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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해에는 그 나름으로 기념할만한 가치가 있다. 모든 시대는 앞의 시대를 이어받아 뒤의 시대로 가는 발판이 되는 과도기이고, 변화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변화의 순간을 기억하고자 한다면 어떤 사건이 일어난 지, 누가 태어난 지, 죽은 지 10년, 50년, 100년을 기념하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2017년에는 어떤 사건을 기념할 수 있을까? 나는 두 가지 사건을 기념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사건은 500년 전인 1517년에 마르틴 루터라는 한 남자가 교황에 도전장을 내민 일이다.

유럽을 분열시킨 종이 한 장

당시 독일의 성직자였던 마르틴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비롯한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고발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문서를 그가 사는 비텐베르크(Wittenberg) 성(城) 교회 대문에 걸어놓았다. 유명한 ’95개 조 반박문’이다.

이후 유럽의 종교 지형은 영원히 달라지게 된다. 우선 루터가 사는 독일을 중심으로 가톨릭에서 개신교가 갈라져 나왔다. 그의 주도로 본격화된 종교개혁은 이후 100여 년 넘게 지속될 격렬한 종교 분쟁의 씨앗을 뿌린 사건이었다. 이후 영국, 스위스,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까지 신교가 확산되었다.

비텐베르크의 마르크트 광장에 서 있는 루터 동상.
비텐베르크의 마르크트 광장에 서 있는 루터 동상

그러나 종교 개혁이 만들어낸 파급 효과는 단순히 가톨릭과 신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는 무언가였다. 당시 유럽인들에 있어서 신은 삶의 전부까지는 아니지만, 전부에 준하는 엄청난 존재감을 가졌었다. 이제 그 세계가 두 쪽으로 분열된 것이었다.

물론 마르틴 루터가 이 모든 변화를 만든 것은 아니다. 루터는 그보다 이전의 중세시대에 본격적으로 누적되던 시대의 변화상을 임계점을 넘어선 상태로 바꾸어낸 사람에 가까웠다. 루터로부터 천년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고대에서 중세로

6세기 유럽은 로마가 멸망한 직후 찾아온 암흑시대였다. 아득히 고대부터 이어져 와 동쪽과 서쪽을 이어주던 지중해 무역 네트워크는 7세기가 되자 이슬람 제국이 북아프리카와 시리아를 장악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동방에서 온 전염병으로 사람들은 파리 떼처럼 죽어갔고 이민족들이 유럽 전역을 이동하고 다니면서 도시를 불태우고 마을을 약탈했다.

설상가상으로 기후까지 점점 서늘해지고 있었다. 도시의 크기는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이전 시대보다 더 적은 에너지를 썼으며 동원할 수 있는 군대는 로마 시대의 그것보다 작아졌다.

그래도 유럽이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었다. 그 대신 유럽은 다른 시대로 고통스럽게 이행하고 있었다. 9세기 이후 암흑기의 혼란이 대강 정리되었다. 전 유럽을 들쑤시던 이민족들은 이제 정착해서 농부가 되었다. 유럽 문명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잃었지만, 교황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의 네트워크가 이전에 야만족들의 땅이던 독일, 폴란드,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까지 확장되면서 대륙의 지도를 점차 바꾸고 있었다.

기후 조건은 상당히 좋아졌다. 이례 없이 온화한 기후가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이어지는 ‘중세 온난기’가 찾아온 것이다. 이제 도시는 다시 성장했고, 사람들은 신에게 다가가고자 하늘을 찌르는 대성당을 짓고 있었다. 이 시기가 바로 번성하던 중세 성기(High Middle Age)이다.

1163년 공사가 시작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은 중세 성기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
1163년 공사가 시작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은 중세 성기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중세의 번영은 영원히 가지 못했다. 14세기쯤 되니 로마를 몰락시킨 주역들이 유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세상을 멸망시켰다는 정체 모를 유목민 군대가 몰려오고 있었다. 이들은 세균을 옮겨왔고 번창한 도시는 균이 번식할 최고의 창고가 되어주었다. 흑사병으로 다시 사람들이 파리처럼 죽어 나갔다. 북유럽과 남유럽을 이어주던 상업 네트워크는 또다시 쇠퇴했다.

그리고 중세온난기가 끝나고 이후 500년간 지속할 소빙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로마의 멸망이 중세라는 새로운 종류의 시대를 열어젖혔듯이 중세 후기의 위기 또한 새로운 시대로 유럽인들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영광을 쟁취하고 암투를 벌이고 전염병으로 죽어가고 신에게 영감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고 있지 못했지만 말이다.

중세의 가을

재앙의 시기였던 14세기는 서양(유럽과 이슬람 세계)과 동양(중국과 동남아시아)이라는 별개의 세계가 칭기즈칸의 후예가 만들어놓은 무역 네트워크를 통해 점차 하나의 세계로 합쳐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통합 과정이 굉장히 폭력적이고 강제적이었지만 어쨌든 일단 통합이 이루어지고 나니 그동안 고립된 세계의 종교인, 상인, 학자들이 활발히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후진적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기도 어려웠던 유라시아의 서쪽 귀퉁이인 유럽에 이제 화약, 나침반과 같은 중국의 문물들이 유입되었다. 한편 확장된 유럽은 위기에도 붕괴하지 않고 이전보다 더 빠르게 회복되었다.

15세기가 되니 독일에서는 금속 활자를 활용한 인쇄술이 등장했고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통일되었으며 에스파냐는 아메리카로 향할 배를 띄우고 있었다. 교회의 빈자리를 국가와 상업이 채우고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를 묘사한 그림.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콜럼버스를 묘사한 그림.

하지만 왕과 상인들은 회복했지만, 사람들의 정신은 그에 발맞춰 회복하지는 못했다. 200년에 가까운 정치적, 경제적 위기 동안 사람들의 삶을 구원해줄 수 없었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는 상당한 손상을 입은 상태였던 것이다. 15세기에는 각지에서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종교 운동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무소불위의 교황에 반격할 새로운 수단들도 갖춰졌다.

새로이 성장한 알프스 이북의 유럽은 교황의 권위 바깥에서 운신할 정치적 공간을 마련해주었고, 인쇄술은 막강한 조직력을 통해 교황으로 권위를 집중시키던 가톨릭교회의 통제력에 흠집을 냈다. 이런 변화상들이 16세기까지 차츰차츰 누적된 상태에서 루터는 쐐기를 박은 것이었다. 그리고 기존의 질서는 굉음을 내며 쪼개지기 시작했다.

과학 혁명이 시작되다

서구인들의 인식 세계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변곡점이었던 종교 개혁은 종교를 넘어 지성계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사실 당시 대부분 지적 활동은 종교적 맥락 하에서 이루어져야만 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종교 개혁은 그런 의미에서 시작에 불과했다. 16세기 유럽에서는 이후 사람들이 지식을 찾고 그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을 완전히 바꾸어버릴 일련의 변화가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과학 혁명이었다.

코페르니쿠스(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일)
코페르니쿠스(1473년 2월 19일 – 1543년 5월 2일). 과학 혁명은 코페르니쿠스가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1543년)을 출간해 지동설을 선언하는 것으로 시작해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1687년)으로 종결됐다.
물론 과학 혁명이 종교 개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촉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쇄술의 확산, 상인과 국가라는 교회 바깥에서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의 등장이라는, 종교 개혁과 같은 시대적 유산을 등에 업고 시작되었다.

종교 개혁가들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가톨릭교회였다면, 자연철학자(이 시대에는 과학을 자연에 대한 철학인 자연철학이라고 불렀다)들이 극복해야 할 조직은 대학이었다. 당시 대학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장악한 상태였고, 학자들은 자연의 운행 원리를 숙고하고 신의 섭리로 풀어내는 일을 했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지식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기존의 권위가 흔들리자 몇몇 도전적인 사람들은 지금 갖고 있는 지식보다 더 나은 지식을 찾기 시작했다. 16세기 그들이 처음 찾은 것은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의 전통이었다.

그 시대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시대보다 더 지혜롭고 박식한 이들 적극적으로 지적 활동을 하던 시대로 여겨졌다(어느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후에 사람들은 이를 ‘르네상스’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재생 혹은 부활이라는 의미이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11)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511)

지금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보다 더 정확한, 고대 사람들의 지혜를 최대한 더 원본의 형태로 복원하는 작업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당시 사람들에겐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지적 활동이었다.

세계관의 대변혁과 동의어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주인공인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도 사실 비슷했다. 그는 자신의 저작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1543)를 명목상으로는 “고대 자연철학자들의 모델을 더 정확하게 복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전에 없던 지식을 추구하다

그러나 유럽의 지식 세계는 이를 넘어선 전환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제 단순히 고대의 지혜를 복원하는 일들의 한계는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선 유럽인들은 아메리카를 발견하면서 지리적 지식이 엄청나게 바뀌었다.

그리고 발견의 시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도 바꾸어나갔다. 학자들은 자신들의 지적 활동을 “지도의 빈 공간을 채워넣는” 발견으로 은유하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받아들였고 그 세계를 탐험해나가야만 했다.

프랜시스 베이컨과 같은 학자는 과학 활동이 가져다줄 놀라운 실용성에 주목하였고 국가가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시계와 나침반, 항해술의 발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를 기계처럼 인식하게끔 만들었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바탕으로 (그리고 상업으로 정치권력을 만든 메디치 가문의 지원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교황에 도전했다. 그는 또한 자연에 대한 이해를 수학적으로 표현할 것을 주창하기도 했다. 데카르트는 이런 흐름을 이어 받아 세계를 입자로 가득찬 기계로 그려냈다.

르네 데카르트, [철학원리] (1644) 중에서 (René Descartes. Principia philosophiae. Amsterdam: Apud L. Elzevirium, 1644.)
르네 데카르트, [철학 원리] (1644) 중에서 (René Descartes. Principia philosophiae. Amsterdam: Apud L. Elzevirium, 1644.)

“신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재하고 210년이 지난 뒤인 1727년이 되자 사람들이(적어도 지식인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은 몰라볼 정도로 바뀌어 있었다.

1727년은, 200년간 이어져 온 유럽 지성계를 종합해낸,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이 죽은 해였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시인이었던 알렉산더 포프는 뉴턴의 업적을 기리면서 이런 시를 쓰기도 했다.

“자연과 자연의 이치는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신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것이 광명이었도다.”

이는 허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신의 이치를 더 잘 알아가기 위해서 과학을 택했다. 뉴턴은 자연철학을 수학적 방법론으로 풀어내면 신의 섭리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프린키피아] (Principia, 1687)의 원래 이름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라틴어: 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필로소피아이 나투랄리스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 줄여서 [프린키피아] (Principia, 1687)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라틴어: 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필로소피아이 나투랄리스 프린키피아 마테마티카). 줄여서 [프린키피아] (Principia, 1687)
그렇게 탄생한 근대 과학, 과학적 방법론은 팽창하는 대서양 경제와 결합하여 무서운 속도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사람들은 게걸스럽게 지식을 집어삼켰고 이전 사람들보다 늘 더 놀라운 것을 만들어냈다. 자연이 돌아가는 방식을 기계의 작동으로 보던 사람들이 더 좋은 기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어찌보면 자명한 것이었다.

1517년에서 300년 가량이 지난 19세기 초가 되자 영국의 기계 제작자들은 증기기관을 통해 엄청난 동력을 영국 전역에 공급하려고 하고 있었다. 과학은 이제야 기술과 온전히 결합하였고 그 위력은 이제 유럽이 아니라 세계를 집어삼켰다.

과학은 런던의 굴뚝에서, 광동성의 앞바다에서, 인도의 평원과 아메리카의 대초원에서 활약했다. 영국군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걱정은 없네. 우리에겐 맥심 기관총이 있고, 저들은 없으니까”라는 노래를 부르며 막강한 힘을 여실없이 보여주었다.

세계의 역사를 바꾼 '맥심' 기관총 (Maxim gun, 1883)
세계의 역사를 바꾼 ‘맥심’ 기관총 (Maxim gun, 1883)

산업화된 공장에서 나오는 파괴적인 무기와 지구 전역으로 군사력을 보내게 만들어준 군함, 열대 지방에서도 풍토병을 이겨내고 작전을 가능하게 해주는 의약품은 모두 과학에서 나왔다.

세계를 뒤흔든 열흘

그러면서 어느새 시대는 기념할만한 두번째 사건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100년 전에 일어난 그 사건도 500년 전과 마찬가지로 단 하루만에 세계 전역을 충격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사실 500년 전의 사건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리기까지 몇주는 걸렸을 것이다. 그 차이도 과학이 빚어낸 것이었다.

바로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었다.

세계를 완전히 바꾼 러시아 10월 혁명 그리고 레닌 (1917)
“세계를 뒤흔든 열흘”(존 리드) 러시아 10월 혁명과 레닌 (1917)

질주하는 산업의 기관차

산업혁명은 아이작 뉴턴의 나라인 영국에서 그치지 않고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산업혁명을 처음 일으킨 자본가와 기술자는 자신들이 통제하지 못할 힘이 세상에 풀려나왔음을 곧 깨달았다. 우선 산업혁명은 어느 순간부터 모태였던 영국을 벗어났다.

그리고 독일과 미국에서 ‘2차 산업혁명’이라는 형태로 제대로 만개했다. 이 두 나라에서 카르텔과 콘체른, 트러스트라는 거대 기업집단이 등장했다. 이런 기업집단은 전기를 동력으로 하는 신산업과 대공장을 자신들의 무기로 삼았다. 중화학 공업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중화학 공업은 기술적으로 고도화된 전쟁 무기를 만드는 데에도 매우 유용했고, 전쟁을 위한 효율적인 동원체계를 갖추는 데에도 아주 중요했다.

2차 산업혁명이 40년 가량 지속되자 각국은 누가 게임의 승자인지를 겨루고자 했다. 그렇게 시작된 제1차세계대전은 전례 없던 규모로 병력을 동원하고 장에 퍼부었다. 전쟁은 다시 기존 시스템을 새로운 시스템으로 바꾸도록 강제했다. 비서구 국가들이 과학과 산업의 결합에 적응하지 못해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듯이 이 새로운 전쟁에 적응하지 못하면 유럽 내에서도 누군가는 도태되고야 말 것이었다.

인간의 기계문명이 최초로 자신에 대한 전 지구적 대량 살을을 가져온 첫 번째 체험, 제1차 세계대전.
인간의 기계문명이 최초로 자신에 대한 전 지구적 대량 살상을 가져온 첫 번째 체험,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러시아가 그런 나라였다. 제1차세계대전 내내 러시아는 몇 번의 선전을 제외하면 훨씬 조직적, 기술적 역량이 우수한 독일군에게 처참하게 연전연패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산업혁명에 아예 적응 못한 그런 나라는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세르게이 비테 백작의 주도 하에 이 나라에는 고도로 집중된 대규모의 중공업이 자리를 잡은 상태였고, 경제가 산업화되고 도시화되면서 겪게되는 사회적 혼란을 사람들은 후진적 정치체제와 함께 동시에 직면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중심과 주변의 경계에서 언제나 새로운 시도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페트로그라드는 1917년의 비텐베르크였다.

과학과 혁명가들의 비전

가톨릭이 지배하던 세계를 뒤집고자 했던 루터처럼 혁명가들은 세계를 뒤집고자 했다. 이 한 줌의 혁명가들은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백만의 피도 기꺼이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본인들의 피는 더 중요한 피였기에 지불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산업혁명이 제기한 사회적, 경제적 도전과 러시아의 전통적 후진성을 한 번에 일소하고자 마음 먹었다.

러시아 혁명의 주인공인 블라디미르 레닌은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와 전기를 합친 것이다”라고 했고, 세계 각지로 혁명을 수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레닌이 죽고나서, 어쩌면 죽기 전부터 공산주의는 개신교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다. 신앙을 뒤엎으려 했던 종교 개혁가들은 30년 전쟁이라는 끔찍한 형태로 구질서의 격렬한 반발과 마주하자 각자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자는 소박한 타협책으로 후퇴했다.

이제 스탈린 시대의 혁명가들은 세계를 뒤엎는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를 뒤엎는 아주 소박한 목표에 집중하기로 했다. 스탈린의 충직한 기술자들은 이 나라를 ‘제2의 미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외치고 다녔다. 미국은 저주받을 자본주의 국가였지만, 동시에 가장 놀라운 기술적 성취를 이룬 근대의 모범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협책은 게임의 규칙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가들은 1517년의 사건 이래로 서구인이 계속해서 해온 사고를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이 세상은 기계와도 같은 것어서, 적절한 동작 방식만 확인된다면 얼마든지 어떤 형태로든 조작할 수 있는 것이다. 기계를 새 모델로 바꾸거나 훨씬 빠른 속도로 가속시키는 것 또한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사회든 개인이든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 이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신은 이제 아니었다. 뉴턴 시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신에게 다가가는 도구로 과학을 선택했다. 하지만 뉴턴의 후예들은 과학을 그 이상으로 발전시켜서 이제 신마저 뛰어넘으려고 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인민위원들은 신을 무덤에 파묻고, 교회를 폭파시켜 구질서와 단절하고자 했다.

또다른 종교로서의 공산주의

그러나 절대적 진리는 신, 성경, 교회, 성직자라는 이름을 공산주의적이고 조금 더 근대적으로 보이도록 모양만 바꾼 채 다시 등장했다. 야훼가 약속한 천년왕국은 공산주의 유토피아였고, 성경은 이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책이었다. 레닌은 예수와 같은 선지자였고, 각지의 공산당사는 교회와 같은 역할을 했다. 성직자의 몸은 썩지 않는다는 신화는 과학을 활용해 레닌의 몸을 실제로 썩지 않게 만들면서 현실에 구현되었다.

스탈린에 의해 '박제가 된 혁명가' 레닌
스탈린에 의해 ‘박제가 된 혁명가’ 레닌

혁명가들은 기독교 대신 공산주의를 믿으면서 사회를 개조해나가기 시작했다. 과학은 이때나 저때나 도그마를 위한 도구로 동원되었고, 사실 많은 과학자들이 이를 진심으로 믿었다. 심지어 이들은 내전과 기아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구시대 교육의 때가 묻지 않아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적용해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재료라고 여겼다.

사회를 더 과학적인 방향으로 개조하겠다는 꿈은(이쯤되면 대체 그 과학적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의문이 가지만)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공산주의의 교황이자 나라의 으뜸가는 과학자인 이오시프 스탈린이 한 연설을 보자.

소비에트의 위대한 영도자 스탈린 동지
스탈린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하고, 터키의 지방장관에게 패하고, 스웨덴의 봉건영주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주들에게 패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에게 패하고, 일본 남작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가 뒤떨어진 탓에 모든 사람에게 패했습니다. 군사적으로 뒤떨어져서, 문화적으로 뒤떨어져서, 농업이 뒤떨어져서 패했습니다. 그들이 러시아를 친 것은 그게 이익이 되고 그러고도 무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혁명 전의 시인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비참하다, 너는 풍요롭다, 너는 강력하다, 너는 무력하다, 나의 조국 러시아여.’ (…)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이 뒤떨어졌습니다. 10년 안에 그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소련의 노동자와 농민에게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피로 만든 강철

그리고 10년 뒤 정말 히틀러가 소련을 쳐들어왔다. 그러나 스탈린은 10년 사이에 허허벌판 위에 제철소와 트랙터 공장을 지어놨고, 이는 효율적인 전차인 T-34를 끝없이 생산해내어 독일을 격파할 수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에서 맥없이 당하던 때에 비하면 엄청난 성과였다.

소련 T-34 전차
소련 T-34 전차

그러나 사회의 발전에 가속페달을 밟을 것이며 그러기 위한 확실한 교범이 있다는 발상은 엄청난 피를 요구한 것이었다. 합리적으로 경영되는 집단농장을 만들기 위해 수백만의 농민이 기근으로 아사했다.

더 정확한 생산관리를 위해서 소련의 극오지에 죄수 노동력이 강제로 배치되었다. 이는 마치 나무를 뽑아다가 필요한 곳으로 옮겨 심는 것 같은 일로 여겨졌다.

거대 기획의 시대

사실 이런 발상은 레닌과 스탈린의 소련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세계의 선진산업국이라는 곳은 모두 다 이런 거대한 규모의 기획을 통해 각자의 도전에 대응해가고 있었다. 통치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하고, 산업 합리화를 위해 계획을 도입했고, 국토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개발계획을 수립했다.

때로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인구학적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아주 적극적인 조치가 실시되었다. 히틀러의 독일이 여기서는 가장 선두에 있었다. 그들은 수백만 유대인을 제거하면 사회가 근대 사회에 걸맞는 모습으로 일신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히틀러
히틀러

일본도 스탈린과 히틀러의 모범을 받아들여 동아시아를 하나의 유기적 공간으로 통합하려고 했다. 일본을 중심으로 조선, 만주, 대만, 중국, 동남아시아는 모두 기계의 부품과 같이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일본인은 일본인의, 조선인은 조선인의, 중국인은 중국인의 역할을 다하면서 대동아공영권에 아주 합리적으로 기여할 수 있었다.

이는 소위 전체주의라고 불리우는 그런 일당독재 권위주의 국가들에서만 펼쳐진 일이 아니다. 자유주의 진영도 정도는 다르지만 비슷한 일을 진행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밀고나가면서 권위주의 국가들에서 행했던 거대 건설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다.

많은 자유주의 국가들에서는 이미 인구학적 위기를 출산 장려 혹은 통제로 해결해야한다는 파시즘의 방법론을 색깔을 바꿔 들여왔다. 몇몇 사람들은 소련의 계획경제를 어느 정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후 복지국가는 이런 기획들을 흡수해서 만들어진 기획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어떤 종류가 되었든 이런 기획들은 하나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었다. 바로 세상은 기계와 같으며 기계의 작동원리를 알면 얼마든지 조작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과장을 섞어서 말하자면 모두 과학 혁명을 통해 확립된 세계관의 자장 아래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성찰

하지만 사람은 경험에서 배우는 존재다. 수천만 명의 피를 흩뿌리고 나자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과학에 대한 강한 회의주의가 등장했다. 이들에게 과학은 폭력과 비슷한 말이었고, 문명은 오히려 억압을 의미하는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과학 이전의 시대, 문명 이전의 시대를 겪어보지도 않고 그리워했다. 그 시절 사회는 순수했고 사람들은 무지했기에 오히려 더 행복했다는 식의 주장들이 많은 인기를 끌었다. 어떤 이들은 과학을 통해서 획득한 지식이 그렇지 않은 지식보다 무엇이 더 낫냐고 묻기도 했다.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1945년 1월 찍음) (위키미디어 공용)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1945년 1월 찍음) (위키미디어 공용)

위태로운 문명에 대한 공허한 성찰

이런 비판은 기존의 생각을 비판하는 데 열중한 나머지 세계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내는 데는 실패했다. 과학은 엄청난 폭력으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상상도 못하는 복리를 안겨주기도 했다. 과학을 통해서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안전하게 아이를 낳았고, 조상들보다 훨씬 오래 살았다.

이제 사람들은 늘 내일 식량을 걱정하며 배를 곯지 않아도 되었고, 훨씬 청결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업적에는 과학이 빠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19세기 중엽 영국의 많은 과학자들은 콜레라의 발병 원인을 불결한 공기나 하층민의 더러운 생활방식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대 의학자 존 스노는 오염된 우물 지도와 콜레라 발병 지도를 겹쳐보이면서 콜레라가 오염된 물을 통해 전파된다는 것을 밝혀냈고 수많은 목숨을 살려냈다. 존 스노 이전의 과학자들이 보여준 것처럼 사실 과학은 완벽하지 않다. 그리고 존 스노가 보여준 것처럼 잘못된 지식은 과학 네트워크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언젠가 걸러져 더 타당한 지식들로 대체되었다. 이 모든 업적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존 스노우(John Snow, 1813~ 1858). 빅토리아 시대의 의사, 콜레라가 오염된 물에서 비롯했다는 걸 연구를 통해 밝혀내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 과학은 죽음과 파괴에도 관여하지면, 생명과 구원에도 관여한다.
존 스노우(John Snow, 1813~ 1858). 빅토리아 시대의 의사, 콜레라가 오염된 물에서 비롯했다는 걸 연구를 통해 밝혀내 수많은 목숨을 구했다. 과학은 죽음과 파괴에도 관여하지면, 생명과 구원에도 관여한다.

그리고 세상과 사회를 기계처럼 보는 시각은 나름 그것이 타당성 있는 모델이었고 설명력 있는 모델이었기 때문에 지속된 것이었다. 얼마 만큼 힘을 주면 얼마 만큼 운동한다는 공식은 현실 세계의 운동 또한 놀랍도록 잘 설명해주었다. 이런 인식틀에는 행성의 움직임과 혜성의 주기, 원자의 결합과 생명의 발생까지도 너무 잘 들어맞았다.

성과를 내고 더 나은 지식을 향한 토대가 되어주는 한, 이 모델은 언제든지 좋은 모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점점 헷갈려진다. 그러면 대체 우리는 과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세상은 기계인가?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이 기계와 같이 묘사해야하는가?

뇌: 모든 것을 해결해줄 열쇠?

제2차세계대전 이후 이런 질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싸메게 만든 질문이었다. 그러던 와중에도 과학은 끝없이 발전하고 있었다. 20세기 들어 많은 과학자들이 1517년에 비텐베르크에서 시작된 인식틀을 가지고 인간의 본질이라고 여겨지는 뇌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뇌영상기술의 발전과 인간 유전체학이 세기말에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이 분야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fMRI(func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 기능적 자기 공명 영상) 기법으로 뇌 안을 들여다보니 정말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많은 과학자들은 뇌의 국소적 부위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베르니케 영역은 언어를 듣고 이해하는 곳이고, 브로카 영역은 말을 만들어내는 영역이다. 편도체는 공포를 담당한다. 도파민은 동기를 만들어내는 호르몬이다.

fMRI(func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 기능적 자기 공명 영상) 이미지를 살펴보는 의사의 모습.
fMRI(func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 기능적 자기 공명 영상) 이미지를 살펴보는 의사.

이전에는 너무 궁금해도 도저히 알 수 없던 뇌의 비밀이 한 순간에 풀려나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뇌를 마치 컴퓨터와 같은 연산기계에 비유하면서 그 작동원리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제 뇌를 앎으로써 인간의 본질과 새롭게 발견한 진리를 알 수 있고, 과학을 둘러싼 저 헛된 논쟁에도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마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았다. 정신이 뇌라는 물질로 온전히 설명된다는 사실은, 그동안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오던 자유의지나 자아의 존재에 새로운 의문을 던져주었다. 산 넘어 산이었던 것이다.

뇌를 다시 보다

[송민령의 뇌과학 연구소]에서 저자 송민령은 뇌과학을 통해 색다른 화두를 던진다. 이 책도 인간의 지성이 최후에 정복할 뇌에 대해 정답과 진리를 찾아내면 우리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일까?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뇌과학을 연구하면서 얻어낸 통찰을 통해서 절대적 진리를 비롯하여 우리의 지적 문화에 영향을 끼쳐 온 수많은 개념을 다시 생각해볼 때라고 말한다.

뇌과학 연구소

저자는 최신의 뇌과학 연구들은 뇌를 그런 단순 기계로 보는 시각과 거리가 있다고 말한다. 뇌는 기계처럼 정해진 절차와 기능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보다 바깥의 밝기, 몸의 상태, 유전자, 어렸을 적 경험, 우연히 마주치는 수많은 사건들과 상호작용 하면서 끝없이 변해간다.

기본적으로 신경세포의 가소성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렇게 보면 중요한 것은 나라는 개체보다는 나와 끝없이 상호작용해 가는 사람, 사물, 환경과의 관계다. 나는 내가 침범할 수 없는 독립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라는 개체의 경계조차도 굉장히 모호하여, 계속해서 변해간다.

실체도 허상도 아닌 존재하는 ‘현상’ 

그렇다면 자유의지나 자아는 어떻게 되는 건가? 그런 것들은 실재하지 않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저자는 이런 식의 상대주의 또한 거부한다. 애초에 이런 인식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자아는 마치 수면 위의 파도와도 같은 것이다. 파도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물의 움직임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파도는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다시 파도가 일렁이면서 물 위에 드러난다. 파도는 실체는 없을지 몰라도 분명이 현실에 존재하는 현상이다. 실체가 없다고 해서 그것을 허상으로 치부하는 것부터가 실체에 대한 집착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파도가 허상이라면 수백년 동안 파도가 치면서 깎여나간 바위는 무엇으로 설명해야할 것인가?

바다 바위섬 파도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과학

저자는 이런 식의 인식틀이 보편적 진리라는 이름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에 의문을 던져봐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완결적이고 분절된 개체, 절대적 진리의 추구, 기계적인 세계라는 개념들이 과연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당연하게 갖고 있는 사고의 도구들일까?

저자에 따르면 이는 서구에서 지배적인 사고방식으로, 개체보다는 관계를, 절대적 진리와 선의 추구보다는 현실 속에서 자기수양을 강조했던 동아시아 문화권의 사고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서구의 세계관은 자연스럽게 과학에서 던지는 질문의 내용을 결정했었다. 사실 가장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여겨지던 과학은 신의 섭리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을 반영했던 것이다. 애초에 과학을 가장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그들의 사고 체계에서 신의 자리를 과학으로 대체했기에 나온 결과물이다.

하지만 과학이 정말 대단한 점은 모든 지식과 도그마도 언젠가 도전받게 된다는 그 유연성이다. 얄궂게도 과학은 계속 발전하면서 그것을 낳은 열망 자체에도 의문을 던지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이것이 진실은 없고 모든 것은 허상이라는 허무주의로 직행해야할 이유는 없다.

물론 절대적 진리가 아니니만큼 과학도 결국 아무리 용을 써봤자 자의적 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의적인 기준이 아니면 뭐 다른 해법은 있는가? 논리가 불완전하다는 말이 그걸 당장 폐기해야한다는 말은 아니다. 어쨌든 당면한 문제를 최적의 수준으로 해결해준다면 그것은 유용하고 좋은 도구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신뢰할만한 검증 체계가 존재한다면 서로 조금씩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논쟁하면서 과학을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어차피 모든 과학적 연구는 무슨 짓을 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언젠가는 더 나은 설명으로 대체될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 그 부족함을 파악하고 보완하면 그것은 완벽한 진리일까? 그 또한 다음의 연구를 위한 디딤돌에 지나지 않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인간이 과학을 발전시켜온 과정이었으니 그 디딤돌 하나하나가 위대한 디딤돌인 셈이다. 물론 간혹 더 위대한 디딤돌도 있겠지만.

계단 디딤돌

과학의 새로운 시대?

1517년의 종교 개혁은 사실 그런 의미에서 더욱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마르틴 루터는 개인이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와 맺는 고유의 관계에 주목했다. 이후 뉴턴은 행성의 운동을 과학의 언어로 체계화하면서 서구적 세계관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완성시켰다. 분절적인 개인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세계관을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연결시켰다.

사람들은 이를 바탕으로 농업 시대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한 현대의 화석연료 문명을 일으켜세웠다. 하지만 그 1517년에 시작한 지적 전통의 최첨단에 서있는 뇌과학은 1517년의 정신을 점차 부정해나가고 있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뇌과학은 인간의 뇌는 분절적이지도 않고, 우리 자신은 절대적이고 고정된 실체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제 사람들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계속해서 변해가는 우리의 속성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이런 새로운 발견의 흐름 속에서 과학을 제한적 현실주의로, 그리고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는, 절대적 진리를 희구하는 마르틴 루터의 정신보다는 괴력난신(怪力亂神)[footnote]괴력난신 괴이(怪異)와 용력(勇力)과 패란(悖亂)과 귀신에 관한 일이라는 뜻으로,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가사의한 존재나 현상을 이르는 말. [/footnote]을 논하지 말고, 현실 속에서 자기수양을 강조하는 공자의 정신과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공자

거대 권력의 시대 

그렇다면 1917년으로 가보자. 2017년은 1917년과 다른 새로운 시대일까? 만약 새로운 시대라면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도 1917년의 혁명가들이 바라봤던 것에서 변할 수 있을까? 나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2차 산업혁명은 유례없이 거대한 조직과 권력들을 만들어냈다. 1870년부터 1970년까지의 100년은 거대지향주의(Gigantomania) 시대였다.

2차 산업혁명의 풍경을 살펴보자.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에서 찍혀나오는 수많은 자동차는 포드주의 시대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공장 한 쪽에는 그 거대한 생산라인에 기반한 거대한 노조, 그 노조들을 엮어낸 거대한 사회주의 정당이 있었다.

반대 쪽에는 거대 기업들이 거대한 소비자 무리를 상대로 마케팅을 펼쳤고 거대 언론사들이 국민 여론을 좌지우지했다. 그런 조직체 속에서는 중요 결정권자가 모든 권력을 가졌다. 그런 지도자의 말 한마디로 기계처럼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는 조직을 보면서 사람들은 사회 또한 기계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1917년의 혁명가들은 그런 생각을 실제로 사회에 구현하면서 세계를 바꾸려고 나섰다.

포드 컨베이너 벨트 조립라인 (1913년)
포드 컨베이너 벨트 조립라인 (1913년)

권력의 종말

그렇지만 거대 권력은 빠르게 주도권을 상실하고 있다. 모이제스 나임은 그의 저서 [권력의 종말]에서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거대 조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두개의 핵심 조직이 판을 완전히 좌지우지 하는 시대는 점차 끝나가고 있다.

유럽에서는 점차 정당들이 확고한 장악력을 갖기 힘들어지고 있다. 유럽연합 의회는 리투아니아 같은 소국의 의사에도 휘둘린다. 제3세계의 기업이 갑작스럽게 유서 깊은 미국의 대기업을 인수하는 일도 벌어진다.

사람들은 여전히 뉴욕타임스나 가디언, 슈피겔, 르몽드 같은 대형 언론사를 중요 정보의 원천으로 삼지만, SNS와 수많은 인터넷 미디어는 이를 쉽게 의심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과거 수많은 노동자가 삶의 중추로 삼았던 대규모 노동조합 조직률은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거대 기계의 시대는 점차 수명을 다 해가고 있다. 세계화된 우리 시대의 모습은 잘 짜여진 기계보다는 생태계, 혹은 뇌와 더 비슷하다.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상징인 인터넷은 중앙의 누군가가 지시를 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웹의 아버지’ 팀 버너스 리의 결정적 공헌이 있었지만, 오늘날 대중화된 인터넷의 대명사인 월드 와이드 웹은 수평적 네트워크의 말단에 존재한 수많은 엔드 유저(컴퓨터 주인)가 자발적으로 서로의 컴퓨터들을 연결하지 않았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인터넷 라우터 경로를 시각화한 모습 (CC BY 2.5)
인터넷 라우터 경로를 시각화한 모습 (CC BY 2.5)

그리고 그 자발적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 돈 혹은 바이러스 등이 오가면서 우리 세계는 훨씬 더 긴밀하게 통합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심이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그 중심이 절대적인 중심은 아니다. 시점, 초점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중심은 계속 바뀔 것이고, 어떤 중심이 사라지더라도 다른 중심이 등장하여 그 네트워크의 빈 자리를 메꿔나갈 것이다.

마치 초점을 어디에 두드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신경세포 패턴이 완성되고 ‘지금’을 다르게 느끼는 우리의 의식과 같다. 아동학대와 같은 불행한 경험을 해도 네트워킹 방식을 바꾸어서 상처를 각자 나름대로 치유해나가는 우리 머리 속의 신경세포들과 비슷하다.

뇌 신경세포 뇌과학

흐려지는 경계

세계화 시대의 경제는 어떤가? 과거 산업은 수직계열화된 거대 기업집단이 단순 부품 하나하나까지 챙기면서 효율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 수직계열화된 기업의 생산네트워크가 세계 각지로 뻗어나가면서, 개별 기업의 경계는 점점 더 모호해지고 있다.

아이폰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미국의 개발진과 한국, 대만, 일본의 부품업체, 그리고 중국의 제조공장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배터리의 리튬은 남아메리카에서 왔을 것이다. 추운 겨울 서울의 사무실에서 기술자들이 야근하기 위해 뗀 난방은 카타르에서 온 천연가스가 원료였을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핵심 브레인들은 멕시코와 방글라데시에서 수입한 옷을 입고 일을 했을 것이다.

아이폰은 애플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우리 경제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애플의 영향을 받고 있는지 딱 잘라서 말할 수 있을까? 반대로 애플은 세계 경제의 어느 부분까지에서만 영향을 받는다고 잘라 말할 수 있을까?

기술혁명과 세계화로 우리 시대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했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1517년에 시작되어 1917년에 완성된 인식에 아직도 많이 머물러 있다. 그 시기에 만들어진 인식틀로 인간은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과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가 이 시대의 패권국인지, 또 다음 세계를 지배할 나라는 누구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친다. 물론 지배하는 자는 분명 있다. 당분간 그런 것이 사라질 날은 요원할 것이다. 다만 그 경계와 영향권이 극도로 모호해졌을 따름이다.

세계 글로벌 손바닥 손 지도

과연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라는 트럼프의 권한은 얼마나 될까? 13억의 지도자 시진핑은? 재닛 옐런 연방준비은행 의장이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누구에게까지 어느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누구도 정확히 대답하기는 힘들 것이다.

절대적 진리를 찾을 수 있고 고정된 실체에 집착하는 사고로는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여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방해가 된다. 대신 상호 연결된 세계에서 중요한 건 실체보다는 현상이고, 고정된 주체와 객체보다는 상호 간의 관계이며, 모든 상황에 통용될 수 있는 정답보다 현실에 맞추는 유연함이다.

다양한 과학의 필요성

그리고 그런 답을 찾아내는 일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과거의 인식틀이 서구인이 만들어온 인식틀이라면 새로운 인식틀은 그 바깥에서 나올 개연성이 더 클지도 모른다. 전통적인 지중해 중심부 바깥에 있던 알프스 이북에서 개신교가 탄생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동아시아인의 인식체계가 서구인의 인식체계와 근본적으로 다르거나 혹은 우월하다는 식의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인간 종의 보편성을 공유하고 있는 이상 둘 사이의 사고방식 차이는 근본적일 수가 없다. 그러나 2천년 이상 축적된 서로 다른 문화적 전통을 수십년에 걸쳐서 흡수하다보면 신경세포의 네트워크는 어떤 방식으로 차이가 나게끔 마련이다.

과학 활동이라는 문을 최초로 열어젖힐 때는 절대적 진리를 찾아나서던 그들의 방식이 더 적합했을지도 모른다(물론 나는 종적 차원의 생물학적 보편성 때문에 그보다는 대서양 경제와 무역의 확대라는 유물론적이고 지리적인 요인이 더 근본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누엘 카스텔이 ‘정보의 혼돈’이라고 표현한 ‘네트워크 사회’가 도래한 지금, 21세기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사고방식은 더 관계적이고, 더 상호의존적인 무언가일 것이다. 이는 적합성의 문제이지 우열의 문제는 아니다.

마누엘 카스텔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

물론 그 새로운 해법, 새로운 인식틀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아직 누구도 모른다. 그렇지만 모른다고 해서 가능성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서구인들도 그들의 세계관을 하루아침에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종교개혁과 과학혁명과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그들이 수백년 간 성찰하면서 만들어나간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들도 신비주의적인 전통이 있었고 그들도 관계를 중시했었다. 다만 과학과 사회의 대화 속에서 플라톤에서 시작된 사고방식이 루터와 뉴턴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머쥔 것일뿐이다. 그러니 지금 그 해결책을 모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리고 과학은 언제나 모르는 것을 인정하며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에서 시작된다.

동아시아가 찾아낼 길은 무엇일까

미국의 언론인인 패트릭 스미스는 [다른 누군가의 세기]에서 서구인들로 인해 동아시아인들이 겪게 된 정체성 위기를 조명한다. 서구인들은 그들의 강력한 힘으로 자신의 질서를 동아시아에 강제했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동아시아인들은 생각하는 법을 바꾸어야 했다.

책 패트릭 스미스 다른 누군가의 세기

몇몇 동아시아인들은 과거의 전통을 벗어던지고 서구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동아시아인들은 서구가 물질의 면에서는 뛰어날지 몰라도 정신적 깊이는 동아시아가 더욱 뛰어나며, 동아시아의 전통에는 근대 문명에 의해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주장은 동전의 양면일뿐이었다. 자신의 몸에 맞게 자신만의 옷을 새로이 만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다 헤진 옷을 갈아입지 않는 것도, 몸에 안 맞는 옷을 입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19세기와 20세기 내내 동아시아인들의 자기표상은 이 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해왔다.

그러나 저자는 그 정체성 위기가 점점 해소될지도 모른다고 전망한다. 그리고 만약 동아시아인들이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낼지도 모르는 21세기는 유럽이나 서구의 세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서구를 잘 알지만, 그들은 우리가 서구를 아는 것만큼 동아시아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더 잘 알아가는 과정은 서구를 더 잘 알아가는 과정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서구의 지적 전통에도 절대적 진리를 찾고자 하는 플라톤주의, 개체분절적 사고와 구별되는 전통이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숨가쁘게 달려오면서 그들 또한 그런 전통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대신 그들은 그런 전통을 열등하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동양적’이고 ‘아시아적’인 것으로 낙인 찍었다.

‘우리’가 줄 대답

눈부시게 발전하는 뇌과학은 과거에 열등하고 비합리적으로 여겨졌던 사고체계가 오히려 합리적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아시아가 스스로 자신의 인식틀을 발전시키고 그에 따라서 서구를 바라보면, 서구인이 바라지 못한 서구의 모습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과학을 받아들여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룩했던 것처럼 그들의 전통 또한 우리로 인해 풍성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서구가 만들어낸 과학에 빚을 진 비서구 사회가 할 수 있는 대답일 수도 있다.

끝으로 [송민령의 뇌과학 연구소]에서 나온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아시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변화한 세계에 더 잘 적응하기 위해서, 비단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를 이해하고 너를 이해하고 세상을 더 잘 살아가기 위해서,

“지식에 끌려다니지 말고 지식을 딛고 서기를,
그래서 남들이 만들어둔 문제를 빠르게 추격해서 푸는 단계에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창조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기를.”  

타인이 만든 질문에 끌려다니 않고, 스스로 문제를 창조할 수 있기를.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창조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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