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코리아 칼럼] AI가 노동자의 숨겨진 전문 지식까지 빼앗는가? ‘제조업 암묵지기반 AI 사업’에 대한 노동계의 우려. (우상범 /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 (⏳5분)
AI와 암묵지
우리나라는 AI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드물게 산업과 기술 인프라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 산업과 초고속 인터넷·5G 네트워크 등 AI 산업 발전의 핵심 기반을 보유하고 있고, 반도체·자동차·조선·철강·건설 등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는 한국 AI 산업의 차별화된 강점이다. 제조업 전 과정에서 축적된 생산·품질·안전 관련 데이터는 단순한 디지털 정보가 아니라 오랜 시간 형성된 산업 경험의 결과물이며, 다른 국가가 단기간에 모방하기 어려운 전략적 자산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인프라보다 더 근본적인 경쟁력이 있다. 바로 현장 숙련노동자의 경험·직관·판단으로 형성된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ledge)’다. 숙련 노동자들은 반복된 작업과 현장 대응을 통해 위험을 감지하고 품질 문제를 예방하며 생산 공정을 최적화하는 체화된 능력을 축적해 왔다.
📌 암묵지: 말이나 글로 명확하게 표현하거나 전달하기 어려운, 개인의 경험과 학습을 통해 몸에 체화된 주관적인 지식.
이러한 암묵지는 문서나 매뉴얼로 완전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AI와 결합될 경우 제조 공정의 효율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높일 수 있는 핵심 자원이 된다. 우리나라는
- AI의 두뇌 역할을 하는 반도체 산업,
- AI가 실제로 적용될 제조업 산업현장,
- 그리고 AI가 학습할 숙련 노동자의 암묵지라는 세 가지 핵심 요소를 동시에 모두 갖춘 세계적으로 드문 국가다.

제조업 암묵지 AI 모델 사업에 대한 노사 입장
최근 한국 제조업은 저출생과 고령화, 청년층의 제조업 기피 현상, 기존 숙련공의 고령화가 맞물리면서 심각한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단순히 일할 사람이 줄어드는 문제를 넘어, 제조업의 핵심 경쟁력을 지탱해 온 숙련 인력의 단절이 가시화되면서 산업의 지속가능성 자체가 위협받는 실정이다.
현장 명장들의 은퇴는 단순한 인력 이탈이 아니라, 한국 제조업을 이끌어온 고도의 생산기술과 현장 판단체계 자체가 통째로 소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2026년 4월 산업통상부는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 「2026년도 제조 암묵지 기반 AI 모델개발 사업」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제조 명장의 오랜 경험과 직관, 순간적인 판단력이 녹아 있는 암묵지를 데이터로 전환하고, 이를 학습한 특화 AI 모델을 개발해 제조혁신을 달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총 480억 원의 예산이 투입되며, 자동차·조선·철강·전자·바이오·화학 등 10대 제조업 분야에서 약 30개 과제를 6월까지 선정할 계획이다.

경영계는 이 사업을 국가 경쟁력 확보와 산업 생존을 위한 필수 과제로 보며 적극 환영하고 있다. 고령화와 숙련공 부족으로 발생할 수 있는 기술 단절 위험 속에서 명장들의 암묵지를 데이터화하는 작업은 과거의 기술을 안정적으로 전승함과 동시에 현장의 생산성 혁신을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 평가받는다. 이와 함께 중소기업이 소외되지 않도록 정부가 주도하여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하고, 맞춤형 컨설팅과 전문 인재 양성 등 실질적인 지원책을 패키지로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노동계는 제조업의 구조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AI를 활용해야 한다는 당위성 자체에는 공감하면서도, 현장 노동자의 권익 보호와 충분한 사회적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되는 것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노동의 본질적인 성격, 고용의 안정성, 그리고 권리와 이익의 배분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사회적 의제로 삼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노동계가 제기하는 네 가지 문제
노동계는 다음의 네 가지 이슈를 제기하고 있다.
첫째, AI 기술 도입에 따른 고용 불안과 노동의 소외 문제다. 양대 노총은 AI가 숙련노동자의 암묵지를 학습하고 재현해내는 과정이 그동안 인간의 영역이라 여겨졌던 고숙련·비정형 업무까지 자동화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는 노동자의 전문성과 현장 재량권을 크게 약화시키고, 장기적으로는 인력 감축과 대규모 구조조정의 빌미가 될 수 있다. AI는 어디까지나 노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닌 인간을 돕는 지원 수단으로 한정되어야 하며, 기술 운용에서 인간의 통제와 개입 원칙이 제도적으로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둘째, 암묵지 데이터의 소유권과 수익의 공정한 배분 문제다. 노동자의 숙련과 노하우는 장기간에 걸친 헌신의 산물이다. 기업이 이를 가져가 AI 개발에 활용함으로써 이윤을 독점하면서 현장 노동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이는 명백한 ‘지식 수탈’과 다름없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단계에서 반드시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사전 동의를 구해야 하며, 구체적인 권리 보장 조항과 함께 공정한 보상 및 수익 배분 체계가 수립되어야 한다.

셋째, 현장 노동자에 대한 상시적인 감시 강화와 개인정보 침해 가능성에 대한 우려다. 암묵지를 정밀하게 추출하는 과정에서 시선 추적 장비를 도입하거나 행동 및 음성 데이터를 무차별적으로 수집하면, 이는 노동자에 대한 상시 감시 체계로 변질될 위험이 크다. 특히 이렇게 축적된 민감한 데이터가 향후 채용이나 성과 평가, 인위적인 구조조정 등 인사관리의 압박 수단으로 악용될 경우, AI는 생산성 혁신의 도구가 아니라 노동자를 통제하는 장치로 전락할 수 있다.
넷째, 사업의 기획과 추진 절차 전반에서 노동계가 배제된 채 정부 주도로 급하게 진행되는 문제다. 기술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노동자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한 만큼, 사업 추진에 앞서 노사 협의와 깊이 있는 사회적 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마침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 ‘AI 전환에 따른 노사상생위원회’가 지난 22일 발족했다. 노사정이 모인 경사노위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친 후에 사업을 진행해도 늦지 않다. 국가 수준과 사업장 수준에서 노조 참여 거버넌스 구축이 제도화되어야 한다.
‘정의로운 전환’의 조건
노동계가 AI 산업 발전과 기술 혁신 자체를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길과 현장 노동자의 권리를 두텁게 보호하는 길이 조화를 이루는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을 실현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위해 노동계는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 노동자와 노동조합 참여의 법제화
- 암묵지 데이터에 대한 명확한 권리 설정 및 공정한 보상 체계 마련
- AI를 활용한 과도한 노동 감시와 평가 규제
- 노사정 사회적 합의 기구의 실질적 가동
- 유럽연합의 AI 법(EU AI Act)과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에 부합하는 노동 보호 체계 구축
이번 사업의 본질적인 질문은 ‘누구를 위한 AI 전환인가’다. 우리나라가 진정한 AI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반도체·데이터·제조업이라는 물리적·기술적 기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위에 사회적 신뢰와 제도적 정당성이 함께 구축되어야만 지속 가능한 발전이 가능하다.

현장 명장들의 암묵지 데이터에 대한 명확한 권리 설정과 공정한 보상 체계, 철저한 노동자 보호 장치가 마련될 때, AI를 통한 생산성 향상이 기업의 이윤 독점으로 끝나지 않고, 양질의 일자리 확대와 노사 상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것이 한국이 단순한 ‘AI 기술 강국’을 넘어 인간의 가치를 포용하는 ‘정의로운 AI 강국’으로 발전하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