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 베테랑 기자 김훤주가 따뜻하고 담백한 시선으로 세상 소식을 전합니다.
통제영에 수항루가 있었던 까닭은
경남 통영 통제영에 가면 수항루(受降樓)라는 건물이 있다. 2층짜리 누각인데 국보로 지정된 세병관의 압도적인 규모와 명성에 눌려 잘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지금 정문처럼 쓰이는 망일루(望日累)의 오른쪽에 놓여있다.
원래 수항루는 통제영 앞쪽 강구안 병선마당에서 정문 노릇을 하는 누각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헐리고 말았다. 1988년 원래 자리에 복원하려고 했으나 이미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어서 통제영 경내로 자리를 옮겨 세웠다.
헐리기 전의 수항루는 전후좌우로 열네 채의 건물을 거느린 병선마당의 중심 건물이었다. 당시 선소(船所)라 했던 병선마당 앞쪽 남쪽 바다 일대에는 거북선·전선·별선·방선·병선·사후선(伺候船) 등 마흔 척 가까운 싸움배가 매여져 있었다.
가왜장의 항복을 받는 의식을 치렀다
조선시대에도 당연히 군사훈련이 있었다. 물에서 하면 수조(水操), 뭍에서 하면 육조(陸操), 성안에서 하면 성조(城操)라 했다. 흉년이 들거나 역병이 돌면 건너뛸 때도 있었지만 봄 3월과 가을 8월에 해마다 두 차례 거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수항루는 이런 수조를 할 때 통제사가 거처하면서 조선 수군 전체를 지휘하던 장소였다. 봄철에는 충청도, 전라좌·우도, 경상좌도 수군까지 함께 합동으로 하고 가을철에는 통제사 직할 부대인 경상우도 수군만으로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수항’은 항복(降)을 받는다(受)는 말이다. 해마다 두 차례 군사훈련을 할 때마다 역대 통제사들은 수항루에서 가왜장의 항복을 받았다. 참혹했던 임진왜란 7년 전란을 일으킨 일본이 재침할 것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기 위해서였다.
통제영에는 이를 위한 인력도 배정되어 있었다. 임금들의 참고서인 [만기요람]을 보면 가왜장(假倭將) 29명과 가왜군(假倭軍) 75명이 통제영의 정원으로 책정되어 있다. 이들을 가지고 모의 왜군을 편성하여 군사훈련을 하면서 그들을 제압해 무릎을 꿇렸던 것이다.
조선 육군의 가상 적국도 왜적이었을까
군사훈련을 하면서 왜적을 적국으로 명시한 것은 수군만이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았다. 육군도 마찬가지였다. [숙종실록] 1679년 9월 11일자를 보면 알 수 있다.
“포 소리와 함께 군진을 펼치면서 가왜를 편성하여 전진하고 후퇴하며 어울려 싸우는 형상을 만들었다.”
[숙종실록] 1679년 9월 11일자
그러고 나서 자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수도 방위를 담당하는) 어영군과 (지금의 예비군과 비슷한) 잡색군 두서너 초(哨, 1초는 100명)를 합쳐서 포진시키고, 또 가왜 한 초를 차출하여 어울려 싸우고 번갈아 포를 쏘게 하다가 한참 뒤에야 그쳤다.”
위와 같음.
당시 군사훈련은 조선군과 왜군의 대련이었다. 같은 [숙종실록] 1679년 9월 11일자에서 병조판서 김석주가 “예전에는 주장과 객대장을 차출하여 두 진영이 무예를 겨루게 했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가왜를 편성하여 전투를 익혔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1788년 4월 4일자 [일성록]에는 정조 임금이 본인이 사열한 군사훈련에서 가왜장·가왜군을 붙잡은 장병들에게 상급을 내리는 장면도 나온다. 조선 왕조 군사훈련의 가상 적국은 임진왜란 100년 뒤에도 200년 뒤에도 왜적이었다.
역대 최소 규모의 이상한 독도방어훈련
윤석열 정부 들어 독도방어훈련이 이상해졌다. 올해 상반기는 계획조차 없다가 MBC가 8월 13일 보도하자 그 다음날 계획을 세워 21일에 훈련을 벌였다. 기본으로 참가하는 독도경비대를 빼면 동원된 자산은 수상함 다섯 척이 전부인 역대 최소 규모로 치렀다.
윤석열 정부에서 벌인 독도방어훈련 다섯 차례 모두를 보면 역대 최소 규모는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수상함은 평균 4.6척, 항공기는 2023년 12월 훈련에 한 대가 한 번 동원됐고 특수전 부대 등 육상 전력은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코로나19 이전에는 수상함 평균 8.2척, 항공기 평균 4.4대, 육상 전력은 다섯 차례 참가했다. 코로나19 시기에는 육상 전력은 빠졌지만 수상함 평균 4.4척, 항공기 1.5대가 동원됐다.
박근혜 정부도 여덟 차례 훈련에서 수상함은 평균 8.2척, 항공기 평균 4대를 동원했고 육상 전력은 다섯 차례 참가했다. 이는 문재인 정부와 비슷한 규모이고 윤석열 정부보다는 두 배가량 많은 정도다.
참퇴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윤석열 정부는 다섯 차례 모두 일본을 자극할 수 있다며 적국도 가상하지 않았고 공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일본 우익은 식민 지배를 반성하지도 않고 재침 의도도 숨기지 않는다. 자국 방어만 하는 자위대를 침략 전쟁을 할 수 있는 군대로 바꾸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는 명백한 후퇴다. 임진왜란을 겪고 일제강점기를 견딘 한국인의 역사 DNA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후퇴다. 이전 정부도 모두 일본을 적국으로 가상했었고 조선 왕조조차 언제나 왜적을 적국으로 특정했다.
조선시대에는 참퇴법(斬退法)이 있었다. 후퇴하면(退) 칼로 베는(斬) 제도(法)다. 이순신 장군도 옥포대첩·당포해전·한산대첩 등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참퇴장(將)을 두고 지위 고하 구분 없이 엄정하게 참퇴법을 집행했다.
만약 지금 참퇴법이 있다면 누구부터 먼저 적용해야 맞는 걸까? 독도방어훈련을 이처럼 이상하게 진행한 책임은 누구의 몫일까? 이번 결정은 해군본부 단독이 아니라 국방부·대통령실과 조율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나는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