랑과 소망과 기쁨과 슬픔은 나와 너의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죽는다. 이건 필연적이다.

당신의 슬픔, 그 슬픔에서 싹 트는 우리의 소망이 우리 자신에게, 서로에게, 우린 무슨 멋지고 섹시한 예술가는 아니지만, 아니겠지만, 뮤즈가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어.

사랑받아야 한다는 욕망은 사랑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사랑받음과도 아무 상관이 없고 항상 그대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으면 된다. 그대는 그대의 모든 시(詩)에서 그대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고통과 자신의 죽음을, 문화를, 방법적 사랑을 놓지 않으려느냐, 슬픔 다사(多謝).

잠이 깨었으나 형의 꿈은 더 깊어갔읍니다.

– 정현종, 사랑사설 하나; 자기 자신에게, [고통의 축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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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민노씨
슬로우뉴스 편집장

누군가에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뉴스일 당신, 그 안에 담긴 우리의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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