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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황교익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소위 ‘일(본)빠’라고 비난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황교익이 일본 식문화에 경도된 듯한 인상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일본 요식업에는 벤치마킹할 만한 미덕이 많고, 한국 음식 문화도 자존심만 세지 개선할 구석이 많다.

황교익이 (주로 부정적인) 화제를 낳는 이유는 그가 주장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내용을 전하는 방법(형식)에도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최근 한 네티즌의 비판에 관해 “중졸 정도의 지적 수준” 운운하는 황교익의 대응은 그 인식의 천박함을 드러낸다. 고졸 이상만 음식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나. 대졸 이상만 음식을 평가할 수 있는가. 석사 박사만 무엇에 관해 ‘말할 자격’을 얻는가. 나는 이런 차별적 인식에 관해선 더는 진지하게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것은, 다시 간단히 말하자, 저열하고, 천박하다.

첨언하면, 의견(메시지)에 관해 논하지 않고, 그 의견을 말하는 사람(메신저)에 관해 왈가왈부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흔히 인신공격이라고 한다. 그것은 토론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화풀이에 불과하고, 자기 감정의 무의미한 폭로에 불과하다. ‘중졸’ 운운하며 자신의 이성은커녕 감정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대중과 교감하고 대화하는 위치에 선 ‘토론자’로서의 황교익의 모습은, 초라하고 불쌍해 연민이 생길 지경이다.

황교익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중졸" 운운하는 그의 언어에 관해선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황교익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중졸” 운운하는 그의 언어에 대해선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토론에서 ‘학벌’을 운운할 이유는 전혀 없고, 운운하는 순간 그는 더는 토론할 자격조차 없다.

노포와 파인 다이닝 

그래서, 일본 대중 식당 말인데…

‘노포'(老鋪; 대대로 이어지는 점포)로 대표되는 일본 요식업 문화가 현대 사회에 정말 적용 가능한지는 나는 아무래도 모르겠다. 당장 일본에서도 노포는 사실 수익성이 엉망이라 유지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기존 노포 세대는 이미 노인들이라 점포의 수익성이 낮아도 연금 등으로 부수적인 수입으로 생활을 꾸려왔지만, 미래에 이 점포를 물려받을 세대는 그럴 수가 없다.

300년된 일본 노포(출처: '천하'잡지 https://www.cw.com.tw/article/article.action?id=5083517
300년된 일본 노포(출처: ‘천하’잡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인 게 ‘좋은’ 음식을 만드는 데는 돈이 든다. 독창적인 레시피를 만드는 데는 시간이 든다. 시간은 돈이다.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 그것도 돈이다. 독특한 재료를 써야 할 수도 있다. 그것도 돈이다. 싼 값에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이란 사실 유지 불가능할 수밖에.

오히려 황교익이 계속 끌어내리려 하는 백종원식 솔루션이 결국 현대 사회 음식 문화에는 해답일 수도 있다. 일단 ‘파인 다이닝’(Fine Dining; 미식가들을 위한 최고급 식당)은 논외로 두자. 이거야 도제식 교육을 하든, 0.1g의 차이로 맛을 내든, 그러면서 비용이 얼마가 들든 어차피 비싼 값으로 다 커버 가능하니까. 그러라고 있는 식당들이니.

반면 1만 원 미만의 가장 대중적인 요식업 층위에는 백종원식 솔루션이 가장 적절할 수 있다. 정해진 레시피와 잘 짜여진 접객과 위생, 적당한 값에 적당한 메뉴를 제공하는 합리성. 물론 백종원 프랜차이즈가 뭔가 미묘하게 맛이 좀 떨어진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가격을 생각하면 뭐…

그럼 그 중간에 1만~3만원 대, 비싼 건 아니지만 싼 것도 아닌 외식 메뉴가 남는다. 그 비용을 생각하면 파인 다이닝에서 출발해 값을 낮출 순 없고, 오히려 백종원식 솔루션을 기반으로 플러스 알파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대중적인 레시피, 잘 짜여진 접객과 위생, 적당한 합리성을 기반으로 말이다. 그 위에 독자적으로 일부 레시피만 변형하거나, 더 좋은 재료를 더하는 식이 되겠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 골목식당에서 백종원이 계속하는 이야기다.

백종원이 말하는 '요리'와 '음식'은 서민적이다.
백종원이 말하는 ‘요리’와 ‘음식’은 대체로 대중적이고, 서민적이다.

그놈의 엄마 손맛

황교익은 한국 요식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데,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오히려 좀 구태의연하다. 자극적인 양념으로 맛있게 만드는 음식은 사실 맛없는 음식이라는 게 떡볶이 때부터 시작해 치킨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장의 요지인 것 같은데, 좋은 재료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음식이고, 아주 약간만 부재료를 가미해도 최상의 음식으로 완성된다. 이거 모르는 사람 별로 없다. 근데 이걸 7천 원, 8천 원짜리 식당에서 할 수 있나. 심지어 3천원짜리 분식으로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이거 너무 파인 다이닝을 위한 격언 아닌가. 파인 다이닝이 좋은거 누가 몰라 돈이 없으니까 못 먹지.

게다가 입맛이라는 건 너무 주관적이다. 그 주관적인 기준으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니 망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또 논란이 된 게 그놈의 엄마 손맛이다. 황교익이 보기에 요즘 사람들이 백종원에 열광하는 것은 엄마의 음식, 엄마의 사랑이 결핍되어서라고 한다. 엄마의 맞벌이 때문에 엄마의 음식, 엄마의 사랑을 받아먹은 기억이 없고, 어떤 음식이 맛있는지를 몸의 기억으로 각인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급 가치 별로 없는 유사과학적인 ‘썰’에 불과하다. 그럼 대체 어떡해야 하나. 백종원 현상이 ‘엄마’가 없어서 병든 현대인의 집단 히스테리(?)라면, 그럼 다시 모든 집의 엄마들을 다시 ‘밥 해주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집밥을 한다는 건 어려운 과업이다. 소중하고 훌륭한 일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할 때 그렇다. 2010년대 식문화에 대해 하는 조언이 기껏 ‘엄마의 손맛을 배워라’ 라니. 하나마나한 소리다.

엄마의 손맛?
엄마의 손맛?

굿바이, 황교익.

물론 황교익이 나쁜 얘기만 한 건 아니다. 천일염 얘기 같은 건 아주 좋은 지적이었다. 하지만 식문화에 대해 깊이 파고들 때마다 그는 온갖 유사과학적 담론, 유사인문학(나는 개인적으로 ‘인뭉학’이라고 부른다)적 담론을 너무 많이 썼다.

계란이나 닭고기 등 식재료에 대한 이야기도 점점더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자기 입맛을 기준으로 전라도 음식은 사람들의 고정관념 때문에 맛있게 여겨지는 것이라거나 떡볶이는 맛없다거나 하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한다. 거울세포 같은 소리도 하고. 그러면서 말하는 태도는 ‘내 말이 다 옳고, 너희는 다 틀렸다! 싸우자!!’이니… 비판받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는 이런저런 음식 프로그램의 자문역 정도로만 남았어야 했지 싶다. 뭐 그것도 음식 프로그램들의 수준이 고만고만했던 시절의 일이지만. 그리고 ‘다음 세대’ 음식평론가가 필요하지 싶다. 그가 그리도 물고 늘어지는 백종원은 ‘다음 세대’에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만, 황교익은 아무래도 아니다. 그게 황교익이 자꾸 백종원을 걸고 넘어지는 까닭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그에게 남겨진 말은 어쩌면 이 말뿐일지도…

굿바이, 황교익.

안녕 굿바이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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