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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youtu.be/pV_0KJb0oyU

2014년 5월 말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룩셈부르크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비주얼 아티스트 데보라 드 로베르티의 퍼포먼스가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앞에서 자신의 음부를 드러냈다. 관객 중에는 박수를 치는 이들도 있었고, 더러는 당혹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술관 안전요원은 쿠르베의 작품이 전시된 곳을 비울 때까지 로베르티의 앞을 가로막아 관객들이 보지 못하게끔 하기도 했다.[/box]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베르티가 쿠르베의 그림 앞에서 퍼포먼스를 펼친 것은 이미지의 중첩을 통한 의미 형성으로 읽을 수 있다. 즉, 이전 시대와 달리 현대의 시각성은 서사(narrative)를 넘어선 통시적인 이미지의 조밀화에 그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병철은 자신의 저서 [시간의 향기](Duft der Zeit)에서 이렇게 말한다.

“단선적인 세계 질서의 종언이 손실만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이로 인해 새로운 존재 형식과 지각 형식이 가능해지고 또 필요해진다. 전진은 유영에 자리를 내준다. 지각은 인과적이지 않은 관계에 예민해진다. 엄격한 선별 작용을 통해 사건들을 좁은 궤도 위에 배치하는 서사적 선형성의 종말로 인해, 높은 밀도의 사건들 속에서 움직이며 방향을 잡아가야 할 필요가 생겨난다. 오늘의 미술과 음악도 이러한 새로운 지각 형식을 반영한다. 미적 긴장은 서사적 전개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건들의 중첩과 조밀화를 통해 발생한다.”

– 한병철, 김태환 역, [시간의 향기], 72~73쪽.

한병철은 이 책에서 현대의 시대를 가속화와 감속화, 그리고 원자화된 시간의 시대로 말한다. 흔히 우리가 세상이 빠르게 변한다고 하는 말의 이면을 파고들어 ‘너무 빨리 흐르는 나머지 마치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정지상태와 같다’는 의미를 이끌어낸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1933년 작)

너무 빨리 흘러서 흐르지 않는 것 같은 시대

근대 이후 시간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더는 사람이 시간에 종속되지 않게 됐다.

계몽주의는 사람이 앞으로의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형성했다. 사람이 곧 미래를 만들어낸다는 믿음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믿음 속에서 시간은 단선적으로 흐르지 않고,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 속에서 설명 불가능한 복잡한 양태로 교차하고 뒤섞인다.

이렇게 복잡해진 시간 속에서는 어떤 종류이든 지긋한 의미를 만들기 어렵다. 의미의 일정한 궤도가 성립 불가능해진 것이다. 극도로 높아진 의미의 밀도 속에서 무엇이 전진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단지 둥둥 떠다니는 의미의 조각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중력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의미 조각들은 단지 현재의 편린만을 담지 않는다. 거기에는 과거와 미래가 모두 담겨있다. 모든 것이 현재로 포섭되는 현대의 시공간은 속도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정말 빠르게 가는지 멈춰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 현대의 특성인 것이다.

방향을 잃은 시대, 그 시대의 존재

한병철은 이러한 ‘방향의 부재’가 반드시 손실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의 방식과 지각의 방식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예술에서도 이 같은 흐름을 반영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즉, 그림이든 무엇이든 예술의 모든 형식에서 이미지나 사건들을 중첩함으로써 메시지를 드러내는 방식, 로베르티의 퍼포먼스는 이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로베르티
로베르티의 퍼포먼스를 가로막은 오르세 미술관 직원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쿠르베의 그림이 지닌 미술사적 의미는 당대의 문화적 토양 속에서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의미는 당대의 의미에 관한 현재적 해석이다.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를 되돌아봄으로써 우리는 미술사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은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됨으로써 자신의 의미를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150년 전 작품의 현시적 의미작용이다.

쿠르베 세상의 기원
쿠르베, 세상의 기원, 1866년 작 (퍼블릭 도메인)

한병철의 논의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현시적 의미작용으로서의 [세상의 기원]이 특정한 시공간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현재의 공간에 머무르는 의미이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기원] 역시 무수히 부유하는 현재의 의미들 중 하나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 역시 부유하는 현재의 의미에서 예외일 수 없다.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의미 조각으로 낱개가 된 것은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중첩: [세상의 기원]에 중첩하는 로베르티의 음부

로베르티는 여기서 현재의 자기 몸을 드러냄으로써 이미지의 중첩을 이용한다. 150년 전에 사실적으로 그려진 음부 그림 앞에 앉아 그에 대응하는 실제적 신체 부위를 드러냄으로써 15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이미지의 중첩’을 만들어 낸다.

부유하는 개인의 삶 속에서 몸은 곧 부유하는 삶의 의미를 살아내는 존재이다. 평면 속에 드러난 의미의 조각([세상의 기원]과 부유하는 삶의 존재)과 자신의 몸을 병치시킨다. ‘지금’, ‘이곳’인 현대의 시공간에서 통시적인 이미지의 중첩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로베르티가 이러한 방법을 선택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을 섣불리 해석하려 들면 그야말로 과잉해석이 된다. 다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로베르티가 제시하는 질문이다. 즉, 시각적 대상들은 진정 대상화되어 마땅한 것인가, 그리고 그렇게 의심하기 위해 현대라는 곳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아주 간단하게 말하자면 로베르티는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지’를 질문하고, 제시한다고 할 수 있겠다.

보아야 할 것, 보여야 할 것을 억압하고 있지 않은가?

90년대 이후 우리나라 ‘담론의 장’에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주의)가 활발히 논의된 적 있다. 포스트모더니즘는 흔히 ‘회의의 3대가’로 불리는 프로이트, 마르크스, 니체의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특히 니체가 강조한 ‘상대성’의 철학에 기반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 관련된 복잡다단한 논의들을 크게 썰어 보아도 ‘상대성’에 관한 강조는 아주 뚜렷하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상대적인 가치를 받아들이며 사는 것일까? 모든 것을 상대주의로 환원해버리면 윤리적 혼돈에 빠져들 수 있는 위험은 있겠으나, 우리는 과연 생각하는 만큼 세상이 상대적임을 인식하고 있을까? 혹여 우리는 여전히 폭력적으로 넘쳐나는 이미지 혹은 관습 따위에 갇혀 마땅히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거나 보여야 할 것들을 은연중에 억압하는 것은 아닐까? 혹시라도 우리의 마음 깊숙이 자리한 채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것은 없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의 시각성이 지닌 특성과 그 안에 자리한 권력의 구도를 응시하자는 것. 로베르티의 퍼포먼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질문은 이런 것들은 아닐까?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Send me adrift, CC BY NC 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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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1. 아래 poll은 부적절합니다. 오르세 미술관 측은 경찰을 요청했고 경찰이 출동해 드 로베르티를 외설 행위 혐의로 일단 구금했습니다. 물론 검찰이 기소를 하지 않기로 하고 풀어주긴 했지만요. ‘경찰을 부르지 않는 관용 국가 프랑스’ vs ‘경찰을 출동시킬 후진국 한국’이라는 선입견이 보여서 조금 불편합니다. 조금 더 세련된 접근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2. 알렙 님께

    세심한 조언과 의견에 우선 깊이 감사드립니다.
    알렙 님께서 지적하신 사항은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편집상 부가적인 사실에 관한 검토가 부족했던 탓입니다. 앞으로 편집 과정에서 깊이 숙고하고, 주신 조언의 취지를 되살리겠습니다.

    여전히 ‘표현의 자유’에 있어 엄숙주의적인 법제도와 관행, 그리고 그런 사회 문화적인 의식이 강한 우리나라와 그런 점에서 다소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혹은 관용적인 외국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알렙 님의 지적은 적절합니다. 즉, 실증적인 근거 없이 너무 선입견을 강요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그 지적의 취지는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판단합니다. 다만, 우리나라가 표현의 자유에 관해 예술적 표현에 관해 엄숙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사회라는 것은 경험칙으로 더불어 실증적인 실제 사례로도 증명 혹은 방증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가령 좀 멀리 있는 사건으로는 70년 마야 성냥갑 사건, 가깝게는 마광수와 장정일의 필화 사건은 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점을 고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렇다고 알렙 님의 지적이 잘못됐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

    조언에 관해서는 진심으로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3. 제가 폴 아이디어를 냈는데요.

    퀴즈를 만들 때는 관용 국가 vs. 후진국의 프레임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민노씨 이야기대로 우리나라에서 예시를 들 수 있는 실제 사건들이 떠올랐기 때문에 적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금 보니 보기 중 하나인 ‘관용 대상’이란 표현은 프레임을 의도했다고 보기 충분해 보입니다.

    앞으로 좀 더 고민해서 접근하도록 하겠습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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