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갈등의 뿌리는 무엇인가. 임명묵은 이스라엘이 딜레마에 빠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우디와 이란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정리하던 즈음 시리아 아사드 정권이 붕괴했다. 거대한 돌출 변수다. 하나씩 찬찬히 살펴보자.

임명묵의 ‘명묵적 지수’ [ep. 02]

이스라엘-하마스 분쟁 지도:
이란, 사우디 그리고 시리아 변수까지

질문 정리: 민노

알림 안내

이 글은 2024년 11월 27일(수)에 진행한 인터뷰를 정리한 것입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질문은 소제목이나 본문에 맥락화했고, 본문은 임명묵 님의 답변을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최종 정리 과정에서 내용 확인 및 협의와 퇴고 과정을 거쳤습니다. (편집자)

먼저

0. 하마스와 가자 지구

  • 하마스(아랍어: حماس, Hamas, 뜻은 ‘이슬람 저항 운동’)는 팔레스타인의 수니파 이슬람주의 및 민족주의 정당이자 준군사조직이다. 제1차 인티파다가 일어난 1987년에 창설했다.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무장 투쟁을 주도한다.
  •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이스라엘과의 평화 공존책(2국론, 2편 참고)을 지지하던 종래 집권여당 파타(아랍어: فتح, 영어: Fatah)를 누르고 승리했다.
  • 그 후 파타와 권력 분쟁 끝에 파타는 서안 지구, 하마스는 가자 지구를 통치한다.
  • 가자 지구(아랍어: قطاع غزة, Gaza Strip)는 1948년 제1차 중동 전쟁(팔레스타인 전쟁) 이후 ’67년까지는 이집트가 군사적으로 통치했다.
  • ’67년 제3자 중동 전쟁(6일 전쟁) 이후 ’94년까지는 이스라엘군이 통치했다.
  • ’93년 오슬로 협정의 결과로 ‘94년부터 통치권을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에 이양했다.
  • 2006년 총선에서 승리한 하마스가 같은 해 6월부터 기존 집권여당 파티당과 유혈 내전을 시작하면서 가자 지구를 차지했고, 파티당이 지배하는 서안 지구와는 정치적 경쟁 관계다.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에 세운 분리장벽 아래를 걷고 있는 팔레스타인 소녀 (출처: Rain Rannu, “Wall between Israel & Palestine”, CC BY, 2008. 3. 11.)

1. 아랍과 중동과 차이

  • 아랍과 중동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 아랍(Arab)언어적이고 민족적 개념이다. 이들은 아랍어(꾸란 아랍어를 표준으로 쓴다)를 국어로 사용하고 이슬람을 국교로 정한 나라로 ‘아랍 연맹’ 회원국을 기준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집트 등 포함해 22개국이다.
  • 중동(Middle East)지역적 개념으로 동지중해부터 아라비아만 일대 지역을 가르킨다. 중동 지역은 대체로 이란에서 이집트까지를 포함하고, 좁게 보면 이란, 이라크, 이집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을 포함한다. 넓게 보면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 오만과 예멘을 포함한다. 시각에 따라서는 모로코, 리비아, 알제리까지 중동 지역으로 편입하기도 한다.
  • 중동이지만 아랍이 아니다. 이란(페르시아어=이란어), 튀르키예(튀르키예어), 이스라엘(히브리어와 아랍어 공용)은 아랍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상 편집자)

2. ’67년 이스라엘의 가자 서안 점령은 마치 ‘아파르트헤이트’와 같다

유서 깊은 유럽의 극악한 반유대주의에 대응해서 등장한 시온주의 운동은 정착민 식민주의 기획인 동시에 민족주의 기획이었습니다. (한국어판 서문)

팔레스타인 식민화도 – 남아프리카나 오스트레일리아, 알제리, 그리고 동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식민화와 마찬가지로- 유럽 백인의 정착 식민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커즌의 언어와 헤르츨의 편지에서 공히 드러나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특유의 어조는 오늘날에도 미국과 유럽,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을 놓고 이루어지는 많은 담론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된다.

라시드 할리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2021.

임명묵: 그렇게 볼 여지가 다분하다.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에 비판적인 입장은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 건국 자체가 잘못이라는 시각이다.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1967년 6월5일 아랍-이스라엘 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의 군사적 승리로 점령한 영토(서안, 가자, 골란고원)에는 정당성이 없다는 관점이다.

특히 두 번째 비판이 문제다. 이스라엘은 1967년 중동 전쟁에서 무력으로 점령해 확대한 영토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의 민족적 자결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팔레스타인 민족 성립을 일관해서 부정한다는 점에서, 남아공화국이 흑인의 기본적인 인권조차 부정하고 차별 정책을 원칙으로 삼은 흑백인종분리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국가 = 아파르트헤이트’ 푯말을 든 소년.
1988년 7월 11일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시위. CC0.

3. 두 번의 인티파다

인티파다(intifada)는 반란, 봉기를 뜻하는 ‘반이스라엘 저항운동’이다.

1차 인티파다: ’87~’91. ‘착한 다윗’ 이스라엘의 환상이 깨지다

서안 지구, 가자 지구, 이스라엘 안에서 전개했다. 아랍의 각성과 이-팔 문제에 관한 국제적인 관심을 이끌었으며, 이스라엘은 ‘다윗’ 아랍은 ‘골리앗’이라는 기존 사고방식을 탱크로 시민을 진압하는 잔인한 이스라엘 vs. 거기에 대항해 돌멩이를 던지는 팔레스타인 시민이라는 정반대 이미지로 역전시킨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스라엘의 ‘서안 및 가지 지구 점령’에 대한 반발로 1987년 12월부터 1991년 10월말 마드리드 회의(미국, 소련, 스페인이 주최한 이-팔 평화 중재 회의) 개최 시점까지 진행됐다. 일부에선 종료 시점을 1993년 오슬로 협정 합의로 보기도 한다. (이상 편집자)

‘골리앗’ 이스라엘에 돌멩이를 던지는 팔레스타인 ‘다윗’ 파리스 오데(Faris Odeh. 1985년 12월 3일~2000년 11월 8일). 2000년 10월 29일, 제2차 인티파다 당시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탱크에 돌을 던지는 소년 오데의 사진. 2000년 11월, 14살 소년 오데는 카르니 교차로 근처에서 이스라엘 군에게 돌을 던지던 중 이스라엘 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2차 인티파타 초기에 일어난 사건(사진)이지만, 1차 인티파다에 더 가까운 상징적 이미지.
2차 인티파다: ’00~’05. 아랍 테러리스트 자살 테러 이미지 각인되다

2000년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의 실패가 그 원인으로 지목된다. 특히 2000년 9월 샤론이 성전산 알 아크샤 모스크에 도발적으로 방문한 후 폭력 사건이 급증했고, 이스라엘 경찰의 고무탄과 최루탄 진압으로 시위와 폭동은 확산했다. 전투원은 물론이고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초래했다.

이스라엘군은 총격전, 표적 살해, 탱크 공격과 공습 등 무차별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고, 팔레스타인은 총격전, 자살 폭탄 테러, 투석, 로켓 공격으로 여기에 저항했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웠던 1차 인티파다의 이미지는 사라지고, 극렬한 아랍의 극단적인 ‘자살 테러’ 이미지가 전 세계에 각인됐다. (이상 편집자)

4. 오슬로 협정(1993)

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사이의 이뤄진 협정. 팔레스아인 입장에선 매우 불평등한 협정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결코 만족할 수 없는 협정이었다. 그런 불만과 모순의 인위적 ‘땜빵’ 같은 협정은 평화를 이뤄내진 못했다. 협상 당사자인 PLO 의장 아라파트는 자신의 별장에서 아무도 찾지 않는 병든 노인으로 쓸쓸하게 역사에서 퇴장했고,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그보다 더 비극적으로, 이스라엘 극우파에 의해 암살당했다(’95년 11월).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런 합의를 ‘팔레스타인을 굴복시키는 도구, 다른 말로 하면 팔레스타인의 베르사유 조약’이라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나는 워싱턴과 오슬로에서 이스라엘의 껍데기뿐인 제안을 마땅히 거부했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이런 강경한 자세를 취했더라면, 1993년 이래 팔레스타인인들이 땅과 자원, 이동의 자유를 빼앗긴 것보다 더 나쁜 결과가 나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아예 합의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슬로에서 나온 합의보다는 더 나았을 것이다. 어쨌든 점령은 계속되었을 테지만, 팔레스타인의 자치라는 포장이 없고, 이스라엘이 수백만 명을 통치하고 관리하는 재정적 부담을 더는 일이 없으며, 이스라엘 식민 정착민들이 점점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군사 정권 아래 사는 불만에 찬 팔레스타인을 단속하는 데 팔레스타인 자치 당국이 이스라엘을 돕는 ‘안보협력'(오슬로가 낳은 최악의 결과다) 같은 건 없었을 것이다.

라시드 할리디, [팔레스타인 100년 전쟁], 2021.

’96년 이스라엘 총선에서는 극우 강경파인 네타냐후가 총리로 당선됐고, 아라파트로 대표되는 PLO의 ‘순진한’ 발상에 하마스가 권력화하는 빌미가 됐다. (이상 편집자)

빛 바랜 역사적 순간… 라빈, 클린턴, 아라파트. 1993년 9월 13일 백악관. CC0.

5: 하마스와 친한 나라, 안 친한 나라, 간 보는 나라

임명묵: 하마스와 친한 정치 집단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1. 이란
  2. 시리아
  3. 헤즈볼라(레바논)
  4. 후티(예멘)
  5. 이라크 내 친이란 민병대.

이렇게 한 그룹이다. 이 그룹에서 대장은 이란이다. 부시가 “악의 축”이라고 하자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저항의 축”으로 자칭한다. 헤즈볼라나 후티는 ‘나라 안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각자 중앙 정부와 별개로 자기들이 통치하는 지역과 무장조직이 있다. 헤즈볼라의 경우, 우리나라로 치면 충남당이 등장해서 민병대를 갖추고, 여의도 의회에도 참여하는데, 그걸 중앙 정부에선 반란으로 보지 않고 자치권을 인정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후티의 경우, 예멘 내전 과정에 등장해서 북서부 자이드파가 거주하는 산악 지역에 자체적인 통치 공간을 구축했다.

하마스와 친하지 않은 국가들. 팔레스타인인의 피해 등은 공감하지만,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하마스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들이 있다.

  1. 사우디
  2. 이집트
  3. 아랍에미리트
  4. 요르단 (관망에 가깝긴 하다)

그 중간에 이스라엘과 친하지만 하마스를 지지하는 입장(이중적 입장)을 취하는 나라들이 있다.

  1. 튀르키예
  2. 카타르.

이들은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 안보 협력 관계를 고려해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지만, 하마스에 관해선 심정적 지지를 보내는 이중적 입장을 취한다. 카타르는 심정적 지지를 넘어서 하마스를 지원하기도 한다. 하마스 지도자들이 카타르 좋은 호텔에 머물기도 하고 그런다.

이제부터 본론

잘 싸우는 이스라엘? 그렇지 않다

얼핏 보면 이스라엘이 굉장히 잘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크지만, 어쨌든 전쟁 수행은 꽤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팔레스타인 군인과 민간인 피해와 비교하면 이스라엘 쪽 피해가 적은 것도 맞다. 2024년 8월 9일까지를 기준으로 보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4만 1천 명이 사망했고, 그중 팔레스타인인 약 3만 9000명, 이스라엘인 약 1470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스라엘은 수세에 처했다고 봐야 한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자신이 세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이스라엘이 원하는 건 두 가지다. 우선, 팔레스타인 정부가 UN에서 정식 국가로 인정되는 걸 막는 것. 나머지 하나는 서안과 가자의 실효적 지배 상태에 더해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는 것. 그 두 가지 모두 확정적으로 불가능해졌다. 팔레스타인인을 모두 ‘청소’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미국이 아무리 이스라엘의 편을 들어도 ‘인종 청소’를 용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 나자르 병원에 치료받는 아버지, 숨진 아이, 임시로 안치된 시신들.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폭격으로 전쟁이 시작(2023년 10월 7일) 이후 2024년 8월 기준 3만90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했고, 수천 명이 잔해 속에 남아 있다. UN OCHA(인도주의 업무 조정국)에 따르면 가자 지구 인구의 90% 이상이 다시 난민이 되어 떠났다. 이들 대부분은 1948년 팔레스타인 난민이었다. 사진은 각각 2023년 12월 19일 모습, 12월 21일 모습, 12월 14일 모습. 사진은 MohammedZaanun. @m.z.gaza.
거의 다 갔는데…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를 철저히 봉쇄하고 서안지역에서는 자치 틀만 만들어 놓고 실효적 점령에 의해 통제했다. 그리고 이런 실질적이고 실효적인 통제와 장악을 아랍 대다수 나라들이 인정하기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위태로워졌다. 하마스가 살아 있는 한 이스라엘의 안전은 누구에게도 보장받을 수 없다.

가자 지구 침공으로 모든 게 바뀌었다. 아랍 국가 입장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다 돌아섰다. 아랍 국가들은 사실상 팔레스타인에 이중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팔레스타인은 팔레스타인이고 우리는 우리 살길을 찾아야지!

그게 아랍의 두 얼굴이었다. 그랬던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야만적인 공격으로 인해 더는 그런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가면을 쓰고 있기 어려워졌다. 이스라엘의 이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행태가 미디어에 노출된 마당에 그런 이스라엘을 인정하기는 도저히 불가능해진 거다.

낮엔 동사무소 직원, 밤엔 하마스 전사

가자 지구 인구가 200만 명이다. 그중에서 무려 4만 명 전사했다. 하마스는 가자 지구를 통치하는 조직이다. 200만 명이라고 했지만, 그들 중 거의 대다수가 하마스와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한다. 단순하게 하마스의 열혈 지지자나 군인을 떠올리기 쉬운데, 낮에는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직원도 밤에는 하마스 전사이기도 하다. 이들이 다 죽이지 않는 한 하마스를 뿌리 뽑는 건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가자 지구를 점령하면 제3차 ‘인티파다’를 각오해야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하마스 공격을 걱정해야 한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졌다.

이스라엘은 ‘스타트업’이 경제를 책임지는 국가다. 외국과의 연결과 네트워크가 그만큼 중요하다. 성지를 품은 나라로서 관광국으로의 위상도 전쟁 중에는 추락할 수밖에 없다. 안팎으로 어려움이 가중하는 상황이다. 가자 지구에서 군사적으로 해결할 수도 없고,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으며, 국제 사회의 비난이 커진다.

이런 상황에서 헤즈볼라(레바논)까지 전선이 확대된 상태다. 물론 오늘(2024.11.27.) 헤즈볼라에 휴전안을 제시하긴 했지만, 인터뷰를 1차 퇴고하는 현재(2024.12.3.) 시점으로 보면, ‘60일 휴전’ 협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모사드가 아무리 기상천외한 작전을 펼쳐도, 국제 사회의 비난을 무마하기 어렵고, 가자 지구와 서안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에 관한 국제사회의 인정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어렵다.

가자 중심부 누세이라트 캠프에서 이스라엘 공습으로 사망한 아이를 안고 있는 한 팔레스타인 아버지. 2023년 11월 18일 모습. 사진은 모하메드 자눈 @m.z.gaza
하마스와 이스라엘에 관한 ‘낭만적’ 시각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하마스가 ‘선빵’을 날렸는데 뭐가 어떻게 불쌍하다는 이유로 지지하냐고 한다. 그건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봉쇄 정책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가자 지구의 급진화와 하마스 지지를 끌어낸 게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 가만히 있었는데 하마스가 괜히 전쟁 일으킨 게 아니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팔레스타인의 저항을 낭만화하는 측면이 있는데, 하마스는 이슬람의 율법을 일상생활에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강경한 이슬람 근본주의적 성향이 있다는 점은 인식해야 한다. 진보주의자는 이 점에서 성평등, 성소수자 권익 등에 관해서는 고려할 여지가 있다. 당연히 이런 가치는 이스라엘에서 훨씬 더 존중되고 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비해서는 상대적 약자에 속한다는 이유로 하마스의 사회 문화 정책에 대해 좀 뭉개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이스라엘의 잔인한 군사 작전과 하마스가 내거는 민족 해방의 대의를 고려했을 때, 그 점을 굳이 비판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하마스가 약자라서 모든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건 또 아니다. 특히 전쟁 이후를 생각하면 그렇다.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 봉쇄를 푼다고 가정했을 때 이들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땅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때 문화적 갈등을 어떻게 조율할 수 있을 것이냐는 문제가 남는다. 그것도 생각해 보면 좋겠다.

당연히 이스라엘이 구조적으로 이 갈등과 사달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야만적인 봉쇄를 영원히 지속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과 세속주의자들 그리고 유대교 신자들의 공존이 필요하다. 물론 지금으로선 요원해 보이는 이상이지만, 어쨌든 세계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인 것도 맞다. 그런데 ‘전쟁 이후’를 고민하는 노력은 거의 전무해 보인다.

‘주적’ 이란 끌어들이기: 사태 키우는 네타냐후

이제 이스라엘의 목적은 확정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히려 네타냐후는 사태를 키우려고 한다! 사태를 키우면 해결할 수 있느냐고? 그건 아니겠지만, 일단 이스라엘은 이란을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단계적으로, 이란이 하마스와 헤즈볼라 무기를 지원했으므로 우선은 이란을 제압해야만 그다음 목표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치적 부담을 가진 미국이지만, 이란으로까지 전쟁이 확산하면, 미국 역시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훨씬 더 중요한 포인트이긴 하다. 네타냐후 입장에서는 트럼프의 대(對)이란 정책이 강경하니 거기에 기대면서 전선을 확대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란(+레바논) vs. 이스라엘 그리고 암살된 하마스 지도자들

이스라엘과 이란의 제한적인 충돌이 계속 있었다. 올해(2024) 4월, 내가 이란에 있을 때 시리아 주재 이란 대사관을 이스라엘군이 공격해 무관들을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 대사관은 해당 수교국의 ‘영토의 일부’라는 점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은 이란을 직접 공격한 것과 다름없는데, 이스라엘은 시리아에 있는 이란 혁명수비대가 가자 지구를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더불어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이란이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오랜 기간 지원해 온 것도 사실이긴 하다.

현재 이란은 이스라엘의 의도에 말려들 수도 없고, 보복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후의 흐름을 짚어보면 이렇다.

이스라엘은 지난 7월 31일 이란 테헤란에서 하마스 최고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또는 ‘하니야’)를 암살했다. 하니예는 이란 대통령 취임식 참석 이후 테헤란 숙소에서 미사일 공격을 받았다. 알리 하메네이(이란 최고 지도자)는 하니예 피살 직후 보복 공격을 선언했고, “하니예를 위한 복수는 우리의 의무”라고 말할 정도로 격앙된 반응을 공식적으로 표출했다.

하니예의 뒤를 이어 하마스 최고 지도자 자리를 넘겨받은 야히야 신와르도 이스라엘군에 의해 가자 지구 라하프에서 10월 16일 사살당했다. 7월 말 이스마일 하니예가 죽었으니 3개월도 버티지 못한 셈이다. 거기에 더해 10월에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으로 30년간 추적한 하마스 육군의 전설적인 지도자 모하메드 데이프(일명 ‘엘 데이프’)를 암살했다.

헤즈볼라(레바논)와의 갈등도 전면전 양상이다. 네타냐후 집에 드론 폭탄이 떨어졌고,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다음 날 이스라엘은 보복 공격으로 레바논에 100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했다.

모사드가 30년을 추적해 암살한 하마스의 전설적인 군사 지도자 모하메드 데이프(Mohammed Deif, 1965년생). 왼쪽은 날짜와 출처를 알 수 없는 비교적 최근 생전 모습, 오른쪽은 젊은 시절 모습.
‘돌아이’ 네타냐후? 수정 시온주의와 정치적 역학

우리가 보기에 네타냐후는 ‘돌아이’다.

  • 잘사는 이스라엘을 전쟁에 끌어들이고
  • 전쟁 전부터 사법부 권한을 약화해 독재를 영구화하려 시도하고
  • 이런 행태에 당연히 이스라엘 국민은 저항하며
  • 당연히 따라붙는 사법 리스크까지.
  • 이스라엘 국민들은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하는데! 네타냐후가 전쟁을 무리하게 하는 거 아니야?

대략 이런 시각으로 이스라엘을 본다. 일부 진실이겠지만, 상당히 오류가 포함된 시각이다. 네타냐후는 윤석열 같은 인기 없는 정부가 아니다. 국민들로부터 50% 이상 지지를 꾸준히 받는 정부다.

이스라엘 건국 직후에는 좌파 민족주의가 집권했다. 유대교 원칙주의를 강조하기보다는 세속주의 경향이 강했던 정치세력이었다. 아무튼 이 사람들이 건국 직후 30년간 통치했다. 그러다가 1977년 당선된 이스라엘 우파가 득세하면서 주류화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들의 입장은 ‘수정 시온주의’라고 할 수 있다. 유대교의 정치적 역할이 중요한 집단이다.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의 땅’, 히브리어: אֶרֶץ יִשְׂרָאֵל, ʼÉreṣ Yiśrāʼēl, Eretz Yisrael, The Land of Israel)이라는 유대인의 역사적 국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사상이 매우 강하다.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 국제법적으로 팔레스타인 영토인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를 확보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 특히 이스라엘의 실효적 지배 상태를 거의 눈앞에 뒀던 ‘서안 정착촌’은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문제다.

한편, 이스라엘은 의원내각제인데, 양당제 성격이 강했다가 20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소규모 정당이 난립했다. 소규모 정치집단의 합종연횡이 활발하다. 그런 맥락에서 소수파는 강경한 입장이 많고, 네타냐후의 리쿠드당도 이들과 보조를 맞추려면 더 강경한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없다. 강경파 소수정당의 요구를 듣지 않으면 연정이 바로 붕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네타냐후 자신은, 우리가 얼핏 보는 것과는 다르게, 이념적 성향이 강하지 않은 정치인이다. 그렇게 보였다면, 소수파와 연합 정치세력을 구성해야 하는 네타냐후의 ‘정치적 제스처’ 측면이 강하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국민 절반쯤은 ‘저 땅'(최소한 서안, 그리고 어쩌면 가자)을 포기할 수 없다.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년(2023) 10월 7일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이스라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무슬림이 여러 차례 충돌하는 사건이 있었다. 성전산(알 아크사; الأقصى)은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있는 언덕인데, 유대인으로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성지고, 모슬림도 마찬가지다. 과거 예루살렘 성전 터이자 여기 ‘통곡의 벽’, ‘알 아크사 모스크’, ‘바위의 돔’이 있다.

성전산(Temple Mount) 일대 항공 촬영 모습. 사진에 보이는 황금색 돔이 바위의 돔이고 그 아래쪽에 있는 회색 돔 건물이 알 아크사 모스크다. 둘다 이슬람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지다. 위키미디어 공용.
이스라엘의 영토을 향한 집착

이스라엘은 왜 이렇게 영토에 집착했는가. 좌파적이고 진보적인 이스라엘 건국 세력인 노동 시온주의자들은 30년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러나 이들조차 서안과 가자에 대한 점령을 긍정적으로 봤다. 역사적 맥락을 통해 보면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준 충격이 유대인의 트라우마와 공포를 구조화했을 것으로 본다.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설립하고 유대인 이민이 시작되었을 때, 토지와 도시 경제 문제를 둘러싸고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간의 갈등이 극심했다. 양측 무장 집단은 영국의 자제 요구를 따르지 않고 계속 충돌했다. 아랍인들은 이를 제국주의와 식민지 통치의 연장으로 여겨 분개했다. 유대인들은 아랍인의 공격을 그들이 오랜 세월 겪어온 유럽 반유대주의의 연장으로 보았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시작된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느낀 공포도 감안해야 한다. 신생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인정할 수 없다며 연합군을 결성해 전쟁에 나섰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동유럽 반유대주의를 생생히 기억하는 유대인들은 여기에서 패배하면 ‘두 번째 홀로코스트’라는 공포로 똘똘 뭉쳤다.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경상도보다 작은 국토 크기가 아랍 국가들에 포위되어 있어 방어에 불리하다는 인식으로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중동 전쟁이 네 차례나 있었는데, 아랍 세력이 먼저 군사 작전을 감행하기 전에 선제공격으로 이스라엘군이 주도권을 가져와야 한다는 공격적이고 도발적인 군사 전략도 발전시켰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치적으로 늘 비타협적인 입장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아랍권에서도 1970년대 이후 차차 이스라엘을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시작됐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1979년 이스라엘과 수교한 이집트가 최초였다. 이때 모든 아랍 국가들이 이집트를 비난했지만, 세월이 지나며 많은 국가들이 이집트의 뒤를 따르며 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존재라는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주적은 ‘이란’

하지만 1980년대 이란(이란은 ‘아랍’이 아니다)이 등장하면서 그런 분위기에 균열이 일어났다. 특히 2010년대에 이란이 중동에서 세력을 전방위적으로 확장하고, 이스라엘을 향한 포위망을 구축하면서 다시 한번 이스라엘은 생존에 관한 공포, 안보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됐고, 그 이후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주적은 이란으로 봐야 한다.

그런데 이란은 이스라엘과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고, 규모도 이스라엘의 10배 이상 된다. 그래서 멀리서 하마스, 헤즈볼라 등을 지원하며 이스라엘을 소모시키는 이란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어렵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목표는 하마스와 헤즈볼라 등을 지원하는 이란을 단절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이란의 세력 확장을 막아야 하는 목표가 있고, 거기에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란의 집권세력이 붕괴하면 더 좋은 거고. 이란 집권세력은 매우 친팔레스타인 정책을 펼치고, 반이스라엘 무장 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왜? 국가 이데올로기상 그럴 수밖에 없다. 과거 이란은 대표적인 친미 왕정 국가이자, 이스라엘을 최초로 인정한 주요 중동 국가 중 하나였다. 하지만 1953년에 석유 국유화를 시도한 민족주의 정부를 미국과 영국이 쿠데타로 전복시키면서, 이란 사회는 반제국주의 정서에 공감하며 급진화되기 시작했다.

1953년 이란 쿠데타. 이 쿠데타는 모사덱 정부를 전복한 미국 CIA의 ‘작전'(아작스)이었다. 사진은 쿠데타 지지자들의 자축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이란 혁명(1979), 호메이니의 사진을 든 시위대.

이후 팔레비 왕정의 실정이 거듭된 결과 1979년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다. 그 결과 이슬람의 원칙을 가장 잘 해석하고 국민을 인도할 수 있는 고위 성직자들이 나라를 규율하는 체제,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런데 이 체제는 혁명으로 수립되었기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보수적 전통주의와는 다른 급진성이 있다. 이란의 혁명 이념은 냉전 시대 세계 각지의 반제국주의 사상과 시아파 교리를 결합하며 탄생했다. 반제국주의도, 시아파 교리도 권력을 쥔 압제자들과 억압받는 이들(모스타자핀)로 나누어 세계를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호메이니나 알리 샤리아티와 같은 이란 혁명의 사상가들은 팔레비 왕정과 자본가, 귀족,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는 미국과 영국 등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피억압자의 봉기를 촉구했다.

이 혁명 이념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란이 왜 이렇게 자국과 관련도 없어 보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열심인지도 알 수 없다. 팔레스타인은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화’라는 관점에서 냉전시대 반제국주의의 상징이었다. 동시에 무슬림에게는 선지자 무함마드가 승천하여 선지자들과 알라를 만나고 온 성지가 있는 땅이기도 하다.

호메이니는 세계 제국주의의 수장인 미국을 대사탄으로, 미국이 비호하여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소사탄으로 규정하고, 억압받는 이들이 제국주의 사탄들을 향하여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팔레스타인 해방을 정권의 대의로 강조하는 이란은 헤즈볼라와 하마스 등 이스라엘과 투쟁하는 조직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대내외적 위상을 높였다. 체제 정체성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문제만큼은 타협이 없는 강경한 태도를 계속 견지한다.

세 가지 해법

크게 세 가지다.

1안. 일국론

진보주의적 지식인 주장. 서안+가자+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어서,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이 함께 공존하며 문화적 자치를 누리는 일종의 연방국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다. 그러나 각 집단 간 쌓인 증오의 골이 너무 깊어서 현재로서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2안. 이국론

2 국가론이고 국제 사회가 지지한다. 오슬로 원칙에 따라 팔레스타인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고, 각자 따로 살아라! 가장 현실적인 안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안을 받기 어렵다. 앞서도 말했지만, 정착촌 철거는 너무너무 어렵다. 이들이 유권자 집단으로서 표를 행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본토에서 네타냐후의 리쿠드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도 서안 지구의 정착촌의 존재는 민족, 종교적 명령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는 국가가 나뉜다고 하더라도 서안이나 가자에서 사는 팔레스타인인도 경제적으로는 먹고살려면 이스라엘에서 일해야 하는데, 이 둘이 섞여 살 때 어떻게 안정을 만들어내느냐는 문제가 있다.

이스라엘은 유대인 국가라는 정체성이 있는데, 팔레스타인인은 아랍 정체성으로 계속 이스라엘에서 일하려 하고… 경제적으로 통합하면, 인구 구조상 이스라엘의 유대인 정체성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고, 이걸 이스라엘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불어 하마스 같은 무장투쟁 세력은 오슬로 협정을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다. 이스라엘의 건국 자체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본다. 따라서 이들은 존재만으로 이스라엘 안보에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하마스가 가자 지구를 계속 통치하고,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를 봉쇄하는 한 이런 불안정 상태를 이스라엘이나 하마스나 인정하면서 ‘각자 따로 평화롭게 잘먹고 잘사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나마 세 가지 해법 중에선 가장 현실적이고, 사실상 유일한 해법이다.

3안. 삼국론

3국가론. 팔레스타인을 인정하지 말고, 가자는 이집트에 넘기고, 서안은 요르단에 넘기자는 안. ’60년대까지는 현실적인 안으로 주장되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인구가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추고, 정치적으로 매우 잘 조직된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이집트와 요르단은 팔레스타인 인구를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요르단은 당시 정치적 불안정 상태에서 왕정을 위협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쫓아냈다.

아라파트가 지도하는 PLO 강경 투쟁 노선이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 입장에서는 가자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인 200만 명이 이집트로 유입되는 것은 국가 붕괴로도 이어질 수 있는 끔찍한 미래다.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이집트는 가뜩이나 1억을 돌파한 인구가 계속 늘어서 고민인데, 가자 지구 인구를 떠안을 수 없다. 게다가 가자 지구 인구는 현재 이집트를 통치하는 세속주의 군부 독재와 철천지원수 지간인 이슬람주의 성향이 강하다(하마스 자체가 이집트의 이슬람주의 조직 무슬림 형제단의 가자 지구 지부).

이스라엘 주변국. 위키미디어 공용.
+ 우리나라 입장?

우리나라와 팔레스타인은 ‘미수교’ 상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이 1989년 독립을 선언한 이래로 한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합법적 대표 기구로 인정한 상태다.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격화하는 와중에, 그동안은 UN에서 팔레스타인 관련 결의안에 기권표만 던지다가, 2024년 5월 10일 유엔 총회 결의안, 즉 ‘안전보장이사회는 레스타인 유엔 회원국 가입을 긍정적으로 재고하라’는 권고를 담은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무려 ‘미국 형님’이 반대하는 안건임에도 불구하고!

물론 팔레스타인은 아직 유엔 회원국이 아니고, 옵저버 상태에 머물고 있긴 하다. 무엇보다 미국이 팔레스타인의 유엔 가입에 반대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만 안 된다고 밀어붙이는 분위기가 조금씩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들 대부분이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는 분위기로 바뀌는 상태다.

유엔 총회 모습. 위키미디어 공용.

전망: 캐스팅 보트 사우디 vs. 이란의 세력 확장

중동 현대사를 보는 기본 구도
  • 냉전 이후 중동의 중요성이 커졌다. 소련의 등장과 석유. 이 두 가지가 특히 핵심이다.
  • 냉전 시대 아랍에서 보수적인 친미 왕정과 아랍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민족주의 공화정의 대립이 시작됐다. 그런데 이 지역은 세계 경제의 연료인 석유를 공급한다는 점에서 세계 제국인 미국에 매우 중요하다. 즉, 소련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화하는 혁명이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를 넘어서 다른 아랍 국가들로 연이어 일어나면 미국으로선 매우 골치 아파지는 거다.
  • 이에 미국은 중동에 두 그룹의 국가를 우방국으로 삼았다. 하나는 아랍 바깥에서 형성된 친미, 반공 근대화 세력들인 튀르키예와 이란이었다. 다른 하나는 사우디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인 왕정 국가들이었다. 이 두 국가를 지원하며 소련의 중동 진출에 대응하는 구도를 형성하고자 했다.
  • 하지만 두 가지 변수가 이 구도를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1. 우선은 현실 소비에트의 해체와 이집트 80년대 친미로 돌아섰다는 사실.
    2. 이슬람주의(호메이니 혁명)의 등장. 반미적이면서도 이슬람을 통한 보수적 혁명.
  • 이슬람주의의 영향력은 기존에 중동에 미친 소련의 영향력을 대체했다. 이란을 중심으로 형성한 시아파 이슬람주의 세력과 친소 잔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의 이라크, 이 둘이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서로 싸움을 하며 힘이 빠졌다. 게다가 중동 대다수 국가가 소련이 망한 뒤에 친미로 전향하는 등 기가 꺾이니 미국은 아주 ‘해피’ 했다.
  • 그 와중에 2000년 911 테러가 터지고, 네오콘이 득세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해서 후세인을 축출했다. 자유주의적 신념으로 좋은 정부를 만들어주겠다고 군사행동을 했는데, 그렇게 만든 정부가 전혀 기능하지 못하고, 오히려 시아파와 수니파의 갈등만 증폭하고, 그 갈등 중재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미국의 나쁜 이미지만 계속 쌓이고, 이런 상황에서 이라크 지역에서 이란이 세력을 확대하기 시작한 거다.
  • 당시 혁명 이후의 이란,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아사드 정권의 시리아가 미국에 대항하는 국가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미국의 침공으로 이란과 적대하던 후세인 정권이 무너지자, 이란은 이라크에서 세력을 갑작스럽게 확대할 수 있었다.

하마스와는 철저하게 거리를 두지만, 팔레스타인에 동정적인 나라, 대표적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나라가 캐스팅 보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최대 안보 위협으로 등장한 상황에서 이란 핵무기 개발 이슈 같은 건 정말 ‘홀로코스트’ 트라우마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런 이스라엘의 공포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아랍의 대장국가’ 사우디아라비아다.

사우디는 이집트에서 나세르주의(60년대, 아랍민족주의, 팔레스타인의 대의 동참해 싸워야한다!) 이후 급속하게 ‘변화는 자제하자’ ‘우리도 살아야지’ 하는 노선으로 존재감을 키웠다.

시리아와 연합해 아랍 민족주의를 고취한 가말 압델 나세르(1918년~1970년). Stevan Kragujević, CC BY SA 3.0, 위키미디어 공용

이란의 세력 확장은 이스라엘에는 절멸의 공포지만, 사우디 역시 긴장하게 하는 요소다. 이란이 세력을 확장할수록 이란의 시아파 혁명사상(시아파가 수니파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억압받는 자의 해방)이 사우디로 침투할 수 있다. 그런데 사우디의 가장 강한 동기는 ‘왕가의 유지’와 나라의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운영이다. 혁명사상 같은 걸 좋아할 수 없는 이유다. 이란 세력이 사우디를 포위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사우디 인근 예멘, 바레인 등지의 시아파가 이란의 사주로 들고 일어나면 왕정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강한 압박감을 받는다.

1979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 호메이니.
오마바와 이란: 밀월 기간

이때 오바마는 이란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스탠스를 취했다. 미국 돈이 군사작전을 위해 중동에 투입되고, 미군이 중동에서 죽어갈 때 오바마는 중국에 집중하면서, 중동에선 더는 피를 흘리지 않겠다고 공약했고, 중동을 안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집권 초부터 이란과 협상했고, 특히 ’14년 15년 ‘이슬람 국가'(IS)가 크게 문제됐을 때, 이란과 미국이 함께 공조해 큰 역할을 했다. 이란 정치의 변화도 중요했다. 이란은 1997년부터 자유주의적 개혁파가 들어선 국가다. 이들 개혁파 지도부는 당시 이란 강경 보수파를 비판한 젊은 층의 먹고사니즘, 자유주의, 여성 평등 등을 지지했다. 부시가 네오콘 사상에 입각해 갑작스럽게 이란을 ‘악의 축’으로 선언하며 이란 개혁파는 난데없이 입지를 상실했다.

2005년부터 2013년까지 보수 포퓰리스트인 마무드 아흐마디네자드가 통치했다. 그런데 이때도 2009년에 녹색운동이라는 개혁파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 이후 핵 개발 논란으로 경제 제재도 시작되며 보수파에 대한 반발이 다시 결집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2013년 중도파를 대표하는 로하니가 이란 대선에서 승리했다.

이 시기 이란은 미국과 협상하면서 경제적 실익을 추구했고, 미국도 이란에 핵만 포기하면 경제 제재의 해제를 약속했다. 그 결실로 2015년 역사적인 이란-미국 핵 협상이 타결됐고, 이에 이스라엘이 극렬하게 반발했다. 미국이 이란을 인정하면 이란의 힘이 강해지고, 그러면 중동에서 패권을 추구할 것이라고 염려했다. 핵무기 없앤다는 말로는 안심을 할 수 없고 이란을 믿을 수가 없다고 비난했다. 그런 상황에서 오바마와 이스라엘이 멀어지고, 그 와중에 트럼프가 등장한 거다.

2015년 7월 14일, 13년 만에 역사적으로 타결된 이란 핵 협상을 보도한 CNN. 갈무리.
트럼프 등장: 이란과 협정? 백지화

트럼프 정부는 이란과의 협상을 사실상 백지화했다. 그 방식이 어떤 거냐면, 우선 이란이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추가 제안’을 했다.

  • 예멘이나 시리아 등 이란 대리군 지원 금지.
  • 핵무기의 운반수단이 될 수 있는 미사일 개발도 포기해라.
  • 이들 추가 요구를 받지 않으면 이란을 고립시키겠다고 선언.

트럼프 ‘깽판’에 흡족한 사우디

그렇게 트럼프 정부가 오바마 정부와 이란 간 합의를 깨버리자 이란은 엄청난 경제적인 고통을 겪었다. 그래서 트럼프에 관해 사우디와 이스라엘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사우디는 2017년부터 이란의 영향력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빈 살만 집권 후 사우디는 현대화를 기치로 공세적인 외교를 전개했다. 가령 ‘예멘의 후티 반군을 없애버리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엄청난 국방비를 사우디가 그 작은 나라인 예멘의 반군도 처리하지 못한 채 국적인 비난과 망신만 당하는 게 현실이었다.

사우디는 카타르 봉쇄령도 시도했는데, 그 빌미가 이란과의 가교 역할을 카타르가 자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란과는 크게 관계없는 수니파 이슬람주의 세력과의 연계도 거슬리는 일이었다). 그렇게 카타르를 사우디 중심주의 외교 정책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봉쇄하려고 하지만, 이 역시도 실패했다. 이란을 봉쇄하는 건 성공했지만, 나머지는 모두 실패한 상태에서 이란이 다시 반격했다.

솔레이마니 장군이 이라크, 시리아, 예멘 등을 돌아다니면서 군사 작전을 펼쳤고, 예멘에서 사우디 정유시설 등을 공격했다. 그런 상황에서 트럼프도 본때를 보여줘야겠구먼! 하면서 사우디를 비롯한 나라들에 성과를 보여주겠다며 솔레이니만을 공항에서 암살했다.

미군이 행한 ‘드론 공습'(바그다드 국제공항 공습)으로 사망한 거셈 솔레이마니(Qasem Soleimani, 1957년 11월3월 11일-2020년 1월 3일, 향년 62세, 사진은 2013년 당시 모습, 출처 Tasnim News Agency, CC BY 2.0)

그 이후에 역사적인 ‘아브라함’ 협정(Abraham Accords, 2020.09, 이스라엘,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걸프 왕정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서로 상호 호혜의 원칙하에서 인정하자는 협정을 했다. 이란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자는 취지가 강하다.

사우디가 이스라엘을 인정하면 판이 완전히 달라진다. 사우디는 메카와 메디나라는 이슬람 최고 성지를 보호하는, 아랍의 수장 국가라는 높은 위상이 있다. 사우디가 이스라엘을 인정한다면 다른 무슬림 국가들도 이스라엘에 전향적인 정책을 취하기가 더 쉬워진다. 사우디는 아직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양국 협상이 상당히 진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2023년 10월 7일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아브라함’ 협정(Abraham Accords, 2020.09.15, 이스라엘,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CC0.
바이든 등장 이후

바이든은 이란 협상을 다시 되살려보려고 했다. 이란은 트럼프의 최대 압박 정책의 해제를 대화 재개 조건으로 걸었다. 하지만 미국 민주당은 그 요구를 받지 않았다. 트럼프 4년의 압박을 받은 이란이 중동에서 더 공세적으로 나오자, 민주당도 이란의 요구를 수용하면 국내의 반발을 살 수 있었다. 어차피 트럼프가 강하게 걸어놓은 제재를 새로운 판돈으로 삼아서 오바마 때보다 더 나은 딜을 만들자는 욕심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란도 ‘그럼 우리도 안 해!’라는 스탠스를 취하면서 중국, 러시아와 친분을 쌓고 무역 다변화를 꾀했다. 그렇게 미국을 배제해도 체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스스로 입증했기 때문에 ‘배 째라’ 식으로 배짱을 부릴 수 있게 됐다.

이스라엘에 방문, 수도 텔아부비에서 지난 7일 하마스 공격으로 희생된 이스라엘 유가족을 만나 위로한 조 바이든(미 대통령). 2023년 10월 18일(현지 시각). 조 바이든.

이런 상황에서 바이든은 사우디와 외교적 갈등을 겪었다. 유가 상승으로 러시아가 돈을 많이 버니까 미국은 유가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빈 살만에게 석유 생산량을 높이라고 했지만 빈 살만이 그걸 거부했다. 애초에 바이든은 집권 전부터 빈 살만이 언론인 카슈크지를 암살한 사건을 계속 언급하며 빈 살만을 국제 ‘왕따’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미-사우디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런데 여기에 중국이 등장해 이란과 화해를 권유했다.

이 이미지는 대체 속성이 비어있습니다. 그 파일 이름은 Vladimir_Putin_and_Mohammad_bin_Salman_Al_Saud_3.jpg입니다
빈 살만(왼쪽)과 푸틴. 2015. 위키미디어 공용.
중국의 등장

중재는 이라크가 가장 먼저 시도했다. 현재 이라크는 이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국가지만, 2019년에는 이란이 나라를 좌지우지한다는 국민적 불만이 폭발한 적도 있다. 이라크는 시아파가 정국을 주도한다는 점에서 시아파 최고 강대국인 이란과 가까울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아랍 국가라는 정체성을 이용해 사우디에 접근했다. 사우디와 이란 두 국가가 모두 중요한 이라크는 지속적으로 화해 테이블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중국도 양국에 다 발을 걸치고 있었다. 제조업 대국으로서 엄청난 에너지를 중동에서 사와야 하는 중국은 사우디도, 이란도 중요했고, 중동 에너지의 안정이 필수적이었다. 한편 사우디 입장에서도 중국은 아주 괜찮은 협력 대상이기도 했다. 중국은 석유도 많이 사주고, 빈 살만이 원하는 국가 현대화 개발에 도울 수 있는 개발 능력이 있는 국가다. 그리고 미국처럼 인권을 들먹이며 왕정에 간섭하지도 않는다. 이란에는 원래 중국이 매우 중요했다.

트럼프의 압박에 버티긴 했지만, 이란 국가의 주요 수입원인 석유와 가스를 판매하는 일은 매우 어려워졌다(대한민국도 미국과 이란 사이에 끼어서 매우 고생한 나라다). 그때 중국이 등장해 이란과 무역을 이어가 주며 생명선을 제공해주었다.

중국은 양국이 모두 믿을 수 있는 파트너이자 중재자로 떠올랐고, ’23년 즈음 이란과 사우디의 화해를 이끌어냈다. 중국은 이제 미국도 못 하는 중동 평화를 우리가 해냈다고 국제적인 위상을 제고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 전격 화해로 의도치 않게 미국이 가장 바랐던 구도가 깨졌다.

미국은 원래 중동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두 우방국인 이스라엘-사우디를 연합시켜 이란 세력을 막겠다는 구상이 있었따. 바이든은 유럽에서 이스라엘, 사우디를 거쳐 인도로 가는 무역로를 만들 거라고 공언도 했었다. 그런데 이 구도가 ‘23년 가자 지구에서 전쟁이 일어나며 무참히 깨졌다.

지금은 오히려 사우디가 중재자를 자임할 수 있게 됐다. 이란과 철천지원수였던 때가 언제였냐는 듯, 이제 사우디는 끝나지 않는 장기전에 허덕이는 이스라엘과 중동 최대의 지정학적 세력으로 떠올랐지만 내부 경제와 사회가 불안한 이란에 모두 연락선을 가진 국가가 된 것이다.

2023년 10월 22일 사우디 순방에 함께 동행한 경제인과 무함마드 빈 살만(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겸 총리)의 인사 교환을 위해 걷고 있는 윤석열.
트럼프 컴백 후: 첫 번째 가능성

트럼프 1기를 복기해보면, 친(親)이스라엘+반(反)이란 정책을 펴면 사우디, 바레인, UAE 등은 이란에 위협을 느껴 미국에 거의 자동으로 동조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사정이 다르다. 사우디와 걸프 왕정들이 이란과도 데탕트 무드다. 매일 같이 양국의 경제 협력, 무역과 투자 합의가 뉴스에 오르내린다.

오히려 이란-이스라엘 전쟁으로 확전하면 자신들은 오히려 피해만 본다. 이란은 수틀리면 전 세계로 향하는 유조선이 꼭 거쳐야만 하는 호르무즈 해협을 틀어막을 수 있다. 걸프 왕정 국가들의 석유 관련 인프라를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터트릴 수도 있다. 그래서 이들 나라들은 대(對)이란 압박 작전에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다시 온다.
트럼프 컴백 후: 두 번째 가능성

사우디 중심으로 중동 평화 시대를 열어보자! 이 시나리오의 경우는 이스라엘이 아주 난감해진다. 물론 트럼프는 예측하기 어려운 사람이지만, 그렇다면 미국에는 어느 쪽이 더 유리한가. 당연히 사우디 중심의 중동 평화 시대가 미국에도 유리하다.

미국 입장에서 지금 중동에 자원을 쏟기에는 우크라이나에 너무 많은 자원을 쏟아부어서 빨리 정리하고 싶고, 트럼프 진영 내부에서는 중국에 역량과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그러니까 반도체 이슈나 남중국해 지정학적 분쟁에 역량과 자원을 집중하자는 입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도 중동이나 우크라이나에 힘을 너무 뺏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한편에서는 이란에 대한 강경파도 많긴 하다. 부통령으로 선출된 JD 밴스도 그런 강경파 중 한 명이다. 그래서 대(對)이란 강경 정책으로 회귀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스라엘, 다시 주도권? 시리아 돌출 변수

이스라엘은 지금 매우 큰 곤경에 처했다. 딜레마다. 진퇴양난이다.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됐다. 주장한 것처럼 이란이 핵심인 건 맞는데, 이란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란의 세력이 오히려 더 커졌다. 중동의 평화가 중요한데, 이스라엘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오슬로 협정’마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팔레스타인 입장에선 계속 분노와 절망이 계속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 상황을 타개해야 할 텐데, 이스라엘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

이제는 러시아로 망명한 시리아 독재자 알아사드 현수막이 걸려 있는 건물. watchsmart CC BY. 2007년 당시 모습.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 붕괴

그런데 최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란이 키운 ‘저항의 축’에서 핵심적인 린치핀(LinchPin; 대체 불가)을 담당하던 시리아의 아사드 정부가, 튀르키예의 후원을 받는 북서부 지역 반군의 공세에 그야말로 허무하게 무너진 것이다. 시리아 내전 당시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을 받으면서 끝까지 정권을 유지하고, 다시 알레포를 비롯한 주요 거점을 회복하며 축출되었던 아랍 연맹에 화려하게 복귀하던 게 엊그제 같았다. 국민들도 내전의 끔찍한 무질서 대신에는 아사드 정권의 폭압이 주는 안정이 차라리 낫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근 며칠 동안 밝혀진 것은, 물 밑에서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시리아에 계속해서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시리아 정부가 온전히 기능할 수 없게 흔들고 있었다. 시리아는 러시아와 이란의 지원을 통해서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고, 군사적으로는 이란 혁명수비대와 레바논 헤즈볼라에 의지했다. 경제가 어려우니 병사들의 급여도 제대로 챙겨줄 수 없었기에 시리아 정부군 자체는 매우 허약했다.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신경 쓰느라 시리아를 챙겨줄 수 없었고, 이란과 헤즈볼라도 이스라엘과의 싸움에 엄청난 소모를 겪으며 시리아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역량이 고갈된 상태였다. 이스라엘이 여기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헤즈볼라와 휴전을 하자마자 튀르키예가 지원하는 이들리브 반군이 전격전을 시작한 것은 시사적이다. 아사드가 다시 정권을 인정받고 국가 통치를 회복하기 위해 저점을 찍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진 작전은 아사드 정권이 감추고 있던 취약성을 드러냈고, 정권은 산산조각 났다.

54년에 걸친 알아사드 세습 정권이 붕괴했다. 아들 알아사드(사진)은 러시아로 망명했다. 2024년 11월 11일 러시아 외무차관이 아사드 구출 후 망명을 확인했다.
궁지에 몰린 이스라엘, 다시 주도권?

궁지에 몰려 있는 것 같았던 이스라엘은 이번 기회에 다시 주도권을 쥐게 될지도 모른다. 이란과 멀리 떨어져 있는 헤즈볼라는 둘 사이에 있는 이라크-시리아를 통해서만 이란의 지원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란의 헤즈볼라 지원 입구를 담당하던 시리아가 이렇게 무너졌으니, 네타냐후는 언제든지 보급이 끊긴 헤즈볼라를 강타하면서 휴전 이후 다시 공세를 시작해 볼 수도 있게 되었다.

만약 이러한 공세가 다시 시작된다면, 헤즈볼라가 통치하는 남부 레바논에 다시 거대한 인도적 위기가 시작될 것이고, 이란도 어느 수위로 대응해야 할지를 둘러싸고 계속 고민해야 할 것이다. 현재 모든 중동의 플레이어들은 1월에 취임할 트럼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떨어질지만 지켜보고 있다.

트럼프가 ‘에레츠 이스라엘'(‘이스라엘의 땅’)을 위해 네타냐후가 주도하는 이 위험한 게임을 전폭적으로 지원한다면, 중동에서 전례 없는 지정학적 투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튀르키예도 계산기를 두드리며 미국, 이스라엘, 이란의 역학에 어떻게 참여할지를 고심하고 있다.

여러모로 위험한 시대가 펼쳐지고 있다.

관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