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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도발 위협이 점증하는 상황 속에서 시위 악화로 인한 국정혼란이 가중될 경우 국가안보에 위기가 초래될 수 있어, 군 차원의 대비 긴요

“국민들의 계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고려, 초기에는 위수령을 발령하여 대응하고 상황악화 시 계엄(경비→비상계엄) 시행 검토”

마치 군사정권을 연상시키는 내용이어서 30~40년 전에 작성된 문건에 나오는 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은 불과 2년 전2017년 3월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가 작성한 글이다. 기무사는 탄핵 촛불 정국일 때 ‘전시 계엄 및 합수업무 수행방안’이라는 문건에서 위수령과 계엄의 시행을 검토하였던 것이다.

기무사

청와대가 2018년 7월 20일 발표한 ‘기무사 계엄문건’ 세부자료에 따르면, 기무사는 계엄선포와 동시에 집회·시위 금지 및 반정부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선포하고 집회 예상지역 2곳인 서울 광화문과 여의도에 계엄 임무 수행군을 야간에 투입하며 KBS·CBS·YTN 등 22개 방송사와 26개 신문사, 8개 인터넷 매체에 배치될 통제요원 숫자까지 지정하였다. 조현천 전 국군기무사령관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당일 청와대를 방문하였다. 탄핵 정국에서 군과 청와대가 계엄을 공모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정황들이다.

어떤 이들은 1980년 5월 광주를, 어떤 이들은 1979년의 부산과 마산을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홉 번의 비상계엄

계엄은 한 마디로 국가비상사태를 대비하여 군대에 행정권과 사법권을 맡기는 것이다. ‘비상계엄’의 경우에는 군대가 국민의 헌법상 권리인 집회·시위나 체포·구속 등에 대해서도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헌법은 계엄의 요건을 엄격히 제한하여, ‘전시나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하여 병력을 동원할 군사상 필요가 있거나 병력으로 질서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 선포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비상계엄은 아홉 번 선포되었다

  • 제주 4.3 항쟁
  • 여순 항쟁
  • 한국전쟁
  • 4.19 의거
  • 5.16 군부 쿠데타
  • 한일회담 반대 시위(‘6.3 학생운동)
  • 10월 유신
  • 부마항쟁(1979. 10.)
  • 10.26 이후(1979. 10. 27.~1981. 1. 24.)

현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비상계엄 대부분이 ‘전시나 사변,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해서라기 보다는, 부패 및 군사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하여 선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상계엄은 모든 권력을 군부에 집중하고 계엄사령관의 명령만으로 시민들을 손쉽게 탄압할 수 있기 때문에, 권력을 불법으로 취득하거나 독재권력을 유지하려는 자들에게는 ‘니벨룽의 반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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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령관이 특별한 조치를 행사하기 위해 포고령을 발표하는데, 지금까지 발표된 포고령의 내용을 보면 기본적으로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언론·출판은 사전검열을 하며 영장 없는 체포·구금·압수·수색을 인정하였고, 정권에 대한 저항을 탄압하기 위하여 ‘유언비어 날조, 유포와 국론분열’을 금지하였다.

계엄사령관의 포고령은 절대적이어서 포고령 위반자는 형사처벌을 받았다. 군대가 제헌 헌법 이래 기본권 보장의 중요한 원칙으로 천명한 표현의 자유와 영장주의를 무시하고 시민들이 일상을 규율했으며 영장도 없이 사람을 구속하는 불법을 저질렀다.

그러나 지금까지 비상계엄에 대하여 일부나마 진실 규명과 법적 평가가 이루어진 것은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정도이다. 대법원은 전두환 신군군부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하여 1980. 5. 17.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부를 통제하고 그 기능을 대체하게 한 것은 내란죄라고 판단하면서,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폭동’이라고 규정하였다.

부마항쟁 당시 비상계엄의 위헌성 

그런데 지난해 대법원은 1979. 10. 18.자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의 계엄포고에 대하여 위헌무효를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부산지역에서 선포된 비상계엄의 위헌성도 인정하였다(대법원 2018. 11. 29. 선고 2016도14781 판결).

신민당사에서 점거 농성한 YH무역 여성노동자에 대한 강경진압과 노동자 김경숙의 사망,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 사건은 부산, 마산 지역 일대에 도화선이 되어,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시위가 시민들에게 확산되었다.

1979년 8월 9일, 가발 업체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70여 명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던 사건.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상이 총재 직무를 정지당한 뒤 국회의원에서 제명됐고, 부마항쟁이 촉발됐으며, 결국 10.26의 도화선이 되었다.
YH사건. 1979년 8월 9일, 가발 업체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70여 명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던 사건. 이 사건을 시발점으로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상이 총재 직무를 정지당한 뒤 국회의원에서 제명됐고, 부마항쟁이 촉발됐으며, 결국 10.26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부산대학에 휴교조치를 명령하고, 10. 18.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2개 여단의 공수부대를 투입하였다. 부산지구 계엄사령관 육군중장 박찬긍은 유언비어 날조, 유포와 국론분열 언동 등을 금지하는 계엄포고 제1호를 발표하였고 이를 위반하면 계엄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하였다.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던 학생과 시민들, 시위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박수와 먹을 것으로 시위대를 지지하던 시민들이 군인과 경찰의 폭력에 짓밟히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부마항쟁
부마항쟁. 도심으로 집입하는 군인들.

박근혜가 부마항쟁의 진실 규명을 대선 공약으로 주장했고 2013년 6월 4일 제정된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부마항쟁보상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박정희의 정치적 기반에서 탄생한 박근혜 정권은 뉴라이트 계열과 박근혜 정권 창출에 기여한 사람들로 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규명을 하기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인력을 배치하였다. 위원회는 법에서 정한 활동 기간 3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진상규명 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하였다(2018. 12. 24. 법률의 개정으로 활동기간 1년 연장).

박근혜 독재자의 딸
‘독재자의 딸’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타임 표지를 장식한 박근혜 전 대통령(2012년 12월 17일 자). 박근혜는 부마항쟁의 진실 규명을 대선 공약으로 약속했지만, 진실 규명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인력을 배치함으로써 결국 그럴 의지가 전혀 없음을 보여줬다.

법원, 당시는 계엄(‘군사상 필요한 때’) 상황 아니다 

1979년 10월 군에 강제징집 되었다가 제대한 A도 부마항쟁의 현장에 있었다. 긴급조치 제9호로 구속된 엠네스티 부산경남지부 활동가들을 대신하여 엠네스티 활동을 하고 있었다. 비상계엄에서의 인권실태를 조사하기 위하여 부산지역을 방문한 한국기독교연합회 간사와 인권침해 사건을 논의하였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구속되어 3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A는 부마항쟁보상법의 특별재심 규정에 따라 재심청구를 하여 재심결정을 받은 뒤, 비상계엄의 위헌성을 판단받기 위하여 유언비어의 처벌 근거 규정인 계엄포고령의 위헌 무효를 주장하였다. A는 수사기관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허위자백을 하여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사실관계의 문제보다는 비상계엄과 A에게 적용된 계엄포고령의 위헌성을 정면으로 다투었다.

부마항쟁

A와 같이 형사재심 사건에서 계엄포고령의 위헌무효를 전제로 무죄를 주장한 피해자들이 많았으나 이 사건 선고 이전까지 법원은 계엄포고령의 위헌성 여부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유언비어’의 불명확성이나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 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런데 A가 청구한 형사재심사건에서 법원은 ‘부마항쟁 당시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포고는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인 부마민주항쟁을 탄압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계엄포고가 발령될 당시의 국내외 정치상황과 사회 상황이 계엄법에서 정한 ‘군사상 필요한 때’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법원 왈, 금칙어 기술은 "가장 근본적이고 효율적인 조치"입니다.
법원, 부마항쟁 당시의 국내외 정치상황은 계엄법에서 정한 ‘군사상 필요한 때’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계엄포고의 내용이 영장주의와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되고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위헌이고 위법하여 무효라고 판단하였다. 형사재심사건의 특성상 ‘비상계엄’ 자체의 위헌 무효를 명시적으로 판단하지는 않았지만, 비상계엄에 따라 선포된 ‘계엄포고’에 대하여 그 요건인 ‘군사상 필요’가 없다고 함으로써 비상계엄의 위헌성을 정면으로 다루었다고 볼 수 있다.

전두환을 보라 

비상계엄과 계엄포고의 위헌 무효를 선언하는 것은 과거 공권력의 중대한 인권침해를 일부나마 진상규명하고 형사재심에서 피해자를 구제하여 원상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여기에 그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행위자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묻고 국가의 사과와 재발방지에 대한 대책까지 함께 이루어질 때 비로소 정의가 회복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는다면, ‘비상계엄’의 형식을 통한 국가폭력은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

2019년으로 돌아와보자. 시민단체의 고발로 합동수사단이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 한민구 전 국방부장관 등을 내란음모죄의 혐의로 조사하였으나, 문건을 보고한 것으로 알려진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2017. 12. 미국으로 출국한 후 현재까지 소재가 불명하여 수사가 중단되었다.

지금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왜곡하며 피해자를 두 번 죽이고 있는 전두환을 보라.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을 통한 정의의 실현에는 시효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자 했던 2017년의 내란음모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규명되고 처벌되어야 한다. 부정한 권력자들이 다시는 이러한 유혹조차 느끼지 못하게 말이다.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 현재 외국에서 도피 중이다.
2017 계엄령 모의 사건 주동자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 현재 외국에서 도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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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비평 과거사 특집

해방 직후의 엄혹한 한국 현대사 속에서는 유독 ‘법’의 얼굴을 쓰고 자행된 권력의 폭력이 많았습니다. 이런 불행한 과거사들을 마주하는데 있어서 오늘날의 법원이 보여야할 태도는 무엇일까요. 과거사 재판에서 법원은 권력을 견제하는 인권의 수호자로 거듭날수도 있지만, 반대로 역사의 시계를 뒤로 돌리는 구시대의 잔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판결비평 과거사특집]을 연재합니다.

이 글의 필자는 이상희 변호사(참여연대 공익제보지원센터 부소장)입니다.

  1. 제주 4·3 군법회의 재심 사건: 70년 만에 건져낸 진실 (김종민)
  2. 국가는 없었다: 피해자 목숨도 내팽개친 재판거래 (김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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