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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사과: 누구를 위한, 누구를 향한 사과인가

사과란 무엇일까.

민수가 길동을 때렸다고 치자. 민수는 곧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사과를 했다. 민수는 자기 가족을 모아놓고 ‘길동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그런데, 길동은 그 자리에 없고 심지어 길동을 부르지도 않았다.

이걸 사과라 부를 수 있을까.

Vic, Asking For Forgiveness

Vic, Asking For Forgiveness (CC BY)

세월호 관련 박근혜 대통령의 유감 표명

세월호 침몰 14일 동안 공식 발언이 없던 박근혜 대통령이 드디어 세월호 침몰과 관련하여 유감 표명을 했다. 물론 4월 21일 ‘눈치만 보는 공무원을 반드시 퇴출시키겠다’는 발언에 비하면 진일보한 셈이다.

  • 세월호 침몰 사건
    • 일시: 2014년 4월 29일
    • 장소: 국무회의
    • 주요 내용: 사전에 사고를 예방하지 못하고 초동대응과 수습이 미흡했던데 대해 뭐라 사죄를 드려야 그 아픔과 고통이 잠시라도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 가슴이 아프다. 이번 사고로 많은 고귀한 생명을 잃게 되어 국민 여러분께 죄송스럽고 마음이 무겁다.

그런데, 언론의 기사를 보면 좀 이상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에 ‘사죄’, ‘죄송’, ‘마음이 무겁다’ 등의 표현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유족들을 찾아가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국민들을 앞에 두고 연설을 한 건 아니다. 언론이 이를 두고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대국민 사과”다.

공무원과 정치인 앞에서 하는 사과가 대국민 사과?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언론 앞에 서서 공식적으로 사과를 한 적이 있다. 바로 과거사 관련 문제다. 당시 발언 내용 중 인혁당 사건 등 관련 유족이나 국민에게 사과를 하는 내용이 지극히 일부였다는 등 내용에 관한 논란은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국민을 호칭하면서 연설을 했다는 점에서 ‘대국민’이라는 말을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국민을 호명하며 사과를 한 적이 없다. 하지만 언론은 이를 두고 사과라고 한다. 흔히 언론이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대국민 사과로 보도한 것이 3개이다. 모두 별도의 브리핑을 통해서 국민을 호명해 가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다. 모두 비서관 회의, 국무회의 등 정치인과 공무원, 비서들을 앞에 두고 간접적으로 한 발언이다.

심지어 국정원 간첩사건 증거조작 사건이 아직 의혹 상태였을 당시, 남재준 국정원장 사과 후 박근혜 대통령이 유감 표명을 했을 때에도 국민일보는 “사실상 대국민 사과를 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Roland Tanglao, Sorry P1164246.JPG

Roland Tanglao, Sorry P1164246.JPG (CC BY)

대통령들은 정말 사과한 걸까

박근혜 대통령뿐만 아니다. 큰 사건, 사고가 날 때마다 언론은 역대 대통령들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고 표현했다. 과연 그럴까? 몇 가지 사례들을 보자.

  • 서해 훼리호 사건
    • 사과 주체: 김영삼 대통령
    • 일시: 1993년 10월 18일 (사고 8일 후)
    • 장소: 임시국무회의
  • 성수대교 붕괴 사건
    • 사과 주체: 김영삼 대통령
    • 일시: 1994년 10월 24일 (사고 3일 후)
    • 방법: 대국민 담화
  • 씨랜드 화재 사건
    • 사과 주체: 김대중 대통령
    • 일시: 1999년 7월 1일 (사고 1일 후)
    • 장소: 합동분향소
  •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 사과 주체: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 일시: 2003년 2월 21일 (사고 3일 후)
    • 장소: 인수위 회의

참고로 천안함 침몰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별도의 사과 표시는 하지 않고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서 무한한 책임과 아픔을 통감한다”는 정도의 표현을 했다.

위의 예시만 보자면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의 사과만 대국민 사과 혹은 유족에 대한 사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이 외에 여러 대통령이 각종 비리 및 권력형 사건 등과 관련하여 대국민 담화 형식으로 공식 사과를 한 적은 여러 차례 있다. 측근을 통해 일어난 비리 사건 등은 아무래도 대통령의 책임이 더욱 직접적으로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태우 대통령이 수서 비리 사건과 관련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비리, 노무현 대통령이 노건평 씨 재산의혹과 관련하여, 이명박 대통령이 이상득 전 의원 등 측근 비리와 관련하여 대국민 담화를 하는 등 국민을 향해 공식 사과를 한 적이 있다.

표현의 인플레이션

어떤 사람들은 대통령이 말을 꺼내준 것만으로도 황송하다고 할 것이다. 말을 꺼내준 것뿐만 아니라 ‘심려’, ‘송구’, ‘통감’, ‘죄송’이라는 표현까지 쓰니 할 만큼 했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찾아가서 사과해야만 ‘대국민 사과’라고 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공무원 앞에서 혹은 정치인 앞에서 하는 유감 표명을 두고 ‘대국민 사과’라는 표현은 쉽게 쓰지 말아야 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비리 사건이 터진 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로 사태를 해결하는 걸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덧 요즘은 대국민 사과를 하지 않았는데도 정치인은 대국민 사과로 받아들이고, 언론은 그걸 받아적고, 그거면 모든 게 정리되는 수준이 된 것이다.

벌써 외국계 언론도 한국 언론을 흉내 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 한국판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민 없는 대국민 사과를 두고 “박근혜 대통령 세월호 관련 대국민 사과”라며 기사를 낸다. 중국국제방송 경제채널도 “대국민 사과”라고 한다.

만약 일본 총리가 국무회의를 하면서 “과거사 문제 관련하여 한국에 여러 가지로 미안한 마음이 든다”라고 하고서는 “일본은 한국에 공식 사과를 했다”고 우기면 어떨까. 우리 언론사들이 보도한 기사를 모아 보여주면서 ‘이것이 한국식 사과가 아니냐’라고 한다면?

월스트리트저널 한국판 캡쳐 화면

방백은 방백, 사과는 사과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은 뒤통수에다 하는 사과도 사과로 쳐주지 않는다. 엉뚱한 사람을 붙들고 ‘사과하는 마음’과 ‘유감’을 전달하는 건 사과가 아니다. 대국민 사과는 정치인이나 비서진 앞에서 하는 게 아니다. 언론들은 이런 행위에 ‘대국민 사과’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한다.

자, 그렇다면 다시.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침몰과 관련하여 대국민 사과를 할까? 세월호 침몰 유족들에게 사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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