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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박근혜한테 꼭 배워야 할 한가지

2004년 7월27일 한나라당사를 찾았다가 찍었던 사진.
9년 만에 들춰보니 ‘기다림’이란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새해부턴 좀 더 솔직해지자. 난 박근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건 마치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에서 본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감정이다. 뼛속까지 공화당원인 한 중년 유권자가 재선을 위해 유세에 나선 민주당 소속 대통령 참모들과 마주쳤다.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이렇게 내뱉는다. “4년 전에도 안 찍었고 앞으로도 안 찍을 겁니다.”

적을 미워하지 마라, 증오는 판단을 흐린다

그래도 박근혜를 증오하진 않으려고 노력한다. 대선 패배(!) 뒤 나는 짧지만 강렬한 한마디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적을 미워하지 마라. 증오는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지금도 가끔 사람들과 얘기하다 나도 모르게 판단력이 흐려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마이클 꼴리오네가 조카 빈센트에게 들려준 충고를 떠올린다.

내년이면 전국 지방선거가 있다. 2016년에는 총선이 있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재앙’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왜 사태가 이렇게 됐는지 되짚어보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실수하기만 기다리며 ‘내 그럴 줄 알았다’고 고소해하다 총선과 대선 말아 먹은 지 1년도 안 지났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한테 배울 점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보게 됐다.

혁신은 정규직에서 나온다? 정규직 당직자의 힘!

우석훈이 기고한 글을 우연히 읽었다.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대선을 치르면서 가장 감탄한 것은, 천막당사 이후로 새누리당이 정말로 당의 구조와 체질을 바꾸었다는 것을 알게 된 일이다. 관료화와 전문화, 그걸 이룬 공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한국일보, 2013년 1월 28일,  ‘박근혜 경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직자 노조가 처음 생긴 곳은…

처음엔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정당에서 활동하는 지인한테 더 자세한 얘길 들을 수 있었다.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인정하기 정말 싫지만, 한국 정당 역사에서 당직자 노조가 처음 생긴 곳은 민주노동당도 아니고 한나라당(지금은 새누리당)이다. 바로 박근혜가 당대표였을때다. 박근혜는 처음으로 한나당 당직자들을 공채로 뽑았다. 당직자들이 정규직이다.”

지인은 새누리당 의원들이 교대로 벌이는 막말과 삽질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이 정당으로서 움직이고 조직으로서 굴러가는 배경에는 ‘정규직 당직자’들이 있다고 했다. 당직자로 일하다보면 비례대표나 전략공천으로 지방의회 진출하는 것을 당에서 보장해준다. 의원들 눈치 안보고 말 그대로 당을 위해 일한다.

내친김에 우석훈이 쓴 다른 글을 더 찾아봤다. 블로그에 올린 ‘대선 이후, 우리는 뭘 할까’라는 글에서 우석훈은 “이번 대선에서 졌다면, 우린 박근혜한테 진 거다. 정확히는, 박근혜의 새누리당 개혁에 진 거다.”라고 말한다. 그는 “천막당사 시절, 박근혜는 한나라당을 바꿨다. 민주당은 못 바꿨다.”라고 꼬집는다. 무엇이 두 정당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일까.

“내용은 간단하다. 월급쟁이 혹은 관료로서의 당직자를 새누리당은 만들었는데, 민주당은 대표 바뀔 때마다 줄 서야 하는 구조를 못 바꿨다. 간단히 말하면, 새누리당 당직자는 정규직인데, 민주당은 대표급한테 줄 안서면 비정규직이다. 관료처럼 일하고, 당내 선거에 개입하면 짜른다, 그 간단한 박근혜의 원칙에 이번 대선, 민주당이 진 거다. 이거 못 바꾸면, 영원히 아마와 프로의 싸움, 대선 그렇게 간다.”

관료처럼 일한다는 대목에서 얼핏 부정적인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여러해 전 대학원에서 배웠던 한 대목이 생각난다. ‘관료화’에 대한 해명을 갈음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 교수는 베버가 관료제를 주제로 쓴 글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정리해줬다. “베버가 말하는 관료제의 첫번째 원칙은 ‘일반적으로 규칙이나 법, 행정법규가 규정한 공식 권한과 고정된 원칙이 있으며 이는 법이나 행정규칙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관료제사회는 관료라는 사람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말한다.”

여의도연구소 vs. 민주정책연구원

이런 문제는 여의도연구소와 민주정책연구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대선이 끝나고 나서 알았다.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는 국내에서 여론조사와 관련해서는 상당한 전문성을 갖춘 곳으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그건 여의도연구소가 수천 명 단위로 패널조사를 꾸준히 진행하기 때문이라는 얘길 들었다. 그럼 민주통합당 민주정책연구원은 어떤가. 존재감 자체가 없다는 얘기가 솔직한 평가 아닐까 싶다.

민주정책연구원… 장기프로젝트 언감생심

최근 한겨레21 보도를 보면 여의도연구소와 민주정책연구원은 비교하기가 민망할 정도다(한겨레21, 2013년 1월 28일, 보수 두뇌집단이 늘 한발 먼저). 여의도연구소가 쓰는 1년 경비는 80억원인데 민주정책연구원은 43억원이다. “민주정책연구원은 국고보조금 말고는 수입원이 거의 없는 반면, 여의도연구소는 당 지원금 등 기타 수입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의도연구소는 전략기획·정책개발·여론조사 세 가지를 핵심 업무로 삼고 있으며, 정책개발비 중에서 여론 및 현안조사에 70~80%가량을 쓴다고 한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보고한 2011년도 활동실적 보고서에는 여론조사를 126회 했다고 돼 있다. 이에 반해 민주정책연구원은 역할과 기능에 대한 기본 전략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2011년도 활동보고서에서도 여론조사 실시한게 36회에 불과하다. 다른 한 지인은 “민주정책연구원은 대표 바뀔 때마다 전혀 새로운 곳으로 바뀐다. 장기 프로젝트를 고민할 여건이 안된다.”라고 꼬집었다.

이 대목에서 블로거 crete가 민주통합당에 말할 기회가 생기면 꼭 전해달라는 얘길 풀어놓아야겠다. “반드시 정책연구소 설립해서 박사급 연구원 10여 명으로 장기적인 정책연구에 올인하시라고 말씀 좀 드려주세요.”

그런 면에서 보면 학자이자 정치인인 민주통합당 의원 은수미의 주문이 꼭 실현됐으면 좋겠다. “땅따먹기 계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작은 당헌 당규를 바꿔 당직을 공채로 뽑아 투명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에서부터 해야 한다.” (오마이뉴스, 2013년 1월 30일, “친노·비노 모두 시대정신 ‘물타기’ 했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 노동유연성과 ‘경쟁’은 금과옥조로 통했다. 전체 노동자 가운데 비정규직이 절반이 넘는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혁신적인 사회가 됐나? 학생들은 너도나도 안정적인 직업을 찾아 공무원과 의사, 법조인을 꿈꾼다. 이공계 졸업하면 대다수가 비정규직이라니 이공계 기피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진다. 정규직조차도 언제 짤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몸을 사리고 고위직으로 승진하는 것도 꺼린다.

내가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정당 당직자라면 당을 위해 의원들과 대립각을 세울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다. 그런 정당에서는 당대표 혹은 자기를 ‘땡겨 줄’ 의원님한테 줄을 잘 대는 게 중요할 것이다. 민주당 조직국에서 엄정한 공천기준을 제시한들 제대로 먹힐 리도 없다. 우리가 박근혜한테 배울 점은 ‘혁신은 정규직에서 나온다’는 교훈이 아닐까.

박근혜는 이제 대통령이다. 국민경제를 혁신하기 위해서라도 당대표 당시 보여준 개혁 경험을 잊지 않기를 기대한다.

뱀다리(蛇足)

그러고 보니 소문으로 떠돌던 ‘댓글알바’도 알고 보면 ‘댓글 정규직’이었다. 바로 그거다. 혁신은 정규직에서 나온다. 쿨럭…

“최근 한겨레21 보도를 보면 ~ 라고 꼬집었다” 문단은 독자 ‘지동아빠’ 님께서 주신 논평에 따라 필자와의 협의를 거쳐 보충 퇴고했습니다. 최종 수정 시각: 2013년 2월 4일 오후 2시.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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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슬로우뉴스 편집위원

예산전문기자를 꿈꾸는 기자 겸 박사 겸 블로거( http://www.betulo.co.kr )입니다. 시민단체 공동신문 '시민의신문'을 거쳐 현재 서울신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나라살림연구소와 저널리즘학연구소에 참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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