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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세월호 참극 해결 촉구 교사선언에 부쳐

공부란 무엇입니까?

저에게 공부란 다음 네 가지 요소의 조화입니다.

1. 가르침: 제자는 스승을 믿어야 배울 수 있고, 스승에게는 지혜가 있어야 제자를 올바르게 이끌 수 있습니다.
2. 의심: 가르침을 믿되 의심해야 합니다.
3. 주체: 내 삶에서 내가 주인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4. 실천: 뜻을 펼치되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타협하거나 타락하지 않는 것, 끝까지 몸으로 그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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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5일 스승의 날, 전국 교사선언

스승의 날을 맞아 전국 1만 6천여 선생님들이 ‘전국 교사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아이들을 이대로 가슴에 묻을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물이 차오르는 배 안에서 아이들이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을 때, 대통령께서는 공직자들에게 문책 위협을 하신 것 말고 무엇을 했습니까.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전국 교사선언 중 발췌)

공부의 참모습을 봅니다. 스승의 참모습을 봅니다.

스승의 날, 선생님들이 거듭 미안하다고 말하며, 이제는 제대로 된 공부를 실천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잊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자신을 반성하며, 행동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정치적 중립 의무 이전에 이 땅의 시민으로서, 또 무엇보다 학생들의 안전을 일선에서 책임져야 하는 선생님입니다. 정부는 선생님의 피눈물 나는 가슴에서 나오는 요청에 귀 기울이지는 못할망정 이 외침을 외면하고 도리어 탄압하려 합니다. 국가보안법이 헌법 위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옥죄듯 정부가 교사와 학생의 교육권을 탄압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이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또 한 번 우롱하는 짓입니다.

정부가 선생님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공부란 무엇인가

1. 가르침: 여시아문(如是我聞)

불경은 “여시아문일시불재(如是我聞一時佛在)”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석가모니세존이 살아계실 때(佛在) 이처럼(如是) 어떤 때/곳에서(一時) 내가 들었다(我聞’)”

다시 말해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불경은 불타가 살아 계실 때 어느 장소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확실하게 들었으니 의심하지 마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시아문’은 단순히 “나는 이렇게 들었다”란 의미를 넘어 가르침을 받아들이란 뜻을 전제합니다.

대승불교 기초경전인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모든 불경에 어떤 근거로 첫머리에 ‘여시’란 말을 사용했는가’란 질문에, “불법의 대해(大海)는 믿어야 들어갈 수 있고 지혜가 있어야 능히 제도(濟度)한다. 여시란 곧 이 믿음이란 뜻”이라고 했습니다.

제자는 스승이 올바르게 가르치고 있다고 믿어야 배울 수 있고, 스승이 지혜가 있어야 제자를 ‘제도(미혹 세계에서 생사 윤회를 되풀이하는 중생을 건져내는 일)’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가르침의 기본입니다.

2. 의심: 시 팔로르 숨(Si fallor sum)

[마르코복음] 9장 21절부터 24절에는 예수가 악령 들린 아이를 구하는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렸을 때부터입니다.
22 악령의 발작으로 그 아이는 불 속에 뛰어들기도 하고 물속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자비를 베푸셔서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23 이 말에 예수께서 할 수만 있다면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 하시자.
24 아이 아버지는 큰소리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4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이 아버지는 큰소리로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절규합니다. 믿는다는 것에는 본래 중간이 없습니다. 믿으면 믿는 거고, 안 믿으면 안 믿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아이 아버지는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것을 ‘복음적 의심’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시 말해 ‘의심이 곧 불신은 아니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로부터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Si fallor sum: 오류를 범하더라도 나는 존재한다)”란 명제가 성립했고, 그로부터 다시 데카르트의 근대적 이성,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가 출발합니다.

가르침을 믿되 의심하지 않는 것은 공부가 아닙니다.

3. 주체: 이심전심(以心傳心)

어느 날 석가는 제자들을 영취산에 모아놓고 설법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꽃 비가 내렸는데, 석가는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말없이 집어 들고, 약간 비틀어 보였죠. 제자들은 석가의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습니다.

그제야 석가도 빙그레 웃으며 가섭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과 열반묘심, 실상무상, 미묘법문, 불립문자 교외별전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주마.”

  • 정법안장(正法眼藏): 인간이 원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덕
  • 열반묘심(涅槃妙心): 번뇌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
  • 실상무상(實相無相): 불변의 진리
  •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를 깨치는 마음
  •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 언어나 경전에 따르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오묘한 진리

이렇게 하여 불교의 진수는 가섭에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로부터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진리가 글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였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은 앞서 불경의 앞머리에 ‘여시아문’과 모순된다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상충하는 사실이니까요.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6)이란 짧은 논문에서 ‘아우라’라는 개념을 말합니다. 예술작품이 주는 감동은 진본의 ‘아우라’가 있기에 가능한 것인데, 디지털 복제에서는 원본과 사본이란 의미가 없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가 이심전심입니다. 누군가 ‘부처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미 ‘부처’인 것이지요.

좀더 부연하면 후계자 또는 추종자들을 일러 ‘에피고넨(epigonen)’이라고 합니다. 본래는 그리스 신화에서 테베 전쟁 때 전사한 7인의 용사의 자식들이 성장해 10년 뒤에 테베를 멸망시켜 아버지의 복수를 하였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훗날에는 그 뜻이 변하여 문학, 예술 등에서 뛰어난 선구자를 모방하는 아류(亞流) 작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유교에서 공자를 일러 ‘대성(大聖) 공자’라 하고 맹자를 ‘아성(亞聖) 맹자’라 할 때의 그 버금간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불교의 가르침, ‘이심전심’이란, 사실 다음과 맥이 닿아있습니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이 말은 임제 의현(臨濟義玄) 선사의 설법으로 《임제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서 있는 곳 모두가 바로 진여”라는 뜻으로 주체적인 삶을 강조한 말입니다. 임제 선사는 “불법은 인위적인 조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평상시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옛사람도 말하기를 ‘밖을 향하여 공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짓이다. 그것은 언젠가는 흩어지고 떠나게 된다. 오직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진실의 눈이 깨어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심전심’이란 아류 혹은 에피고넨이 되지 말고,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든 주체적인 공부(삶 또는 실천)를 할 수 있다면(隨處作主), 그가 누구이든 간에 참된 가르침을 세울 수 있다(立處皆眞)란 뜻입니다.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부입니다.

4. 실천: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 『논어(論語)』 – 학이(學而)편

공자에게 있어 공부, 즉 학습은 배우고 익혀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익혀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죠. 이때의 ‘습(習)’이란 자전거나 수영처럼 한 번 배우면 내 안에 깃들어 잊지 않고 언제나 실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습’이란 그냥 연습의 의미가 아니라 항상 하고 있는 것, 다시 말해 ‘실천’입니다.

공자는 뜻을 품었으나 그 뜻을 정치에 직접 반영할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공자의 덕이 높았음에도 생전에 크게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죠. 13년간 방랑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참담한 좌절뿐이었습니다.

높은 신분제 사회질서 속에서도 귀족이나 평민의 자제나 가리지 않고 제자로 받아들였던 공자이며, 그를 계승한 맹자 역시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은 제자를 키우는 일이라고 했지만, 공자에게는 제자 복이 없었습니다. 석가의 ‘가섭존자’에 해당하는, 학문적 계승자 안회(安回)는 굶어 죽었고, 예수에게 ‘베드로’라 할 수 있는, 자로(子路)마저 앞세워 보냈습니다.

저는 [논어] 첫머리의 ‘학이시습'(學而時習: 배우고 때때로 익힌다)보다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공자는 최고의 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정한 때(天時)를 얻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 하여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고, 자신의 좌절을 남 탓으로 돌리지 않았습니다.

“배움은 나 자신을 완성하는데 뜻이 있지,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헌문)

뜻을 펼치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타협하거나 타락하지 않는 것, 끝까지 나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가 공부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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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극의 올바른 해결을 촉구하는 교사선언

아이들을 이대로 가슴에 묻을 수 없습니다

 

2014년 4월 16일을 지워버리고 싶습니다.

수백의 어린 영혼과 함께 대한민국이 침몰한 날, 국민의 억장이 무너지고 학교가 내려앉은 이 날을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습니다. 꽃다운 생명이 스러져가는데도 구명조끼를 입혀주며 서로 “사랑한다”고 다독이는 아이들 앞에서 가슴은 갈가리 찢겼고, “아무 것도 도와줄 수 없어 미안하다”며 울부짖는 친구들 앞에서 우리 어른들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자율학습 보충수업에서 잠시 벗어나 3박4일의 짧디 짧은 행복을 꿈꾼 수학여행이 삶의 마지막 여정이 되고 말았을 때, 이 땅의 교육도 죽었습니다.

아이들을 이대로 가슴에 묻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묻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국민들이 묻고 있습니다. “도대체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가?” 이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우리는 아이들을 가슴에 묻을 수 없습니다. 제2 제3의 수많은 세월호들이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의 꽃다운 목숨을 위협하고, 누군가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 몇 푼을 위해 망설임 없이 생명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비정한 자본, 이를 조장하고 비호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이 있는 한, 또 다른 희생자들이 세월호 희생자의 이름과 얼굴, 소중한 기억들을 밀쳐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발뺌과 속임수로 자리보전에 연연하는 공직자들, 남이야 어찌 되든 제 자리부터 챙기고 보는 지도자들이 활개 치는 한, 권력에 빌붙어 정권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언론이 국민들의 귀를 사로잡는 한, 순박한 영혼들만 뒤에 남아 얼싸안고 죽음을 맞이하는 참극이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안합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안내방송을 믿고 대기하라”고 한 말이 결국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다는 사실 앞에서, 많은 교사들이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교사라도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해보지만, 속절없이 죽어간 제자들을 앞에 두고 차마 그런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의심스러우면 되물어야 한다고, 부당한 지시에는 복종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점수를 올리려면 의심하지 말고 정답만 외우라고 몰아세우고, 아이들의 장래를 위한다는 핑계로 정답만 생각하라고 윽박질러서 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스스로 판단해서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못해서 사진 속 아이들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묻습니다.

물이 차오르는 배 안에서 아이들이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을 때, 대통령께서는 공직자들에게 문책 위협을 하신 것 말고 무엇을 했습니까. 수명을 다한 낡은 유람선이 꽃다운 생명을 가득 태우고 기우뚱거리며 죽음의 바다를 항해할 때, 탐욕스런 자본가들이 승객의 안전은 뒷전으로 미뤄둔 채 화물 적재량을 속이기 위해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었을 때, 대통령은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대통령이 직접 끝장토론에 나와 ‘규제완화’를 역설할 때, 자본가들이 만세를 부르며 안전규제부터 내팽개치리라는 것을 몰랐단 말입니까. 대통령이 자본가들을 위해 비정규직 봇물을 열어젖힐 때, 자본가들은 승객의 안전을 책임진 선장과 선원들마저 비정규직으로 갈아치우리라는 것을 정말 몰랐습니까.

대통령은 취임할 때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했습니다. 그런데 피가 마르고 숨이 막히는 지난 한 달 동안 이 선서를 지키기 위해 진정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고귀한 생명을 하나라도 건질 수 있었던 사고 초기단계, 그 금쪽같은 시간에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혼선과 무능 그 자체였습니다. 아니 생명을 구하려는 최소한의 책임마저 방기했습니다. 더욱이 일부 고위관료들의 몰상식한 행동과 막말이 사태를 걷잡을 수 없게 악화시켰습니다.

국민은 대통령에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신의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할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 실종자 가족들의 까맣게 타들어가는 가슴을 조금이라도 헤아리려는 마음을 국민들은 간절히 바랍니다. 형식적인 사과와 ‘연출된 위로’가 국민의 억장을 무너뜨렸습니다. 부실한 구난 시스템과 함께 가슴이 내려앉은 국민들은 단 한 명의 목숨도 구하지 못한 국가 시스템의 총체적 붕괴 앞에 또 다시 넋을 잃었습니다.

모든 국민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강압과 통제로 합리적 의심을 봉쇄하는 것으로 국민의 분노를 억누를 수 없습니다. 대통령은 자신의 책무 불이행을 뼈저리게 고백하고 이제라도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는 우발적인 재난이 아닙니다. 국민의 생존을 파괴하는 신자유주의 국가 시스템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습니다. 이윤과 돈벌이가 아니라 생명과 안전을 우선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몇 명의 희생양을 먹잇감으로 던져주고 진실을 은폐해서는 안 됩니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뼈를 깎는 책임규명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런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대통령 자격이 없습니다. 대통령은 무한 권력자가 아니라 무한 책임자입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킬 의지도 능력도 없는 대통령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사전에 막지 못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보다는 탐욕과 무책임이 넘치고 이를 조장하는 사회에 대해 침묵해 왔습니다. 과도한 입시경쟁으로 한 해에 수백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수많은 학생들이 차별과 서열화로 절망하고 좌절할 때 이를 바꾸기 위하여 치열하게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좀 더 철저하게 고민하지 못했고, 순응과 체념의 죽임의 교육을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탐욕과 불의에 복종하지 않겠습니다. 학생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살림의 교육을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와 교육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혁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희생자와 유가족의 고통을 끝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함께하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2014년 5 월 15 일
김정훈 외 15,85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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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전성원
초대필자, 황해문화 편집장

1970년생, 80년대를 나름 거칠게 살았다. 광고사, 출판사를 거쳐 현재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으로 밥벌이, 부업으로 글도 쓴다.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 운영자, 저서로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다](공저), [아뿔싸 난 성공하고 말았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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