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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8.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 – 친구들

석사 1기와 2기 생활을 하며 나는 고향인 서울에 거의 가지 못했다.

비상사태 준비하는 5분 대기조 

주 5일 내내 연구소와 학과사무실 조교 근무를 해야 했고, 주말도 따로 없었다. 한 번은 수업이 없는 평일 오전에 조교실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서울에 좀 다녀오려고 했다. 물론 다음날 오전 8시에 차질없이 학과사무실의 문을 열겠다고 했다. 그러자 조교실장은 난색을 표했다.

“학과사무실 근무라는 것이 언제 어디서 비상사태가 벌어질지 모르는데, 조교들이 30분 이내에 모일 수 없다면 조교라고 할 수 있겠나.”

그는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그에 따르면 학과사무실 대학원 조교라는 것은 ‘5분 대기조’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비상사태’라는 것은 고작해야 교수가 대량의 복사를 맡기며 10분 후에 찾으러 올게, 한다거나 어느 교수가 연구실 책상 배치를 좀 바꾸고 싶다는데 남자 조교들이 필요해, 그런 것들이었다.

나는 명절, 부모님 생신, 혹은 정말 중요한 일이 있지 않으면 대부분 학교 근처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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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의 비상사태… 교수가 대량 복사를 맡기고 10분 후에 찾아오겠다고 하는 것. (출처: Joel Penner, CC BY)

친구가 될 동갑은 전혀 없었다 

고향에 갈 수 없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와 단절된다는 말과도 같다. 현재진행형이 될 수 있었을 여러 인연들과 나는 온전히 작별해야 했다. 서울과 서너 시간 떨어진 이 도시에서, 나는 참 많이도 외로워했다.

서울보다 면적이 몇 배나 큰 이 도시에서 내가 기댈 곳은, 몸담은 대학원 사회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인문계 대학원에는 남자가 부족했고, 있다 하더라도 나와 ‘또래’인 이들은 거의 없었으며, 더욱이 친구가 될 ‘동갑’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는 2008년부터 지금까지, ‘오늘 술 한잔 하자’, ‘내가 많이 우울한데 술 한잔 사줘’, ‘나 오늘 월급 받았어, 술 한잔 살게’라고 말할 직장-지역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대학원에서 나름 친해진 인연이 두엇 있었으나, P는 석사 과정을 버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L은 자신의 여유가 허락할 때만 나를 만났다.

친구 우정 남자 사람 인간

네이버에 ‘친구’를 검색하다 

L은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그래서 친구가 많았고, 나와 함께 자리에 있다가도 “야, 아는 형님이 부른다. 우린 다음에 보자.”하고 일어났다. 내가 힘이 들어 “오늘은 같이 술 한잔 해줘요.”라고 해도 그는 자주 논문이 너무 바빠서 끝나고 “내가 한 잔 살게!”하는 식으로 미루었다.

나는 그래서 혼자 소주를 두어 병, 그리고 안주가 될만한 순대나 튀김을 적당히, 해서 지나간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혼자 먹고 취하는 일이 많았다. 술잔 두 개를 가져다 놓고 속으로, ‘한 잔 받아 오늘도 수고했어’, ‘너도 한 잔 받아 힘들었지’ 하고 한잔 마시고 다시 한잔 마시고, 잔을 붓고 다시 한잔을 부었다.

나와 같은 처지인 사람이 없을까 해서 네이버에서 지역명을 치고 ‘친구’라는 키워드를 검색해 보기도 했다. 길에서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지나가면 붙잡고 ‘저랑 이야기 좀 해요’, ‘제가 술 살게요’, ‘무슨 일 해요’, ‘힘들지 않나요’하고 묻고 싶었다.

네이버 친구

멀어지는 서울 친구들 

서울의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져 갔다. 서로 연락하다가, 서로 연락이 뜸해지고, 내가 몇 번을 먼저 하다가 그나마도 어색해지고, 나중에는 내가 죽으면 이 친구가 오기는 할까, 아니 알고 찾아올 수 있을까 싶은, 그런 사이가 많아져 갔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여전히 대학원생으로 자리를 지켰고, 친구들은 ‘사회인’이 되어갔다. 노동하고, 그에 준하는 월급을 받았다. 그 격차는 ‘친구’라는 단어로 쉽게 메꿔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 만나 적은 돈을 나눠 삼겹살에 소주 한 잔으로 즐겁던 녀석들이 갑자기 ‘좋은 회’를 먹자거나, ‘양주’를 먹자거나, 오늘 내가 살게, 하는 말을 꺼냈다. 처음 한두 번은 “너 임마 좋은 직장 잡은 걸 보니 정말 좋다”, “오늘은 내가 얻어먹지만, 내가 교수되면 너희들 다 모아서 파티 한 번 할게.”하고 그 변화를 즐겁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떤 벽이 점차 쌓여갔다. 그것은 오래된 친구이든, 좋은 친구이든, 막연한 친구이든, 가리지 않았다. 친구들은 직장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들과 경쟁하듯 서로를 페이스북에 태그하기 시작했고, 내게는 서울에 언제 오는지 영혼 없는 인사치레를 하다가 그만두었다. ‘나’라는 사람의 자리는 점점 잊혀 갔다.

인간을 주장을 담은 체화물로만 보면 껍데기만 남는다. ( misspixels, CC BY NC ND)
misspixels, CC BY NC ND

“야, 그만 좀 얻어먹어 인마!”

특히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몇, 그중 G와 멀어진 일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서울에 가면 꼭 고등학교 친구인 G를 만나 놀았다. 함께 단과 학원에 다니며 오락실에서 ‘1945’를 돈이 떨어질 때까지 하고, 새우버거를 하나 더 준다는 말에 한 달 내내 롯데리아에서 함께 저녁을 먹기도 한 사이다.

그와는 언제나 저녁 6시에 만나 새벽 1시까지 술을 마셨다. 서로 성격이 비슷했고, 주량도 주취도 비슷해 죽이 잘 맞았다. 한 번은 술로 이겨보겠다고 국가대표 축구 경기를 보다가 골이 들어가면 술을 원샷하자고 정했다.

국대의 공격수가 김도훈이었던가, 골이 정말 들어가지 않아서 우리는 패스가 성공할 때마다 원샷을 하자고 했다. 우리 국대가 백패스를 즐기던 때다. 우리는 1분 동안 소주 한 병을 거덜 냈다. 그러다 죽을 것 같아서 코너킥 때마다 한잔 하는 걸로 룰을 곧 바꾸었다.

축구공
Joe Shlabotnik, CC BY NC SA

그러던 이 친구도 취업하고 ‘연봉이 2천이다 3천이다’ 했다. 취업에 성공했을 때는 내가 이 친구 회사 앞까지 찾아가 참치회를 한 접시 얻어 먹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야 할 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자주 만나지도 못하던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나 내가 맥주를 한 잔 사고 G가 2차를 가자며 어디론가 갔다.

조금 취하더니 G가 한마디 했다.

“야, 그만 좀 얻어먹어 인마!”

내가 산 맥주보다는 당연히 비싼 자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자고 한 것도 아니었다. 농담이었는지, 취해서 생각 없이 나온 말인지, 둘 다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이후로 G에게 차마 먼저 연락할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G는 잘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

JD Hancock, Big Fear, CC BY https://flic.kr/p/85Mum2
JD Hancock, Big Fear, CC BY

끔찍한 외로움… 쌓여가는 벽돌 

점점 다른 친구들에게도 ‘술 한잔 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최저 시급도 안되는 나의 시급이 그들의 연봉과 맞추어 지고 있었다. 친구들이 보는 세상이 나와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친구들이 여전히 더 많았겠으나 대학원생으로서의 자기검열과 방어가 점점 강해져 갔다.

‘그런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야’하고 치부해버리면 그만이지만, 나름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이에 조금씩 벽이 쌓여가는 듯한 그 위화감은 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누구나 쉽게 말로 ‘진정한 우정’을 과시할 수는 있지만, 정작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월과 거리가 벽돌을 쌓아가고, 그것을 치울 최소한의 시간 여유나 물질 비용이 없는 쪽이 항상 나 자신이라면, 정말이지 끔찍한 외로움이 몰려온다. 석사 1기부터 박사 4기를 수료하기까지, 참 많은 친구들이 내게서 멀어졌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살다 보면 그런 것이다. 아직도 내 곁에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비용을 대어 내가 보지 않는 사이에 눈앞에 쌓인 벽돌을 치워주었다. 그마저도 내 자기 위안일지 모르겠지만… 감사한 일이다. (계속) 

벽돌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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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1. 글을 보니 참 가슴이 아프네요. 저도 20년 전에 조교를 했었습니다. 그 학과에서는 가장 나이 많은 교수님도 자기 컵을 손수 설겆이하셨고, 어느 교수든지 조교들에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건 상상 밖이었습니다. 한번은 컴맹이신 노교수님께서 타이핑을 부탁하셨는데, 당시 알바비의 약 2배에 가까운 돈을 주셨습니다. 寸志라는 두 글자가 적힌 종이에 만원짜리 15장을 고이 싸서 다시 편지봉투에 넣어서 주셨고, 본인이 수집한 수석을 하나 고르라고 해서 선물로 주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졸업 후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다른 대학 다른 학과 교수놈들을 많이 상대해 봤습니다. 제가 경험한 학과의 문화는 매우 독특한 경우였으며, 다른 대학에서 군대식으로 일처리하는 모습을 보며 기가 막혔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폭력적인 문화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라면, 군대식 문화를 실천하면서 무슨 인문학을 한다는 것인지. 상대적으로 일류대보다는 삼류대로 갈수록, 서양학 전공보다는 동양학 전공이 군대식 문화가 심한 것 같더군요. 국문학, 국사학 등 한국학 전공은 거의 해병대 수준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것이 학술진흥재단 연구비 지출과 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연구지원을 많이 받는 분야일수록 군대식 문화가 심하더군요. 역사 분야를 예로 들면, 한국사가 예산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동양사이며, 서양사가 가장 적습니다. 셋 중에서 한국사가 가장 군대식 문화가 세더군요. 다소 성급한 결론이지만,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원되는 정부 지원이 반인문학적인 문화를 강화하는 핵심적인 기제인 것 같습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공부로 극복되어야지 예산으로 극복될 수 없는 일입니다. 더불어 교수가 학생을 위해 존재해야지 학생이 교수 월급 주는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문학 교수라는 작자들은 학생들에게 미안한 줄 알아야 합니다. 수익 면에서 보자면 명문대 인문대 졸업생들은 전문대 졸업생보다 못합니다. 교수들은 나이 먹어서 그거 다 알면서 어떻게 학생들에게 큰소리 치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연재하는 분은 아직 젊으신 것 같은데, 기운 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문학은 글에 쓰신 바로 그러한 현실과의 싸움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 그만 좀 얻어먹어 인마!
    라는 말은 사주기 싫다는 뜻보다 얼른 자리잡은 모습을 보고 싶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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