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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년 전쯤이다. 그 때 나는 연세대학교 학보사 연세춘추 편집장이었다.

신문 만들 맛 안 나던 날들

따듯해져 가는 날씨와는 달리 편집국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싸늘해질 수밖에 없었다. 취재할 기자도 있고 취재할 거리도 넘쳐났지만, 취재비도 없고 인쇄비도 부족하니 정말 신문 만들 ‘맛’이 안 나던 날들이었다.

그 당시, 학교는 ‘그동안 방만한 운영 및 신문의 질적 저하를 보인 연세춘추가 자성해야 할 때’라고 목소리를 높였을 뿐이다. 나는 나대로 당장 신문사를 꾸려 갈 재정이 부족해 답답한 울분만 쌓여 갔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당신들은 우리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거지?
정말 학보사는 방만한 경영과 인력난, 질적 저하로 무너져 가고 있는 거야?

연세대학교 학보 "연세춘추"
연세대학교 학보 “연세춘추”

학교 당국도 핑계 댈 만했다

그때 부글부글 끓던 머리는 1년이 지나 이제 뜨듯하게 식었다. 차마 차갑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연세춘추를 대하는 학교의 몰상식한 태도를 후배들에게 전해 들을 때, 마치 그들에게 당했던 언어적 폭력이 엊그제 일처럼 생생히 살아나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뜨듯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외부인이 되어서 학보사를 관조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학보사 모습은 냉정하게 말하자면 ‘과연 그렇게 학교가 핑계를 댈 만하다’.

왜 모르겠나, 주변 선후배와 친구들이 뜯어말려도 꾸역꾸역 들어와서 자신의 꿈에 한 발짝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밤낮을 새는 학보사 현직 기자 및 데스크의 고충을. 하지만 외부인으로 돌아와서 본 학보사는 학생이 외면할 만한 모습이었고, 그렇다고 학교에게 환영받는 모습도 아니었다.

손에 안 들어오는 크기…  모바일 시대 대처 미흡

최근 독자들에게 크게 어필하는 베를리너 판형은 춘추에 없다. 연세춘추 판형은 조선일보 판형으로,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앉아도 책상 위로 크게 펼치기 힘들다. 안 그래도 손이 안 가는 인쇄 매체에 더욱 손이 안 간다. 그러니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어도 눈길을 주기가 힘들다.

위 붉은 색으로 표시된 사이즈가 베를리너 판형의 크기다. (이미지: 위키백과 공용)
위 붉은색으로 표시된 사이즈가 베를리너 판형의 크기다. (이미지: 위키백과 공용)

물론, 광고주에게 아직도 조선일보 판형, 즉 대판형은 광고주에게 훨씬 더 유혹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광고비 수주에는 대판형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하지만 ‘광고주’와 ‘독자’ 사이를 저울질해야 한다면 독자를 앞에 두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렇다고 홈페이지가 잘 돼 있느냐, 그건 아니다. 아직 구시대적인 포맷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자체적인 콘텐츠 관리가 되지 않는다. 디자인 역시 한물갔다. 사실 고질적인 디자인에 대한 무감각은 비단 학보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솔직히 기성 언론사 홈페이지도 디자인이 구리기는 마찬가지다.

연세춘추 홈페이지
연세춘추 홈페이지

모바일 홈페이지는 반응형이 아니기에 자꾸만 콘텐츠가 깨지고, 모바일의 특성에 맞는 대문 기사 편집도 되어 있지 않다. 그저 최근 뉴스만 주르륵 올라와 있는 무성의한 대문.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연세춘추, 더는 ‘응4’에 나오던 소중한 신문 아니다

그러면 그 무성의한 포맷 이면에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다이아몬드 원석 같은 기사가 숨어 있을까?

정말 가슴 아픈 말이지만, 아니다. 학업과 취재를 병행하며, 때로는 취재가 엎어져도 대체 아이템을 취재할 시간이 없어 당장 있는 기사를 ‘어떻게든’ 고쳐 내보내는 관행이 특히 깊이 뿌리박힌 연세춘추에서는 더이상 혁신적인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매 호, 매 기사, 신문의 각 면이 새로운 기사와 신선한 시각을 지녀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의 학보사는 더는 ‘응답하라 1994’에 등장하던, 연애편지를 끼워서 주던 소중한 신문이 아니다.

응답하라 1994 연세춘추
아니라고… (“응답하라 1994″(tvN, 2013) 2화 중에서)

그래서 그 모든 것이 결국 신문사를 운영하는 학생 책임이고 학보사는 조용히 사라지면 되는 걸까?

있어 봤자 신선하지 않고 새롭지 않고, 독자들의 외면까지 받으니 정말 천덕꾸러기가 맞는 걸까. 학생들이 바라는 화려하고 신선한, 자극적인 신문, 혹은 학교가 바라는 ‘팩트가 정확한’(물론 상당히 주관적인 ‘팩트’ 말이다), 학교의 얼굴이 될 만한 신문은 더는 학보사가 아닌 걸까. 그건 아닌 것 같다.

“말 잘 들어야 돈을 주지!” 

근본적인 문제는 학교가 운영에 깊숙이 관여한다는 구조적 오류다. 단순히 학보사를 학교의 치부를 드러내는 골칫덩이로만 인식하는 학교의 시각은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만든다.

“아니, 말을 잘 들어야 돈을 주지. 맨날 학교 부끄럽게 하는 기사만 1면에 뻥뻥 터뜨리는데 돈을 줘야 해? 그렇다고 본인들이 돈을 벌어서 운영비를 충당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럴 거면 그냥 없애는 게 낫겠어.”

상상이 아니다. 차마 이름을 밝힐 수 없는 학교 측 고위 관계자에게 직접 들은 말이다.

학보사가 단순한 돈 덩어리, 골칫덩어리로만 보이는 거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학보사에서는 기자들을 굴리는데 드는 비용(장학금, 취재비용 등)보다 학보사의 통제 및 감시를 위해 붙여놓은 학교 교직원과 주간, 편집인 교수들을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더하다.

‘지면’의 딜레마, 당장 지면 없애고 온라인 해? 죽으라는 소리다

또한, 정작 학보사 수입이 들어오는 곳은 인쇄비가 많이 든다며 가장 많은 비효율로 비난을 받는 지면이다. 규모의 경제로 대화하는 지면 광고 업계에서는 부수가 광고비 수주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독자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발행 부수를 줄이면 오히려 운영할 비용이 통째로 사라질 위기에 놓일 수 있다.

게다가 온라인 매체로서의 인지도도 확보하지 못한 학보사들에게 무턱대고 ‘시대의 조류’에 따르라며 온라인 전용 매체로 전환하라는 발상은 학보사가 고사하는 지름길이다.

학교 당국 견제와 열정 착취는 기본… 자연스러운 질적 하락

학보사에 대한 학교 당국의 견제는 각 대학마다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느냐만 다를 뿐,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질적 하락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20대의 패기로 기성 언론에 충격을 주는 신선한 기사를 쓰라’는 요구 따위는 기성 언론 발끝에라도 미치는 취재 환경을 마련해 주거나, 최저 임금에라도 준하는 임금을 줄 때나 하라.

그것도 저것도 아니면 학생 노동력이 받는 정당한 대가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열정 착취는 기본이고, 이에 따른 보람은 금전적으로든 혹은 그 어떤 형태로든 없고, 선, 후배 가릴 것 없이 왜 사서 고생하느냐며 끊임없이 한숨을 쉬어 대고, 취재원이라고 만나는 교직원과 학생회에게도 무시당하니, ‘능력 있는’ 혹은 ‘스마트한’ 기자들은 학보사를 종종걸음으로 떠나간다.

꾸준히 학보사를 하는 사람들은 우직하다거나 미련하다는 이야기를 쉽게 듣고는 한다. 그리고 악순환은 계속된다. 인력의 질적 저하로 인한 기사 질의 저하는 독자의 외면으로 이어지고, 팩트를 다루는 전문성에서도 취약해져 학교가 못마땅해 할 거리만 늘어난다.

학교와 상생이냐 절연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해결책은 두 가지가 있다. 학교와 상생하거나, 학교와 완전히 절연해 갈라지거나.

학보사들은, 혹은 학교는 이 둘 중 하나의 길을 얼른 선택해야 할 것이다. 학보사들에도 학교에도 상황은 점점 고약해지기만 하니까. 상생하는 길은 학보사와 학교가 서로를 위해 윈윈하는 구조를 만드는 방법이다.

상생의 모범 사례: 하버드 크림슨

대표적인 예로는 하버드 대학의 학생 신문 ‘하버드 크림슨(The Havard Crimson)’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남의 나라 이야기하기 싫지만 – 상황의 맥락이 다르니까 – 국내에서는 적당한 예를 찾을 수 없었다.)

하버드 대학
하버드 대학교 “하버드 크림슨”

이 신문사에서는 봄, 여름마다 저널리즘에 관련된 컨퍼런스를 열고, 여름에는 언론인을 꿈꾸는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아카데미도 연다.

이런 행사가 가능한 이유는 ‘하버드’라는 엄청난 이름값도 있겠지만, 동문의 참여와 도움이 큰 역할을 한다. 퓰리처 상을 받은 동문들과 역대 편집국장을 역임한 명사들의 힘으로 아카데미는 꾸려지고, 그 자체로 신문사의 훌륭한 수익원으로 기능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학교에서 일단 학보사를 ‘동반자’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교의 이름을 함께 달고 이러한 행사를 주최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상생 제안, 학보사 활동 학점 인정하면 어떨까?

다른 방안으로는 학보사 활동의 학점 인정이 있을 수 있다. 갈등과 마찰을 불러일으키는 주간-편집인 교수/ 편집국 및 데스크 학생의 구조에서 벗어나 저널리즘을 오래 연구한 교수와 학생 기자를 엮는 것이다.

인턴십을 학점으로 인정해 주는 제도와 같이, 학보사 경력 역시 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한다든가, 학생 기자들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저널리즘 핵심 트랙을 지정하는 것이다. 학보사의 질적 저하에도 가장 확실한 대처가 될 뿐만 아니라, 실무-이론 연계를 튼튼히 함으로써 언론계에 종사하는 동문을 많이 배출하거나, 혹은 저널리즘의 ‘명가’라는 명성이 학교에 돌아갈 것이다.

더럽고 치사하면 학교에 기대지 마라

이것도 저것도 싫고, 학생도 학교가 더러워서(!) 못 참겠으면 학교에 기대지 않으면 된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학내 언론이 모두의 것’이라면서 편향적인 보도도 하지 말고, 당신들 편에 붙기를 원하면서, 그 어느 것도 해 주지 않으면서, 발행인에 총장 이름, 편집인에 교수 이름 넣고 싶다는 게 말이 되나. 현재 학보사들은 편집은 학생이 도맡아 하지만, 재정 운영은 학교 교직원이 전담하는 구조다.

치사해도, 더러우면 재정 독립을 하라.
학교도 재정 독립을 그냥 시켜라.

돈에 쪼들려도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싶다면 그 길 밖엔. 한다고 해서 또 안 될 일은 뭐 있나 싶다.

이미 대부분 미국 학보사는 독립 운영구조다

대부분 미국 학보사들은 이미 독립적인 운영 구조를 마련하고 있다. 이사진(주로 동문으로 구성)이 큼직한 경영에 관한 결정은 현직 데스크와 함께하고, 취재는 저널리즘 전공 학생들이, 경영은 경영학과 학생들이, 웹 디자인은 웹 디자인 학부 학생들이 디렉터를 맡고 있다.

당장은 많은 걸 잃고 새로 시작해야겠지만, 지금과 같이 ‘자유 언론’의 기치를 들 거라면 학보사들은 학교로부터 떨어져 나가서 ‘학보사’가 아니라 ‘학생 신문’이 되는 게 맞다. 하고 싶은 소리는 다 하면서 학교가 돈을 쥐여줘야 한다는 막무가내는 이제 그만 두자.

여러 대학의 학보들
여러 대학의 학보들

징징대는 ‘학보사’ 아닌 독립한 ‘학교신문’ 하라

현실은 시궁창이 맞다. 정론직필과 기자 정신만 가지고는 학보사, 안 굴러간다. 운영의 측면을 누군가라도 고려해야 하지만, 학교도 학생도 생각하지 않았다. 정말 애매한, 학교의 홍보지도 아니고 학생의 신문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내가 다니던 학보사에는 ‘3 주체론’이라는 출처 불명의 이론이 있었다.

“학교에는 교직원, 학생 그리고 교수라는 3 주체가 있고, 연세춘추는 그 세 주체의 목소리를 고루 담는 ‘공기(共器)’가 돼야 한다!”

(누가 주창했는지는 몰라도, 학교에서 노동하는 노동자들을 쏙 빼놨단 점에서도 맘에 매우 안 든다.)

그러니까 이건, 그 애매한 위치를 잘 포장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학보사를 나오고 1년 후에서야 알았다.

학보사가 반쪽짜리 언론사 말고, 제대로 된 언론사가 되려면 갈 길이 멀다. 기성언론도 윤리고 취재의식이고 뭐고 땅바닥에 내려 놓고 회사를 막장으로 경영하는 마당에 사실 학보사에게 할 말은 없을 수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학보사가 새로운 언론의 태동으로 역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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