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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강사다: 학위 논문을 쓰다

지방시,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허범욱(HUR) 作, 르네 마그리트 – The Son of Man(1946) 패러디

13. 학위 논문을 쓰다: (1) 도전 

2009년 봄, 나는 석사 3기에 접어들었다. 선배들은 나를 만나면 논문 주제는 정했는지, 무엇에 관해 쓸지 궁금해했다.

논문 쓰는 절차 

대학원 석사 과정은 4학기까지고, 그 이후부터는 초과 학기다. 4학기에 논문을 제출하지 못하면 ‘석사 수료’ 상태가 되는 것이고, 논문을 제출해 심사에 통과하면 ‘석사 졸업’이 된다. (박사도 같다.) 석사 졸업을 해야 비로소 박사 과정에 진입할 수 있다.

결국, 논문이 있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다. 지도교수와 그가 선임한 내부 교수 둘, 이렇게 세 사람이 논문을 심사한다. 모두가 기준 이상의 점수를 주면 논문이 인준된다.

석사 논문은 보통 5학기에 제출하거나, 빠르면 4학기, 늦으면 7~8학기까지 가져가기도 한다. 논문의 제출 시기는 본인의 의지, 능력, 그러나 무엇보다도 학풍에 따른다. 내가 속한 문과대학에서 A학과의 경우 모든 석사 과정생들에게 4학기까지 논문제출을 요구한다.

조금이라도 젊어야 교수 인력시장에서 유리하다는 이유다. 하지만 B학과의 경우 6학기 밑으로는 논문을 받아주지 않는다. 거의 모두가 7학기, 늦게는 9학기까지도 석사 논문을 쓴다. 쉽게 쓴 논문은 받아주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무엇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전공 특성에 따라 석사 논문이 연구자로서의 첫걸음이 되기도, 그저 단계를 밟아가는 형식적 의미가 되기도 한다. 우리 학과는 4학기를 권장하고, 늦어도 6학기까지는 모두 석사 논문을 제출하게 했다. 처음에는 6학기 이상을 가져갔다고 들었으나, 최근 여러 학교에서 4학기 석사학위가 쏟아져 나오기에 불이익을 주지 않기 위해 방침을 바꾼 모양새다.

지도교수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석사 논문은 앞으로의 연구를 버텨내기 위한 연습이네.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힘을 쏟지 말게나. 그저 하나의 주제를 잘 정리해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것이니까.”

아무도 택하지 않은 주제를 택하다 

나는 대학원에 입학할 때부터 ‘A’에 대한 것을 주제로 삼겠다고 마음먹었다. ‘A’가 내 전공의 여러 분야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아 보이는데, 관련 연구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관련 논문을 찾아 읽으며 틈틈이 공부했다. 그리고 석사 3기 어느 날 수업 시간, A에 대해 논문을 쓰겠노라고 연구계획서를 내밀었다.

지도교수와 선배들의 반응이 아직도 기억난다.

“A는 무척 중요한 주제지. 하지만 연구자가 거의 없어. 다루기 힘드니까. 남들이 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어. 평범한 주제를 잡으면 어떻겠니?”

나는 주눅이 들어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답했다. 그런데 수업 후 지도교수가 나를 호출했다.

“꼭 해보고 싶은 거면, 한 번 해보게나.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야.”

“한 번 해보겠습니다.”

지도교수의 책상 위에 있는 어떤 자료가 보였다. A에 대한 것이었다.

“선생님, 저건…”

“아, 누가 새로 나온 자료라고 두고 갔는데 하편이 없어서 그다지 연구자료로서 가치는 없어”

“하편을 찾으면 논문을 써도 되겠군요.”

“그렇지. 그런데 찾기가 쉽겠니? 저걸로 논문을 쓴다면 아직 학계에 다뤄진 바가 없는 자료니까 학계 기여도가 높은 논문이 되기는 하겠지.”

“네, 알겠습니다.” 

나는 지도교수의 방에서 본 자료 ‘B’의 하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전국의 도서관을, 몇 나라의 도서관을, A와 관련한 연구의 각주 하나하나를 검색했다. 당연하지만, 딱히 성과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직접 발품을 팔기로 했다.

조교실장에게 찾아갔다. 자료를 찾기 위해 이틀만 휴가를 내겠다고 했더니, 역시나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금까지 나름으로 성실하게 조교 생활했다고 생각합니다. 근무는 L이 바꿔 주겠다고 했으니 제발 이틀만 시간 주세요.”

석사 4기쯤 되어 이 정도 의뭉스러움은 생겼다. 조교실장은 내게 학위논문과 관련한 것이니 특별히 허락하겠다고 했다.

옆에서 입을 삐죽이던 2학기 위의 여자 선배가 그런 법이 어딨냐고 나를 성토했다는 걸 시간이 지나 술자리에서 전해 들었다. 여담이지만, 함께 술자리에 있던 L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너는 학위논문 안 썼냐? 적어도 그런 걸로 문제 삼지는 말자.”

L에 대한 감사함을 그때처럼 느껴본 일이 없었다.

14. 학위 논문을 쓰다: (2) 자료를 찾아서   

석사 3기, 2009년 어느 늦은 봄날, 나는 이틀간 휴가를 내고 경기도에 있는 작은 박물관을 찾았다. 석사학위 논문에 쓸 자료 ‘B’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직 발굴된 자료가 아니었고, 학계에서도 그저 ‘이런 책이 있다더라’는 언급만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쓰고자 하는 주제와 직접 관련된 자료였고, 만약 책을 발굴해 낸다면 무척 의미 있는 논문 자료가 될 수 있었다.

보통 석사 논문에는 누구도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학술적 기여도를 따지는 것은 박사 논문부터고, 그가 연구자의 깜냥을 갖추고 있는지, 요즘 젊은 연구자의 경향이 어떤지를 참조하는 지표로 이용하는 정도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누구나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있고, 학계에서 한 번쯤 문제적인 논문이 되길 바라는 욕망이 있다.

나 역시 그랬기에, 세상에 없는 책을 찾아보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괜한 시간 낭비일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 청춘을 바쳐 쓰는 한 편의 승부인데, 작은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박물관 전경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A와 관련된 자료만을 소장한 개인 박물관이었기에 큰 규모가 아닐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예상보다도 더 작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소녀의 기도 멜로디가 반쯤 울렸을 때, 중년의 여자가 말했다.

“누구세요?”

누구라고 대답해야 할지, 이렇게 초인종으로 대면하리라 생각지 못했기에 무척 당황스러웠다. 잠시 정신을 놓았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해 답했다.

“네, 저는 모 대학에서 A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대학원생입니다. 논문을 위해 자료를 찾고 있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왔습니다.”

대답이 없다가, 몇 초인지 시간이 흐른 뒤 문이 열렸다. 외부의 누군가에게 나는 언제나 타인의 입을 빌려 ‘잡일 하는 아이’로 소개되었고, 이처럼 연구자로서 자기 고백을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다.

중년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적당한 경계심이 섞인 인사를 보냈다. 내가 인사하자 그녀는 어떻게 왔는가를 정식으로 물었다. 그래서 나는 석사 학위 논문을 준비 중인 모 대학의 대학원생인데 어떤 책을 소장하고 계시면 도움을 좀 받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잠깐 계세요’하고 ‘관장실’에 들어갔다. 아마 근무자는 그렇게 두 사람인 듯싶었다. 나는 기다리며 박물관 내부를 천천히 살폈다. 공간 대부분이 서가였고, 내가 평소에 보고 싶어 했던 여러 책들이 가득 꼽혀있었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사된 것만도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그런 책들이었다. 원본보다는 복사본이 많았지만, 복사본조차도 흔하지 않은 자료들이어서 나는 그저 그 자체로 무척 행복했다. 그러다가 그녀, J 선생이 나에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나는 비로소 박물관장과 대면할 수 있었다.

C 관장과의 첫 만남 

대단히 나이가 많은, 팔순도 넘었을 거야, 싶은 노인이 힘겹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꽤 큰 체구였고, 백발과 뿔테안경이, 그리고 정갈하게 갖추어 입은 양복이 인상적이었다. 그 뒤로는 3단짜리 책장이 하나 있었는데, 언뜻 봐도 밖의 자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오래된 책에서 나는 그 매캐한 냄새, 그것이 자욱하게 방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 어떤 책이 보고 싶어서 왔다고 했지?”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하고 느리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90도로 인사했다. 그리고 나는 A를 연구하는 대학원생인데, 그 관련 자료인 B를 찾고자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A는 아직 제가 공부하는 분야에서 다루어진 바가 없지만, 저는 그것이 대단히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자료를 찾는 데 도움을 주시면 꼭 A연구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답했는데, 그가 웃었다. 소리 내어 웃은 것은 아닌데 분명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고 나는 기억한다.

C 관장은 내게 소파에 앉을 것을 권하며 먼저 마주 앉았다. 그리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이북에서 내려올 때 이야기네. 그때는 나도 젊었고, 자네도 알만한 K 선생과 동행했지. 함께 내려와서 자리를 잡았어.”

관장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몰래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도 그럴 것이 도저히 혼자 듣고 있을 수 없을 만큼, 사료적 가치가 있는 구술이었다.

“내가 어릴 때, 아침에 눈을 뜨면 마당에 ‘매일신보’가 있었고, 나는 4면의 소설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지. 그때는 눈도 참 좋았어.”

아쉽게도, 급히 누른 녹음버튼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그가 30여 분에 걸쳐 한 구술사는 그저 내 추억으로 남고 말았다. 그리고 끝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자료는 아마 이 뒤 책장에 있을 것이네. 누가 찾아왔다고 보여주고 하지는 않는데 자네가 마음에 들어.”

아, 그러니까, 아직 학계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된 바가 없는 그 책을 C관장은 소장하고 있었고, 내게 열람을 허락한다는 이야기였다. 여러 감정이 솟아올랐다.

‘나는 이제 잡일 하는 아이가 아니라, 연구자야. 이 책으로 좋은 논문을 써서 모두를 놀라게 해줄 거야!’

나는 그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C 관장이 일어나 녹슨 열쇠를 들고 개인 서가로 다가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오래된 책 냄새 때문인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C 관장은 서가의 1단을, 2단을, 3단을, 꽤 오랜 시간 동안 살폈다. 내가 초인종을 누른지도 어느새 2시간이 지나 있었다. 무엇을 하나, 하고 창문 너머 곁눈질을 하던 J 선생이 들어오며 말했다.

“관장님 식사하셔야죠?”

그런데 C 관장은 그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토하듯 말했다.

“책이 없어졌어!”

사라진 자료… 

관장의 얼굴은 무척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 짧은 시간 내에 내 얼굴도 덩달아 꽤 상기되었을 것이다. J 선생이 내게, 선생님 잠시만요, 해서 관장실 밖으로 함께 나왔다. 그녀는 우선 C 관장이 자료 열람을 허락했다는 데 놀라며, 자료 거의 안 보여주시는데… 했다.

그리고 책이 없어진 것은 정말 큰 일이라고 했는데, 모아 둔 자료에 대한 애착이 강해서 만약 찾지 못하면 대단히 충격을 받으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중풍이 심해지실지 모른다는 말을 덧붙여서, 나는 무척이나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괜히 자료를 찾겠다고 평온한 박물관을 들쑤신 것이 아닌가 싶었다. J 선생은 다시 관장님 식사하셔야죠, 했는데 여전히 답이 없자 나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내가 아니 그래도 관장님은 어떻게… 하자, 이럴 땐 아무 말도 안 들으시니 일단 우리라도 밥을 먹고 와서 찾아보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J 선생과 근처 식당에서 백반을 먹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녀도 A 연구자였는데, 다른 전공인 내가 왜 그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지 궁금해했다. 내가 이유를 말하자 이렇게 답했다.

“관장님이 기분 좋은 이유가 있었네. 자료 꼭 찾아봐요.”

첫인상은 B 사감과 러브레터를 떠오르게 할 만큼 고압적인 데가 있었지만, 참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밥을 먹고 돌아왔다. C 관장은 그때까지 개인 서가를 꼼꼼히 뒤지고 있었다. J 선생는 지하실을 찾아보기 위해 나와 함께 내려갔다. 지하실에도 책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우리 셋은 오후 5시까지 박물관을 정말이지 샅샅이 뒤졌지만, 성과는 없었다.

다음날 오전 9시, 나는 근처 찜질방에서 잠을 자고 다시 박물관에 갔다. 정문 앞에서 조금 기다리자 J 선생이 C 관장을 모시고 출근했다. 우리는 다시 함께 책을 찾기 시작했다. C 관장의 안색이 어제보다 좋지 않아서, 이제는 내 논문은 뒷전이고 그저 이 책을 찾아야겠다는 일념이었다. 둘에게 정말이지 미안해서 간절하게 서가를 탐색했다.

찾았다! 찾았어요! 

얼마나 책과 책 사이를 돌아다녔을까. 아무런 제목이 없는 작은 단행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두꺼운 자료들 사이에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듯했다. ‘어, 이거 왠지’하고 조심스레 빼냈다.

“아, 찾았다, 찾았어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J 선생이 뛰어 왔고, C관장에게 책을 들고 갔다. C 관장은 살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음, 이게 맞네.”

J 선생도 웃고, 나도 웃었다. 어느새 12시가 다 되어 갔는데, C 관장이 내게 물었다.

“자네, 혹시 삼계탕 좋아하나?”

C 관장을 모시고 식당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나는 에어컨을 틀어 드리려다 실수로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C 관장은 대뜸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방송인데, 자네가 이걸 듣나?”

사실 지역이 바뀌며 라디오가 제멋대로 전파를 잡아 평소에 듣지 않는 방송이 나온 것이지만, 굳이 아니라고 할 필요가 없었다. “예 종종 듣습니다.”라고 답하고, 웃었다. 그렇게 C관장이 즐겨듣는 라디오 방송이 울려 퍼지며, 모두가 저마다 행복했다. 백미러로 보니 C관장은 잔잔하게 웃고 있었다.

5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그날의 대화 하나하나, 분위기와 공기의 질감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C관장이 책의 열람뿐 아니라 복사까지 허락해 주었다. 나는 복사본을 들고 학교로 돌아왔다. 지도교수는 의미있는 석사학위 논문이 가능할 테니 열심히 쓰라고 격려했고, 선배들은 ‘그래도 계속 공부할 녀석이네. 잘했다!’고 한마디씩 던졌다.

이제 논문만 쓰면 된다.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15. 학위 논문을 쓰다: (3)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석사 3기 과정이 끝나가고 막 여름방학에 접어들던 2009년 어느 초여름.

연구소에 앉아 자료의 첫 페이지를 조심스레 넘기던 때의 설렘과 뿌듯함을 아직도 그 질감 그대로 기억한다. 내가 C 관장의 후의를 입어 열람하게 된 자료 B는 그간 발굴되지 않은 것이었기에 연구자 웹 DB에도 그 디렉터리가 없었다. 내가 쓰는 석사학위 논문이 본격적인 첫 연구인 셈이어서 나는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적어도 동시대에서 최초로 이 자료를 보는, ‘연구자’인 것이다. 단어, 문장, 페이지, 삽화, 광고, 여백,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왔다. 나보다 수 세기를 먼저 살았던 그 시기의 필자들이 내게 ‘잘 부탁해’하고 손짓하는 듯했다. 비로소 ‘연구’라는 것의 무게가 실감이 났다.

내가 1차 자료를 어떻게 읽고, 분석하고, 결론짓는가에 따라, 이 자료의 연구 방향이 결정되는 것이다. 고작 석사학위 논문일 뿐이지만 어떤 자료의 선행연구를 하겠다고 나선 만큼 내가 가진 포지션에 걸맞지 않은 무게감을 잔뜩 짊어졌다.

이제 쓰기만 하면 된다 

자료를 가지고 돌아온 그 날부터 나는 늘 그 책과 함께했다. 보존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데다가 아주 작은 활자로 되어 있어 눈이 아팠다. 돋보기를 들고 뭉그러진 한자를 보며 이게 무슨 글자인지 한참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읽어 나갔다.

한문학을 공부하는 후배 C가 큰 도움을 주었다. 도저히 알 수 없어 들고 찾아가면 그는 그 형태만을 보고도 음을 척척 짚어냈다. 나는 여전히 3과목의 수업을 듣고 학과 조교와 연구소 조교 일을 병행했지만, 억울해서라도 하루에 몇 페이지씩을 반드시 읽었다.

연구소에서 밤을 새우거나 잠을 자기도 했는데 책상 두 개를 붙여 놓으면 그런대로 올라가 잠을 잘 만했다. 그러다가 어느 페이지에 어떤 글이 있는지 외울 만큼 책과 친해졌을 무렵, 이만하면 논문을 써도 되겠지 싶었다.

그래서 목차를 구성해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학위 논문의 지도와 심사는 전적으로 지도교수의 몫이다. 주제선정부터 목차와 챕터 구성, 논문의 방향에 이르기까지 그의 허락이 필요하다.

지도교수는 목차를 보고는 연구 주제와 대상이 명확하고 뭘 해야 할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열심히 써서 다음 학기에 다시 보자고 했다. 방학 동안 적어도 본론 두 챕터를 완성해야 석사 4기에 본심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많은 지도를 부탁드린다고 답하고 나왔다.

좋은 자료를 구했고, 목차가 완성되었고, 지도교수의 허락도 받았다. 논문을 쓸 모든 준비가 갖추어진 셈이고, 이제 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쓴다’라는 일이 너무나 어려웠다. 나는 그때까지 글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본 일이 거의 없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습작했고 내 글에 대한 자부심이 언제나 있었다.

논문을 쓴다는 것 

그런데 논문을 쓴다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었다. 이 반복되는 표현들을 어찌해야 할지, 어떠한 수사를 사용해야 할지, 과거시제를 쓸지 현제 시제를 쓸지, 이 단어가 여기에 들어가도 맞을지, 글쓰기의 기초부터가 흔들렸다. 문단은커녕 문장 하나를 쓰는 일도 힘들었고, 이 단어가 내가 알던 단어인가, 싶을 만큼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것마저 두려웠다.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답답해서 옥상으로 올라가면 나처럼 멍한 얼굴로 하늘을 보거나, 담배를 피우는 문과대학 대학원생들이 항상 몇 있었다. 한 학기 선배인 L도 자주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그와는 꽤 오랜 시간 논문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는데, 둘 다 입으로는 논문을 참 쉽게 잘도 썼다. 어떻게 구성할지, 새로 찾은 자료에는 어떤 의미 있는 내용이 있는지, 술술 나왔다. 하지만 모니터 앞에만 앉으면 손가락이 굳었다.

간신히 밤을 새워서 A4 용지 반쪽 정도를 쓰면, 다음날 열어 보고 모두 지워버렸다.

‘하, 뭐 이런 쓰레기를 글이라고 썼지.’

그리고 다시 밤을 새워서 한쪽을 쓰고 다음날 모두 버리는, 그런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반복됐다.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래도 그렇게 꾸역꾸역 글을 써 나가니 석사 4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간신히 한 챕터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챕터를 쓰는 동안, 논문의 문어체적 수사가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맴돌기만 하던 이야기들을 정갈하게 텍스트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서툴렀고, 다음날 다시 어제의 글들을 휴지통에 넣기는 했으나, 이제는 버리는 글의 양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표현이 자유로워지니 이제는 논문의 전개가 발목을 잡았다. 아무리 자료를 읽어도 내가 풀어낼 수 있는 수준에는 한계가 있었다. 고작 석사과정 3기의 경험으로는 연구 주제와 시기에 대해 도저히 통찰해 낼 수가 없었다. 여러 책들을 내 앉은키 높이만큼 쌓아 두고 키보드에 손을 얹고 있는데, 나아갈 방향이 보이지 않는다.

“답은 자료에 있네” 

새벽이 밝아 오고 어느덧 9시가 되어 학부 조교가 출근하면, “아니, 형님. 또 밤새셨어요?”라고 인사를 건냈다. 나는 대답할 기운조차 없이 어느 날은 눈물이 떨어져서 한참을 엎드려 있기도 했다. 심지어는 내가 이 자료를 얻게 된 것이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지 싶기도 했다. 좀 더 좋은 연구자에게 이 자료가 들어갔다면 대단히 의미 있는 논문을 썼을 텐데. 나는 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들고 스스로 무너지고 있나. 서글퍼졌다.

예비심사를 앞두고 지도교수를 찾아가 논문 쓰는 일이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석사 학위 논문의 인준은 10월의 예비심사와 12월의 본심사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지도교수는 지금처럼 쓰면 예비심사는 무리 없이 통과하겠고, 본심사도 크게 문제는 없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답은 자료에 있을 테니 자료를 더 읽게나.”

정말 그렇게 딱 한마디 했다. 그래서 나는 모니터를 끄고 ‘읽기’ 시작했다. 내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읽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 조금씩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다지 잘난 것 없는 내 머리로만 논문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내가 기대야 할 곳은 내 머리가 아닌 ‘그들’의 목소리였다.

첫날 내게 ‘잘 부탁해’하고 웃었던 그들이 ‘잘 돌아왔어’하며 다시 나를 반겼다. 그때부터 조금은 보람 있게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 즐겁고 행복했다.

간절하게 살았던 날들 

밤을 새우다 보면 새벽 5시쯤, 더는 한 단어조차 더는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는 순간이 온다. 정신적 한계다. 그런데 한 시간 정도를 버텨내면 다시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한 숨을 푹 잔 것처럼 다시 반나절을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이틀 밤을 새우고 집에 들어가면 온몸이 후줄근했다. 무엇보다도 배가 고파서 나는 라면 두 개를 끓여 찬밥을 두 주걱쯤 넣어 참치와 김치와 계란과 섞어서 정신없이 먹고, 침대에 쓰러져서 잤다. 몸이 축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논문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것이 그저 좋았다.

한 번은 논문의 핵심 부분에서 서술이 막혀 3일 정도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논문의 방향을 모두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목이 타들어 갔다.

어느 날도 자료를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꿈에 필자가 나와서 뭐라고 한 마디하고 사라졌다. 나는 비몽사몽 필사적으로 뭔가를 메모하고 다시 잤는데, 일어나서 보니 알아보기 힘든 글씨로 ‘걔들도 힘들었대’라고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잠에서 깨자마자 헛웃음이 나왔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그런대로 답이 되어 다시 논문을 쓸 수 있었다. 그만큼 간절하게 살아갔다.

예심과 본심 

예심은 지도교수의 연구실에서 진행되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니 지도교수를 포함한 세 교수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다른 교수들이 먼저 말했고, 지도교수도 화답했다.

“이 정도면 괜찮죠?”

“네, 괜찮은 논문입니다.”

예심은 그걸로 끝이었다. 함께 예심을 본 동기들은 30분씩 걸리기도 했는데, 나만 그렇게 일찍 끝이 났다. 예심을 본 동기 몇과 함께 학교 앞에서 소주 한 잔을 하며 나는 나대로 ‘이게 무슨 심사야?’라고 투덜거렸고, 30분이 걸린 동기는 동기대로 ‘이번 학기에 논문을 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라며 불평했다.

나는 다시 논문을 썼다. 12월의 본심은 예심의 데자뷔와도 같았다. 대신 지도교수는 나를 따로 불러 여기저기 포스트잇을 붙인 본심 원고를 주었다. 문장 표현 같은 것들의 지적이 주가 되어 50여 군데쯤 되었다. 그것들을 꼼꼼히 고쳐 최종 제본을 맡겼다. 내 동기들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좋은 논문을 완성했다.

부모님과 C관장님 

2010년 봄. 나는 제본된 논문을 들고 서울 본가를 찾았다. 어머니와 아버지께 한 권씩 내 이름으로 된 석사학위 논문을 드렸다.

“2천만 원짜리 책이에요. 고맙습니다.”

대학원 학비와 생활비는 조교활동과 아르바이트와 학자금 대출을 더 해 내가 부담했다지만, 부모님이 나를 믿어주지 않았다면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다시 집을 찾았을 때 아버지 서가의 가장 좋은 자리에 내 논문이 꽂혀 있었다. 내가 그걸 보고 있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저거 며칠 동안 정말 열심히 읽으시더라. 나는 어려워서 읽다 말았어.”

논문을 쓰는 동안 C 관장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그것이 못내 죄송해 논문을 드리며 삼계탕을 꼭 대접하고 싶었다. 박물관에 전화를 걸자 ‘여보세요’하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J 선생은 아니 그동안 왜 이리 연락이 없었느냐며 안부를 물었다. 학위 논문이 통과됐으니 다음 주에 찾아가 논문을 직접 드리려 한다고 답하자  J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C 관장님… 돌아가셨어요.”

“네?”

나도 모르게 크게 반문했다. J선생은 말을 이었다.

“그래도 XX 선생이 찾아올 때만 해도 기분이 좋으셔서 박물관도 자주 나오시고 했는데…”

나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연신 내뱉었다. 전화를 끊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노환으로 불과 한 달 전쯤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몇 건 나왔다. 논문을 들고 박물관을 다시 찾았지만, J 선생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보고 싶은 자료가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요.”

도저히 다시 찾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논문을 쓸 때마다 C 관장의 연구를 인용하려 노력하는 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 찾아뵙지 못하고, 가시는 길에 인사조차 드리지 못한 것이 언제나 아프고 죄송스럽다.

그때 그 기억은 나의 힘 

논문을 쓴 과정을 무척 거창하게 서술했지만, 지금 내게 석사학위 논문은 ‘부끄러움’ 그 자체다.

아마 내 논문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다지 잘 쓴 논문이 아니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하고 썼지만, 지금 다시 보면 ‘선행연구자’로서의 몫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뿌듯함은 잠시고 부끄러움, 아쉬움, 안타까움, 이런 감정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A와 관련한 연구에 3번 정도 내 석사 학위 논문이 피인용된 것을 보기는 했으나 그 후행 연구들이 확인했을 내 한계에 그저 민망하다. 하지만 연구소에서 밤새 시공간을 넘나들며 ‘그들’과 대화하던 석사 시절의 경험은 너무도 행복하고 소중한 것이었고, 지금도 나를 버티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이며, 내가 대학이라는 제도권을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A를 주제로 몇 편의 논문을 쓰고 있다.

누구나 정규직을 원하고, 교수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연구자가 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계속 나는 대학에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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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309동 1201호
초대필자. 대학강사

지방대 시간강사, 인문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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