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포인트] 자해 진단 확률 47% 늘었다…이상 행동으로 나타나는 애도 반응 관찰해야.
자살은 전염되는가. 자살이 또래 사이에 전염병처럼 번진다는 주장은 교육 현장에서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1897년 사회학자 뒤르켐은 자살을 ‘사회적 사실’로 규정하며, 개인적 요소가 자살의 결정적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자살 전염’ 가능성 자체를 부정했다.
자살 전염을 실증적으로 입증한 연구가 등장해 주목된다. 10대 자살이 남겨진 또래에게 미치는 영향을 방대한 행정 데이터로 추적 분석한 연구다.
전염되는 자살.
- 미국 청소년 4명 중 1명은 17세가 되기 전 또래 친구의 자살을 경험한다.
- 8월 미국경제연구소(NBER) 워킹페이퍼에 실린 연구를 보면, 자살 사건 발생 학교의 학생들은 2년 내 자해 진단을 받을 확률이 약 50% 더 높게 나타났다.
- 평소 정신 건강 진단을 받은 적 있는 학생들은 학우 자살 후 자해 진단율이 42% 증가했지만, 정신 건강 진료 이력이 없는 아이들은 자해 진단율이 2배 이상(110%) 증가했을 뿐더러 중범죄로 체포되거나 사법 기관에 회부될 확률이 27% 상승했다.
- 예일대 경제학 교수 재닛 커리(Janet Currie)가 참여한 듀크·노스웨스턴대 공동 연구팀의 연구다. 커리는 보건경제학·아동경제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다. 다만, 워킹페이퍼인 만큼 정식 학술지 심사를 거쳐야 한다.
이게 왜 중요한가.
- ‘자살 전염’을 실증적으로 입증한 연구다.
- 폭행이나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은 학우의 자해 행동을 증가시키지 않는다. 자살만이 자해율을 높인다는 결론이다.
- 또래 자살이 실제 생존자의 자해와 정신 건강 악화, 사회적 비행으로 이어지는 인과적 경로를 방대한 행정 데이터로 규명했다.
- 우울증이나 자살 충동 같은 내재적 신호 말고도 범죄와 폭력, 약물 남용 같은 비행 행동(외재적 신호)이 학교 친구의 죽음에 대한 심각한 ‘애도 반응’일 수 있다. 내재적 신호만 모니터링하는 기존 보호 시스템으로는 사각지대에 놓인 학생을 놓칠 수 있다.
친구들의 자살, 대조 실험.
- 연구팀은 미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메디케이드·학교·형사사법 기록을 개인 단위로 연결했다.
- 2004~2016년 자살로 학생이 사망한 학교 30곳과 학년 구성, 지역, 규모가 비슷하지만 사망 사건이 없었던 학교들을 비교 분석했다.
- 연구진은 자살 발생 전후 24개월간 학생들의 상태 변화를 월 단위로 쪼개어 정밀 추적했다.
- 학교 친구의 자살 사건을 경험한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대조군 학생들까지 총 13만 5000여 명에 달하는 청소년 데이터를 정밀 비교했다.
자해 진단 확률 47% 늘었다.
- 학우의 자살 사건에 노출된 학생들은 사건 발생 후 2년간 자해 진단을 받을 월별 확률(월 단위 관측)이 47% 증가했다. 월 평균 자해 진단 확률이 0.06%에서 0.028%P 상승한 것.
- 좀더 쉽게 설명하면, 친구의 자살을 겪지 않은 학생 1,000명을 2년간 매달 관찰한다면, 관측 건수는 2만 4,000건(1,000명 × 24개월)이 된다. 이 경우 “이 달에 자해 진단을 받았다”고 기록이 찍힌 건수를 세어보면 대략 14건. 그러나 친구의 자살을 겪은 학생의 경우에는 약 7건이 추가로 발생해 21건으로 나타났다.
- 자살 사건에 노출된 학생의 경우 정신 건강 문제로 병원을 찾는 확률은 5% 증가했고, 한 달에 두 번 이상 병원 진료를 받을 확률은 10% 증가했다.
- 연구진이 같은 방식으로 비교 분석한 결과, 교통사고나 폭행으로 또래가 사망한 학교에서는 자해 진단의 유의미한 상승이 관찰되지 않았다. 자살은 예상치 못한 비극인 데다가 일종의 탈출구나 대안으로 모방 학습할 위험이 클 수 있다는 게 연구진의 판단이다.
상담실에서 확인 못하는 증후.
- 학교 친구의 자살을 경험한 학생들이 소년 사법 시설에 구금될 확률과 폭력 범죄로 회부될 확률도 유의미하게 증가했다.
-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서 성인 형사사법 체계로 전환되는 17세 이후의 사법 기록을 보면, 약물 관련 혐의로 인한 체포율(월별 체포율)도 늘었다.
누가 취약한가.
- 백인 남학생에게서 가장 폭넓은 반응이 나타났다. 정신 건강 진료를 받을 확률, 한 달에 여러 번 진료 받을 확률이 모두 유의미하게 높아졌다.
- 이 그룹은 어떤 범죄든 저지를 확률이 약 30%, 중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약 40% 증가했다.
- 왜? 연구진은 두 가지 가능성을 언급했다.
- 첫째, 이 연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청소년 사망자 30명 통계를 보면, 77%(23명)가 ‘남학생’이었다. 인종이 확인된 자살자(21명) 중 67%(14명)가 ‘백인’, 33%(7명)가 흑인이었다. ‘백인 남학생’이 상대적으로 영향을 더 받았을 수 있다.
- 둘째, 백인 남학생은 원래 기초 자살 위험이 높은 인구 집단이다.
정신 건강 진단 유무 차이도.
- 이전에 정신 건강 진단을 받은 적 있는 학생들이 학교 친구의 자살을 경험할 경우 자해 진단율이 42% 늘었다. 정신 건강 진료율도 이전보다 늘었는데, 정신 건강 진료 횟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고통을 소화하려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반면, 정신 건강 진단 이력이 없는 학생들은 자해 진단율이 2.1배 증가했다. 다만, 기준선(정신 건강 진단 이력이 없는 학생들이 자해 진단을 받을 확률)이 0.01%로 매우 낮다는 걸 감안해야 한다.
- 더 중요한 점은 정신 건강 진단 이력이 없는 아이들은 친구의 자살 이후로도 정신 건강 진료가 유의미하게 늘지 않았는데, 그 대신 중범죄 발생률이 27% 증가했다. 병원이 아닌 사법 기관 레이더에서 ‘이상 행동’이 포착된 셈이다.
간과했던 신호.
- 현재 학교에서는 눈에 띌 정도로 경고 신호와 애도 반응을 보이는 학생을 골라 지원하고 있다. 미 전문가들도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검사하는 것에 선을 그어왔다.
- 연구팀은 학교와 의료진이 우울감, 자살 충동 같은 전형적 신호만 찾아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약물 사용이나 공격성 등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까지 친구 자살로 인한 애도 반응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했다.
- 친구의 죽음 이후 도움이 필요했던 학생을 상담실이 아닌 사법 기관에서 확인하게 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다. 사법, 보건, 학교의 다각적 연계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