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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민 대다수는 동성애 합법화에 반대합니다.”

기독일보, "서울시민 대다수는 '동성애 합법화' 반대한다" (2014년 10월 1일) 중에서 갈무리
기독일보, “서울시민 대다수는 ‘동성애 합법화’ 반대한다” (2014년 10월 1일) 중에서 갈무리

서울시인권헌장 동성애 관련 조항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서울 시민 대다수는 동성애 합법화에 반대합니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다수가 반대하는 색깔, 반대하는 요리, 반대하는 버스 시간대, 다수가 반대하는 한강다리의 이름을 민주주의 사회에서 관철시키기는 것은 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다수가 반대하는 ‘존재’들(가령 ‘동성애자’)에 대한 인정과 보호도 민주주의에서 관철시킬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존재’에 관한 민주주의의 오류 가능성  

인권은 권력자의 횡포로부터 힘없는 다수를 보호하기 위해서 등장한 개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다수의 결정으로부터 ‘존재’를 옹호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기도 하다. 세계인권선언은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과 같은 끔찍한 행위에 대한 반성이 그 계기였다.

많은 이들이 오해한다. 인권이란 특정 시공간의 다수자가 가진 지향과 선택, 윤리적 입장과 무관하다.

물론 인권과 다수자의 윤리적 지향이 일치하는 경우도 많다.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안된다는 사실을 우리 다수는 지지하고, 신체의 불가침 및 자유는 인권의 목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일치하는 경우가 있는 것일 뿐, 다수자의 윤리적 지향이 곧 인권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1945년 1월 찍음) (위키백과 공용)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1945년 1월 찍음) (위키백과 공용)

인권이 ‘권리’인 이유 

인권이 권고나 가이드가 아닌 ‘권리’의 형태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권이 (형식적)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 하에서의 ‘민주적 결정’에 의해 쉽게 흔들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가난한 다수의 사람들이 소수 부유한 사람의 재산에 50%의 세금을 부과해 재분배를 하려 해도 그렇게 하기 어려운 이유는, ‘재산권’이라는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권리의 제한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엄격한 절차를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장애인의 이동은 왜 권리가 되었는가

민주주의는 폭압적인 권력자로부터 다수의 인권을 수호하는 데는 가장 효과적인 체제일 수 있지만, 인권을 구성하기에는 불충분한 체제다. 장애인들의 이동권이 보장된 역사가 그 예다.

2000년대 이전까지 장애인 ‘이동권’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동은 누가 강제로 감금하지 않는 이상 자연스러운 행위였기 때문에, 이동하는 행위를 위해 현재의 교통수단이나 도로 이외에 특별히 국가나 공동체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세계의 다수자는 직립보행을 하는 인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누군가 장애인을 감금시키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가 휠체어 등을 이용하는 사람들까지 포괄하는 지하철, 버스, 건물의 구조를 만들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직립보행을 하는 다수의 사람들의 정책결정에 맡겨놓으면 절대로 해결되기 어려울 것이므로, 장애인들은 이동을 ‘권리’라고 명명했는데, 이것이 ‘이동권’이다.

박경석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사진은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 공동대표로 있던 2001년 8월 이동권 쟁취를 위해  자신의 손과 휠체어를 버스손잡이에 수갑과 쇠사슬로 묶은 채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모습. (자료 제공: sadd.or.kr)
박경석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 사진은 장애인이동권쟁취를위한연대회의 공동대표로 있던 2001년 8월 이동권 쟁취를 위해 자신의 손과 휠체어를 버스손잡이에 수갑과 쇠사슬로 묶은 채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모습. (자료 제공: sadd.or.kr)

법에 새겨진 교통 약자의 ‘권리’ 

이동권은 2014년 현재 하나의 권리로서 인정되고 있고,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은 ‘이동권’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제3조(이동권) 교통약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하여 교통약자가 아닌 사람들이 이용하는 모든 교통수단, 여객시설 및 도로를 차별 없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여 이동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이처럼 장애인의 이동이 권리가 된 계기는 다수의 사람들이 장애인의 이동에 필요한 교통체계와 사회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하루 몇 명의 휠체어 이용자를 위해 일반버스보다 1.5배 이상 비싼 저상버스를 도입하는 일은, 다수 시민들의 공적 편익을 생각해야하는 민주적 정책결정 방식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2007년 4월 대전 이동권 캠페인 모습 (사진 제공: sadd.or.kr)  http://sadd.or.kr/files/attach/images/4301/903/018/493a43fd5195eb0e7fa0a56a8146dcbe.jpg
2007년 4월 대전 이동권 캠페인 모습 (사진 제공: sadd.or.kr)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장애인 인권운동의 지난한 투쟁이 시작되었고, 국제사회의 인권담론과 장애인운동의 결합으로 우리 사회는 장애인의 이동을 ‘권리’로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동이 권리가 되었기에 이제 길거리에는 ‘다수의 사람에게는 별로 필요하지 않을 수 있는’ 저상버스가 일정비율이나마 운행하며, 지하철역 엘리베이터는 상당 부분 설치되었다.

인권의 항목: 존재와 관련된 학대 가능성 있는 것들 

장애인 이동권을 승인했다고 했을 때 이 ‘승인’이 다수 구성원의 취향 변화가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다수가 직관적인 윤리감각이나 이익에 기반하여 지지하는 요소들은 굳이 인권의 이름으로 보호하지 않아도, 민주주의에 의해 자연스럽게 보호된다.

따라서 인권의 목록들은 다수의 취향이나 윤리감각이 아니다. 인간 존재와 가장 밀접히 관련된 요소들 가운데 변덕스러운 취향과 열정, 경제적 이익, 윤리 감각에 맡겨둬서는 시대와 공간에 따라 철저히 학대 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을 중심으로 작성해야 한다.

장애인의 이동은 그렇게 ‘이동권’이라는 이름으로 인권의 항목에 올랐다.

인권의 항목에는 존재와 관련한 '학대 가능성' 높은 것들이 올라야 한다. * 위 사진은 연출된 것입니다. (사진: Lin Pernille Photography, CC BY, * 위 사진은 연출된 것입니다.)
인권의 항목에는 존재와 관련한 ‘학대 가능성’ 높은 것들이 올라야 한다. (사진: Lin Pernille Photography, CC BY, * 위 사진은 연출된 것입니다.)

인권조례 동성애 논란: 인권 항목에 무엇을 넣을 것인가  

서울시인권조례 작성과정에서 드러난 동성애에 대한 논란은 우리가 무엇을 인권의 목록에 올려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계기다.

다수자의 윤리는 동성애를 용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즉,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를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과 인권의 목록 등재 여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과거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의 생존이야 말로 부도덕하고 추한 인간 역사의 재생산이라고 믿었다. 과거 한국인도 장애인들이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은 근대화된 도시의 세련된 그림에 오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88올림픽을 즈음하여 장애인과 노숙인들을 거대한 수용시설에 마구 쓸어 넣었다. 달동네 주민들도 쫓겨나긴 마찬가지였다.

상계동 올림픽의 한 장면  (상계동 올림픽 Sanggyedong Olympic 김동원 | 1998 | Documentary | Color | 27min)  올림픽에 오는 외국손님들에게 가난한 서울의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는 도시미학적(?) 관점에서 진행된 달동네 재개발사업.이 때문에 상계동 주민들을 비롯한 서울 200여곳의 달동네 세입자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몇십년씩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설명 출처: 다음영화)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의 한 장면
(상계동 올림픽 Sanggyedong Olympic 김동원 | 1998 | Documentary | Color | 27min)
올림픽에 오는 외국손님들에게 가난한 서울의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는 도시미학적(?) 관점에서 진행된 달동네 재개발사업.이 때문에 상계동 주민들을 비롯한 서울 200여곳의 달동네 세입자들은 아무 대책도 없이 몇십년씩 살던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설명 출처: 다음영화)

동성애자가 사랑할 자유!  

세계인권선언도 인간 다수의 합의이나, 이 합의는 우리 각자가 어느 때도 혐오의 대상으로 배제의 대상으로, 차별의 대상으로 낙인찍힐 수 있음을 깨달은 반성적 다수가 내린 합의에 근거한다. 그 근원적 합의의 내용은 이렇다.

“다수의 유행과 열정과 합의로도 절대로 학대해서는 안 되는 무엇이 있다”

오로지 이 합의만이 인권의 존재 근거다. 우리는 다수자들의 취향과 열정, 윤리감각이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급변하여, 지금은 ‘다수자’에 속하는 내가 어느 날 갑자기 혐오의 대상이 되어 수용시설에 감금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달았다. 이에 국제사회는 권력자의 폭압은 물론, 변덕스러운 다수의 윤리와 열정에도 대비하기 위한 인권의 항목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세계인권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물론 이 선언의 탄생을 둘러싼 현실정치의 메커니즘은 이보다 덜 아름다울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윤리적 감수성이 만든 합의는 우리에게 인권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를 알려주는 인식근거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서울시민 대다수는 동성애 합법화를 반대합니다.” 라고 외친다면, 그 다수의 감수성으로부터 우리는 인권을 인식한다.

이 명확한 인식에 기반하여, 우리는 동성애자들이 사랑할 자유를, 인권 항목에 넣는다.

(사진: torbakhopper HE DEAD, CC BY ND) https://flic.kr/p/dNQu1v
torbakhopper HE DEAD, CC BY 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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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댓글

  1. 정의란 이득과 합치될 때에만 비로소 실현되고 악은 상관없을만큼 지난 후 반성할 여유가 생겼을 때에서야 인정되는 이 세상이 가끔 무섭네요.

    또다시 더 어려운 시기가, 더 힘든 일들이 우리 사회와 인생에 일어날 때 그것을 극복하는동안 어떤 가치들이 상실될지 두렵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명이라도 더 올바른 길을 인식하고 알림으로써 정의가 정치적 이득과 합치하고, 이미 인정되는 악습과 악행에 대해 반성해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야밤에 너무 당연해서 식상한 이야기 끄적이고 갑니다.

    한명이라도 더 올바른 길을 찿을 수 있도록 언론에서도 노력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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