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코리아 칼럼]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해야 할 시간. 근본적 개혁 대신 프로그램식 대응에 머물면 제2의 윤석열 막을 수 없다. (윤홍식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복지국가재구조화연구센터장) (⌚7분)
이해할 수 없다. 해방 이후 힘겹게 민주주의를 쟁취했다고 믿었다. 적어도 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되돌릴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항상 위태로웠다. 급기야 대통령이 주도한 12·3 내란이라는 참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어쩌다 선진국은 여기까지?
우리가 ‘민주주의’를 쟁취했던 것인가? 산업화는 어떤가? 한국은 놀라운 성장을 거듭하며 식민 지배를 받았던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선진국이 되었다. 실질구매력 기준으로 1인당 GDP는 이미 2017년 일본을 앞섰고, 1인당 명목GDP도 2023년부터 일본을 앞섰다.
하지만 ‘여기까지’일지도 모른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20년 2.4%에서 2024년 2.0%로 불과 4년 만에 20%(0.4%p)나 낮아졌다. 한국의 산업경쟁력이 약화하면서 한국 산업은 세계 경제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OECD가 “한국은 성장모델을 전환해야 한다(Korea needs an upgraded growth model)”고 충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복지 확대도 한계를 드러냈다. GDP 대비 사회지출은 1990년 2.6%에서 2022년 14.8%로 5.7배 증가했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자살률과 가장 낮은 합계출산율을 기록했고 불평등이 대를 이어 세습되는 사회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다.
왜 산업화와 민주화, 복지 확대까지 이룬 ‘선진국’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하고, 성장 동력은 꺼져가며, 사회경제적 위기는 더 심화하고 있나? 다시 민주주의를 외친다고 우리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불의한 정권을 끌어내린 지 5년 만에 다시 그 정당의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한국 민주주의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놀라운 성공이 심각한 위기의 원인
드러내진 못하지만 ‘정권교체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라는 한탄이 들린다. 윤석열을 끌어내린들 그 다음이 뭐냐는 것이다. ‘바꿔 봐야, 다 똑같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르다. 그것도 크게 다르다. 공권력이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급기야 대통령이 내란을 일으킨 정권은 모두 보수정부였다. 남북 간에 긴장을 고조시켜 한반도를 전쟁 위기에 몰아넣은 것도 보수정부였다. 정권교체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정권교체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인지도 모르겠다. 민주화 이후 네 차례의 정권교체가 있었지만 사회경제적 위기를 심화시키는 정치·경제·사회의 근본적 토대는 변하지 않았다.
1990년대부터 자동화를 통해 숙련노동의 규모를 줄여 전체 노동비용을 낮추고 생산성과 수출 경쟁력을 높이는 생산방식 덕분에 대기업은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했고, 일부 상층 노동자의 임금 상승도 가능했다. 실제로 자동화 정도를 대표하는 우리나라 로봇 밀도(종업원 1만명당 로봇 운영 대수)는 1990년 6.1대에서 2022년 1012대로 무려 170.2배나 증가해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2022년 현대자동차는 생산량 기준으로 도요타, 폭스바겐에 이어 3위에 올랐다. 1987년부터 1994년까지 현대자동차의 임금도 무려 4배나 올랐다. 하지만 이러한 숙련노동을 축소하는 생산방식의 전환은 상대적으로 괜찮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대기업 집단의 고용 역량을 축소시켰다. 250인(또는 300인) 이상을 고용한 대규모 사업체의 고용 비중은 1993년 31.8%에서 2014년에는 12.8%로 급감했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기업 규모에 따른 생산성과 임금 격차가 예외적일 정도로 큰 나라가 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대기업 집단이 숙련을 자동화로 대체하면서 중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이직할 수 있는 사다리가 끊겼다는 점이다. 2015~2016년 기준으로 중소규모 사업체 노동자가 대규모 사업체로 이직하는 비율은 2%에 그쳤다.
이러한 전환으로 발생하는 불평등을 복지 확대로 막을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복지 확대는 실업, 질병, 노령 등 사회경제적 위험에 사후적으로 대응하는 것에 머물렀다. 그것도 부분적으로. 더욱이 민주화와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복지가 안정적 고용과 소득을 보장받는 정규직 노동자에 기반한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확대되자, 공적 복지에서도 불평등 현상이 나타났다.
정권교체가 해결하지 못한 사회경제적 위험
지금과 같이 고용관계에 기반한 사회보험을 중심으로 공적 복지가 확대된다면 복지 확대가 불평등을 완화하는 효과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추계를 해보면 현 체제를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공적 복지의 불평등 완화 효과를 OECD 평균 수준으로 높이기 위해서는 GDP 대비 사회지출을 2022년 현재 14.8%에서 33.5%까지 높여야 한다.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정치적으로는 정권교체가 네 차례나 이뤄졌지만 정권교체는 사회경제적 위험을 완화하지 못했다. 실례로 대기업 집단이 주도하는 숙련을 우회한 자동화를 통한 수출 주도 성장방식은 90년대 이후 불평등으로 대표되는 사회경제적 위기를 심화시키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이지만, 지난 30년 동안 반복되는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그 경향은 더 강화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기업 집단의 왜곡된 지배구조와 불투명한 경영, 불공정한 경쟁, 부당한 세습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대기업 집단의 개혁을 주장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집권 기간에도 대기업 집단 중심의 생산방식은 더 강화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재벌개혁이야말로 소수 재벌만이 아니라 중소기업과 골목상권, 가계 등이 함께 성장하고, 국민 성장을 이루는 새로운 성장 동력”이라고 진단했지만 불행히도 집권 이후 대기업 집단의 경제력 집중은 더 강화되었다.

민주당 정부에 참여했던 일부 인사들은 재벌개혁과 복지 확대와 같은 성과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 성과를 인정한다고 해도 양적 변화에 그쳤다. 생산과 분배 구조의 질적 변화를 유발했다고 할 수 없다. 결국 선거는 매번 엄청난 기대를 동반했지만 예외없이 엄청난 실망으로 귀결되었다. 부분적인 제도 변화와 공적 복지의 양적 확대를 제외하면 그 어떤 정권교체도 사회경제적 위험을 만들어내는 생산방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성취했다고 믿었던 산업화와 민주화가 우리를 덫에 빠뜨렸다. 무능하고 불의한 정권은 무기력한 정권으로, 무기력한 정권은 다시 무능하고 불의한 정권으로 교체되었다. 우리가 지난 40년간 반복했던 일이다. 그러자 한국은 일본과 이탈리아처럼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다. 결국 정권교체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면서 윤석열 정부라는 극우 정권이 탄생했고 우리가 성취했다고 믿었던 민주주의는 12·3 내란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을 탄핵해 새 정부가 들어서면 윤석열 정부가 유린했던 민주적 절차와 권리는 복원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구조적 위험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이번에도 2016~2017년 시민항쟁 이후 집권했던 문재인 정부처럼 사회경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고 또다시 프로그램식 대응에 머문다면 우리는 또 다른 윤석열의 출현을 목도할지도 모른다.

1. 권력구조 개혁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권력구조의 개혁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 전에 무엇을 위해 권력구조를 개혁할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권력구조는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분권화되고, 견제가 가능한 권력구조인 동시에 한국 사회가 직면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효과적으로 개혁해 나갈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갖는 권력구조여야 한다.
모순적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본래부터 모순적인 제도였다. 강력한 분권과 견제는 정부의 권력 남용을 막고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지만, 국민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정부의 역량 또한 제약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민주주의는 평등을 지향하지만, 우리가 사적 소유에 기반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는 한 민주주의가 자동적으로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더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 큰 틀의 비전과 전략 마련
다음은 큰 틀에서 한국 사회의 비전과 전략을 함께 마련해야 한다. 물론 완벽한 비전과 전략을 마련할 수는 없다. 비전과 전략은 항상 잠정적인 지위를 가져야 한다. ‘잠정적 비전과 전략’은 권력구조, 디지털 기술변화, 인구구조의 변화, 세계화의 재편, 기후위기 등 국내외 조건의 변화에 따라 계속 수정·보완해야 한다. ‘잠정적 비전과 전략’은 우리가 소망하는 미래를 만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현재와 미래 사이에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사회경제적 위기를 만들어내는 생산과 (재)분배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중장기적 이행 방안을 담아야 한다.
생산방식은 1990년대 이후 지속된 ‘대기업 집단이 숙련노동을 우회하는 자동화 방식으로 노동비용을 줄여 제조업의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수출 주도 생산방식’이 아니라, 대기업과 중소기업, 숙련과 자동화, 수출과 내수, 제조업과 첨단 산업 및 서비스산업이 균형을 이루는 생산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 출발은 양질의 사회서비스를 보편적으로 확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운 세계에서 국민국가의 권한이 제한적인 환율, 이자율 등 거시정책으로 생산방식을 전환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양질의 사회서비스의 보편적 확대는 그에 준하는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켜 기업이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첨단 (서비스)산업으로 전환을 촉진하고, 첨단 (서비스)산업에 필요한 양질의 노동력을 확대하는 ‘선한 제도적 제약’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전환을 통해 우리는 양질의 일자리를 늘려 불평등과 경쟁을 완화하는 동시에 지속 가능한 생산과 분배 체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해야 할 시간
다시 민주주의를 생각해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평등하지 않으며, 그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태생적으로 불안정한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매 순간 민주주의의 불안정성을 의식하고 균형을 잡으려는 목적 의식적인 선택과 결정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 순간 민주주의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고, 그 가능성의 한계 내에서 우리가 소망하는 미래를 꾸준히 만들어가야 한다. 그 과정은 어제까지는 할 수 없었던 것이 오늘은 할 수 있는 일이 되고, 오늘은 할 수 없던 것이 미래는 할 수 있는 일이 되는 과정이다. 또 다른 윤석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이번 탄핵은 정권교체를 넘어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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