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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엄마는 내 성적에 100% 만족하신 적이 없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중간고사 영어 과목에서 운 좋게 100점을 받아 엄마에게 칭찬받을 생각에 들떠 집으로 달려갈 때였다. 이걸 보여드리면 엄마가 뭐라고 하실까? 우와. 우리 아들 갖고 싶은 게 뭐야? 다 사줄게. 먹고 싶은 게 뭐야? 등심 스테이크 먹으러 갈까?

엄마, 엄마 이거 보세요. 백 점짜리예요! 나는 늠름하게 펼쳐진 영어 시험지를 보여드렸다. 마치 임금님이 하사한 포상문 두루마리를 펼쳐 보이는 기분이었다. 25개의 동그라미. 100 숫자에 두 개의 밑줄. 의심할 여지 없이 자랑스러운 성적이었다.

사진은 초등학교 1학년 영어 시험지 (출처: 하마사 블로그)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5DhB&articleno=15870910
어느 초등학교생의 영어 시험지 (출처: 하마사 블로그)

어머니는 나의 시험지를 보고 동그라미가 몇 개인지 세보지 않으셨다. 얼마나 고난도의 문제들이 있었는지. 이것이 날조된 성적은 아닌지 궁금해하지도 않으셨다.

“수학은? 과학은?” 이게 내가 처음으로 들은 대답이었다. 늠름하게 펼쳐져 있던 시험지가 갑자기 픽 고꾸라졌다. 임금님의 포상문처럼 사연을 품고 빛나는 것 같았던 시험지가 갑자기 볼 품 없는 종이 쪼가리로 변해버렸다.

그때. 부모님께 인정받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였던 그 시절. 하늘에서 성적요정이 다가와 내게 물었다.

“부모님께 인정받지만, 성적의 노예가 되는 삶과 자유인으로 살지만, 부모님께 꾸중 듣는 삶. 이 두 가지가 있어. 너는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해. 어느 쪽으로 할래?”

우유부단했던 나는 성격답게 우물쭈물 거리다가 아무것도 고르지 못했다. 그 결과 적당히 노예가 되면서 적당히 꾸중도 받는 굉장히 어중간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때 부모님께 인정받는 성적의 노예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오랫동안 후회했었다. 공부를 잘했고 열심히 했던 누나는 명문대학교에 진학했고, 그 대학에서도 성적이 좋아서 전액 장학금 받고 상위 1% 표창도 받고 다니다가 마침내 좋은 회사에 들어갔다. 보수적인 우리 집의 가치관을 충실히 따라 마침내 잘난 인간이 되어버린 누나 같은 사람들이 부러웠고, 더 열심히 살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하고 원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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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후회하고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여전히 남들보다 뛰어난 성적에 대한 부모님의 기대와 압박감 때문에 혼자만의 세계에 갇히는 날이 많았다. 혼자 고립된 섬이 되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가고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친구들과 스승들을 만나면서, 내가 노예처럼 더 열심히 살지 못해서 잃어버린 것보다는. 나의 삶의 주체가 되지 못해서 잃어버린 것들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더는 부족했던 과거의 노력에 대해 탓하지 않기로 했다. 과거의 자신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때 공부 안하고 소설에 빠졌던 것도, 공부 안 하고 음악감상 영화감상에 빠졌던 것도. 그때는 다 너에게 필요해서 그랬던 거라고, 네가 인생을 잘못산 것도 아니고, 지금 너의 삶이 잘못된 것도 아니라고. 충분히 잘해주었다고. 잘해주어서 고맙다고. 나 자신에게 말했다.

노력해서 남에게 인정 받고 싶은 삶이 아니라 스스로를 존중하는 삶을 살기로 하자. 모든게 한결 가볍고 자유로워졌다. 물론 그 자유로움에는 두 번의 F학점이나, 학사경고의 위기 같은 시행착오와 수수료가 붙기도 했지만 무사히 위기를 빠져나왔고, 그마저도 재밌는 추억이 되었다.

교회 청소년부 전도사가 된 이후 아이들의 성적에 대한 고민을 많이 듣게 된다.

“전도사님 모의고사 망쳤어요. 오늘 예배 마치고 한강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이런 농담도 듣는다. 그래 같이 가자. 전도사님도 시험 망치면 한강으로 가곤 했었지. 한 학년에 시험이 8번 있었으니까. 1년에 여덟 번씩 갔었어.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다.

웃음 미소

공부 전도사(?) 강성태의 “여러분들은 사실 공부를 안 해요”라는 말이 한때 유행이었다. 요즘도 시험 기간만 되면 명절 카드 건네듯이 카톡방에 떠 다닌다. 이 말은 웃기고 슬프다. 생명력이 넘치는 십대를 콘크리트에 가두어 놓고, 모든 학생을 고시생으로 만드는 교육환경에서. 모의고사 한 번 못보면 자살을 유머 소재로 쓰는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나라에서. 모든 학교 학원가가 이미 고시원과 다름 없어진 이 나라에서. OECD 편균보다 주 15시간 더 공부하는 학생들(‘2009년 기준)이 우리 사실 공부 안하고 놀지 않았냐며, 팩트폭격에 맞았다며 자조하는 것이 과연 정상적인 모습인가.

그렇게 살기를 강요받는 한국 학생의 82%는 1등을 하고 싶어하고, 75%는 성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OECD 국가들 가운데 운동을 가장 하지 않는다. 그런 한국 학생의 ‘삶의 만족도’는 당연히 꼴지 수준이다.[footnote]OECD ‘2015 PISA 학생 웰빙 보고서’ 전 세계 15세 학생 54만 명 설문 조사, ‘삶의 만족도’ 조사국 48개국 중 47위, 참조 기사.[/footnote]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일제에 의한 국권 수탈이 1910년이냐 1912년이냐 1913년이냐 하는 보기 중에 1910년을 정확히 찍는 학생과 위안부 할머니들께 겨울 이불을 뜨개질해서 보내는 학생들 중에 누가 국권 수탈 역사를 잘 기억하는 학생인지. 주어진 학습 내용을 달달 외워 앵무새처럼 받아적는 학생에게는 점수를 주지만, 학습 내용을 이해하고 행동하는 학생에게는 어떠한 보상도 주지 않는 교육시스템이 아이들에게 노력이 더 필요하다 운운할 자격이 있을까.

먼 훗날 나의 아들에게도. 성적 요정이 찾아와서 두 가지 선택지를 내밀때, 내 아들은 부모님께 꾸중 듣더라도 자유로운 주체로 살겠다고 선택했으면 좋겠다. 주어진 답을 그대로 적고 칭찬받는게 똑똑한게 아니라. 너의 생각을 말하고 비판 받을 수 있는게 똑똑한 거라고. 그렇게 응원해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공부 상상력 청소년 꿈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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