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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type=”note”]이 글은 영화 [7년의 밤]에 관한 리뷰입니다. 본문 하단에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줄거리 일부와 캐릭터에 관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box]

후한 말, 조조는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물리친 데에 이어 원소의 셋째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원상을 물리친다. 그랬던 조조 앞에 끌려온 사람은 원소의 부하였던 진림이었다.

타고난 글쟁이였던 진림은, 관도대전이 시작되기 전 원소의 지시에 따라 조조를 질타하는 격문을 작성했다. 그 격문에는 조조는 물론, 조조의 조상 대대로를 비난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어찌나 잘 썼던지, 욕을 들어먹은 당사자였던 조조조차도 그 문장에 감탄했다고 한다.

조조는 “욕을 하려면 나한테만 하면 족하지, 왜 우리 조상까지 들먹였느냐”고 진림을 비난했다. 그러자 진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위를 당긴 화살은 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원소의 부하였고, 나는 원소가 쓰라고 하면 쓸 수 밖에 없는 위치 아니겠느냐’는 변명을 한 것이다. 군웅할거 시대에서 원소라는 강력한 군웅의 부하로 사는 이상 그 지시가 무엇이든 순응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던 셈이다. 원소는 활을 쏘는 사람이었고, 진림은 활시위였으며, 진림의 글은 화살이었다.

활 궁수 화살

활시위를 당긴 원소가, 진림이라는 활시위를 당기고자 한다면, 진림은 ‘조조’라는 과녁을 향해 정확히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원소는 패했고, 진림은 조조의 포로가 됐다. 그랬다면 당시 정확하게 과녁을 맞혔던 그 화살은, 조조 앞에 꿇어앉은 진림에게 원죄로 뒤바뀐 것이다.

조조는 진림의 재치 있는 변명을 듣고 한바탕 웃은 뒤, 그 글재주를 높이 사서 등용했다. 진림은 후한 말 유명한 문사들을 일컫는 ‘건안칠자’의 1명으로 역사에 남았다.

하마르티아(hamartia)

그리스어 하마르티아(hamartia)는 ‘과녁을 맞히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쐈으면 정해진 과녁을 맞혀야 한다. 진림의 글은, 원소가 건재할 때에는 ‘정확하게 관통한 화살’이었다. 하지만 조조가 이긴 뒤, 그 글은 ‘미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쏜 화살’이 됐다.

사람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거대한 섭리 앞에서, 사람은 섭리를 존중하면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에 그 섭리를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그 한계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환경 때문에 타고난 것도 많다.

원 씨 가문의 얼자(孼子)였던 원소는 평생 ‘종놈’이라는 비난을 들었고, 환관의 양손자였던 조조는 평생 ‘환관의 손자’라는 비아냥거림 속에서 살았다. 원소가 얼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얼자로 태어난 것일까? 조조가 환관의 양손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환관의 양손자로 태어났을까?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 당대에 원죄로 작용했다. 특히 원소는 ‘얼자’라는 한계 속에서 아버지의 정실부인이 낳은 동생 원술과 평생 갈등했고, 친족을 지나치게 우대하는 가운데 후계자 다툼을 정리하지 못해 가문을 멸망시킬 불씨를 남겼다. ‘하마르티아’라는 말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삶인 셈이다.

하마르티아는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 ▲주어진 환경으로부터 비롯된 성격적 결함 ▲주어진 환경에 대한 무지 등의 형태로 드러난다. 오이디푸스는, 그가 아버지인 줄 모르고 아버지를 살해했고, 그녀가 어머니인 줄 모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 무지로부터 비롯된 예기치 않은 실수였지만,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한 그 자체는 변하지 않은 것이다.

샤를 프랑수아 잘라베르의 1842년 작품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샤를 프랑수아 잘라베르의 1842년 작품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물론, 고의로 ‘하마르티아’를 연출하는 사례도 있다.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 폐비 윤 씨가 사망한 계기를 이미 어린 시절에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성년이 돼 왕위에 즉위한 뒤 새삼스럽게 복수극을 벌여, 아버지 성종과 자신에게 도전하던 사림파를 정리한다. 연산군의 진짜 죄는 ‘하마르티아’가 아니라, ‘하마르티아’를 가장해 자신의 욕망을 한계 없이 드러내는 폭정을 한 것이었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 겸 추창민 감독의 영화 [7년의 밤]은 최현수(류승룡 분)·오영제(장동건 분)이라는 두 아버지를 등장시킨다. 두 아버지는 ‘하마르티아’를 각각 다른 형태로 드러낸다.

두 아버지: 죄의 늪에 빠진 어린 양들

최현수와 오영제는 교통사고로 운명의 악연을 맺는다. 12세 된 오영제의 딸이 한밤 중 한적한 도로에 뛰어들었다가, 최현수의 차에 치어 죽은 것이다. 최현수는 전형적인 뺑소니사고 범죄자처럼 행동한다. 오영제는 딸이 사망한 과정을 파악해 가면서 최현수를 옥죄어가는 것이다.

작중 묘사되는 두 아버지는 저마다 다른 ‘하마르티아’를 드러낸다. 최현수에게는 자신이 어찌하지 못하는 태생적 한계가 있다. 그 한계로부터 비롯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평생을 억눌러왔지만, 그 한계 때문에 순간 잘못된 선택을 하면서 살인자가 됐다.

오영제의 ‘하마르티아’는 최현수의 상황과 다르다. 오영제는 딸의 사망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 하지만 오영제는 전형적인 싸이코패스였다. 자신의 잘못 따위는 일절 있을 수 없는 인간이었다.

자신의 편리대로 상황을 판단하는 본성 자체는 엄격히 말해 ‘하마르티아’라고 보기는 어려웠지만, 더 큰 비극을 만들어가는 결정적 계기였기 때문에 거시적으로는 ‘하마르티아’ 역할을 한다.

영화 [7년의 밤]은 최현수·오영제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죄악들을 어두침침하게 묘사한다. 특히 최현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그 노력 자체에만 집착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긴다. 오영제는 오히려 딸의 사망을 본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도구로까지 활용한다.

7년의 밤

그리하여 [7년의 밤]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씻어야 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죄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두 아버지들을 묘사한다. 그런 관점에서 최현수·오영제의 주변을 맴돌면서, 모두에게 외면 받은 최현수의 아들 최서원(고경표 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안승환(송새벽 분)은 결정적인 열쇠 역할을 한다. 원죄를 씻기 위한 정석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바로 안승환이기 때문이다.

안승환의 행적을 중심으로, 최현수·오영제의 운명적 충돌을 바라보면 두 아버지는 그저 자신의 한계를 끝내 깨닫지 못한 채 죄악을 쌓는 가련한 어린 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화살이 허공을 날고 있다면, 그 화살은 이미 활시위를 벗어난 것이다. 정해진 과녁에 꽂히면 좋겠지만, 세상일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상황의 변화에 따라, ‘올바른 과녁’ 자체가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람은 끊임없이 죄를 짓는다. 그 죄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속죄다. 하지만 어떤 것이 올바른 속죄인지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종교에 의지하면서 끊임없이 죄를 용서받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쉽지 않은 길을 평생토록 걸어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다. 그리하여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자신을 희생해 모든 사람의 죄를 빌었다고 말하고 있고, 불교에서는 끊임없이 용서와 자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 과정을 밀도 있게 묘사한다. 하지만 원작소설에 비해 인물 간 갈등 구도가 단순해지면서 촘촘한 재미가 다소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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