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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 플라자 붕괴 1년,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출근하는 길에 고개를 드니 사옥을 덮은 담쟁이가 옅은 초록으로 벽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작년 이맘때였습니다. 제 스웨덴 친구들의 페이스북 상태표시에 에이치앤엠에게 무엇인가 요구하거나 비판하는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에이치앤엠(H&M)은 방글라데시에 응답하라”
“옷 가격을 50센트씩 올려라”
“우리는 피로 짠 옷을 입고 싶지 않다”

라나 플라자, 다국적 의류 브랜드의 생산 기지 

에이치앤엠은 사브(Saab)나 이케아(IKEA)와 더불어 스웨덴을 대표하는 기업 중 하나입니다. 하도 여러 개가 줄지어 올라오길래 그중 링크 하나를 따라가 관련 뉴스를 읽어보았습니다. 신문의 국제면에 일 년에 한 번 등장할까 말까 한 방글라데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1년 전인 2013년 4월 24일에 있었던 방글라데시 의류공장 붕괴사고를 기억하실 겁니다. 방글라데시의 라나 플라자는 의류생산공장 다섯 개가 뭉쳐있는 8층짜리 건물입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아마 이 독자들 중 몇몇 분들은 분명 한 두벌 정도 옷장에 소유하고 있을 법한 다국적 의류 브랜드의 생산 기지인 셈입니다.

경찰 대피 권고에 은행 상점 철수, 다만 옷 공장은 예외

붕괴 하루 전에도 건물에 심한 균열이 감지되었습니다. 위험하다며 경찰이 대피를 권고했습니다. 같은 건물에 입주했던 은행과 상점은 권고를 받아들여 사고 당일 문을 닫았습니다. 하지만 옷 공장은 예외였습니다.

건물이 흔들리고 균열이 계속되어 근로자들이 불안해했습니다. 이에 아랑곳없이 공장주는 문제없으니 돌아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열악한 근무 환경에 더해 안전장치나 비상시 대피 훈련도 전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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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나 플라자 붕괴 (출처: 위키백과 공용)

노동자와 유가족, 법적 구속력 있는 노동환경 개선 요구 

결국 단일 사고로 1,129명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희생자 대부분이 어린 여성이었습니다. 그곳의 노동자와 가족을 잃은 유가족은 피해보상과 근무 환경 개선, 안전 강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노동자 측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했습니다.

  1. 방글라데시에 있는 의류생산공장의 근로 환경에 대한 독립적 조사 시행할 것
  2. 노동 환경개선을 위한 노력할 것
  3. 자율적 노동조합 결성의 권리 등을 법적으로 보장할 것

이들 사항을 법적 구속력이 없는 권고사항이 아닌 법적 구속력 있는 규정으로 정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이를 준수하지 않는 기업에는 법적 처벌을 내릴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눈치 보는 다국적 기업

다국적 기업은 서로 눈치를 보며 적극적인 개입을 꺼렸습니다. 기업 처지에서 보자면 주저할 법도 합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가장 큰 이유야말로 생산 단가를 낮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값싼 인건비는 물론이고 기업에 부담이 되는 다양한 규제와 안전장치를 피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노동환경 개선에 관한 협약에 서명하는 것은 기업 스스로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뉴스에는 라나 플라자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명단이 공개되었습니다. 한편 제 친구들이 한 목소리로 채찍질을 가하고 있던 에이치앤엠은 사고가 발생한 공장에서 직접 상품을 생산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의 선두주자 에이치앤엠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의류 체인을 거느린 브랜드입니다.

패스트 패션은 유행을 즉각 반영해 저가 대량 생산을 사업모델로 하기 때문에 빠르고 싼 생산지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렇게 방글라데시에 생산기지를 둔 에이치앤엠은 스웨덴을 대표하는 브랜드일 뿐 아니라, 방글라데시의 다른 공장에서 많은 양의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해외 한 블로거(bart)가 방글라데시 라자 플라자의 비극과 플라자에서 옷을 만들던 업체(H&M, 베네통 등)을 믹스한 이미지 (출처: bart, Trend Report)

해외 한 블로거(bart)가 방글라데시 라자 플라자의 비극과 플라자에서 옷을 만들던 대형 업체(H&M, 베네통 등)을 믹스한 이미지 (출처: bart, Trend Report)

스웨덴 환경단체, ‘H&M은 방글라데시에 응답하라’

스웨덴의 한 환경단체는 에이치앤엠의 최고경영자 카를 요한에게 방글라데시에 응답하라는 내용을 담은 광고로 냈습니다. 스웨덴의 유명 경제지와 의류 잡지는 이 광고 싣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환경단체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서명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제 친구들을 비롯한 에이치앤엠의 소비자들은 자발적으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의견을 확산해가며 에이치앤엠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안전장치 마련을 위해 옷값을 올려도 좋으니 책임 있는 답을 내놓으라고 촉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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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치앤엠의 책임 있는 답변을 촉구하는 스웨덴 시민단체 광고 (출처: Avaaz.org)

침묵 깬 H&M, ‘협약에 가장 먼저 서명하겠다’

결국 에이치앤엠은 침묵을 깨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노동자들이 낸 화재 및 건물 안전에 관한 구속력 있는 협약에 제일 먼저 서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다른 기업 역시 서명에 동참하도록 설득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고도 했습니다.

업계 선두인 에이치앤엠이 첫발을 떼자, 참여하지 않은 기업에 비난 여론이 일었습니다. 결국, 다른 브랜드도 하나둘 동참의 뜻을 밝혔습니다. 에이치앤엠의 움직임은 방글라데시 노동환경 개선의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낭만은 금물, 기업은 비정하다

냉정한 기업의 세계에서 낭만은 금물입니다. 처음 방글라데시 노동계가 같은 내용의 협약을 들고 왔을 때, 방글라데시에 생산기지를 둔 월마트의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 이렇게까지 투자하는 건 기업 입장에서 실익이 없다.” (월마트 대변인)

에이치앤엠 대표 역시 뒤를 돌아 회담장을 나왔습니다. 의류 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노동 환경의 개선은 인간에 대한 존중 때문이 아니라 판매에 영향을 주는 불매운동이나 캠페인 때문에 이루어진다”

저는 제 친구들을 보며 애국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내가 나라를 또 어떤 기업을, 내가 속한 조직을 사랑하는 방식은 ‘문제 삼지 말자, 좋은 게 좋은 거지’하면서 일단 팔아주고, 치부는 덮어주고, 강한 자의 손을 들어주는 식은 아닐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내가 손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빠듯한 학생 살림에 되려 제품의 가격을 올리라는 요구가 쉽게 나온 말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붕괴 1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1년이 지났습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방글라데시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라나 플라자는 어떻게 됐어?” 담담한 목소리의 답이 돌아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 그 근처가 집이라는 친구는 늘 지나다니던 곳인데 지난겨울 갔을 때도 사고 후와 똑같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입니다. “끔찍해.”

라나 플라자의 재건을 돕겠다는 유명 기업의 약속이 줄줄이 이어졌어도 방글라데시의 상황은 그대로입니다. 아직도 많은 이가 여전히 위험한 환경에서 일합니다. 안전장치에 대한 약속은 계속 타협 중입니다. 약속했던 보상금도 아직 지급되지 않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최저임금은 올랐습니다. 당시 한 달에 38달러였는데 정부가 78달러로 올렸습니다. 하지만 이를 지키는 기업은 많지 않습니다.

방글라데시 정치 궁금하다면 ‘라나의 얼굴’을 보라

1,100명이 넘게 목숨을 잃었는데 누군가 처벌은 받아야 하지 않나요?

라나 플라자의 건물주인 모하마드 소헬 라나는 감옥에 있습니다. 37세의 라나는 방글라데시 집권당의 지역 청년 조직 간부이기도 했습니다. 정치인과 가깝게 지내는 지역 유지이자 깡패조직의 우두머리로 알려졌습니다. 권력에 줄을 대어 부를 축적한 인물입니다. 붕괴사고 4일 만에 라나는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지난 3월, 6개월 보석을 허가받았지만 기소된 다른 죄목이 많아 결국 감옥 밖을 나오지 못했습니다.

현지의 한 신문은 방글라데시의 정치가 궁금하거든 라나의 얼굴을 보라고 썼습니다. 모든 비극은 희생양을 요구합니다. 라나는 세계가 손가락질하는 부도덕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는 부도덕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문제는 한 개인의 탐욕만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끝없는 탐욕으로 비리를 일삼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특혜를 베풀고, 제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정책을 결정하는 후진 정치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2009년 이명박 정부 선령 제한 규제 완화

이번 세월호 참사를 두고 많이 이들이 웃옷도 젖지 않은 채 구조된 선장을 질타합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항로 변경과 승객의 안전은 눈곱만큼도 생각지 않고 먼저 탈출한 점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합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한편 기사를 읽다 보니 이전에도 기계 결함과 잦은 고장이 보고되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선령 제한 규제를 완화했습니다. 그전까지는 노후 선박으로 인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사용 연한을 20년으로 제한했는데 이명박 정부가 그 기한을 30년으로 늘렸습니다.

규제 완화를 통해 기업에 연간 200억가량의 비용 절감이 있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습니다. 세월호는 2012년 일본에서 18년간 운행한 후 퇴역한 여객선입니다. 규제 완화가 없었다면 청해진해운은 세월호를 수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작 2년 더 쓰려고 수리비까지 지출해가며 배를 들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후진 정치, 정치와 일상의 삶을 분리하는 것 

후진 정치와 제 기능을 하는 정치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제가 느낀 가장 큰 차이는 정치에 대한 인식과 태도입니다.

‘정치인들 다 도둑놈이야. 정치판이 그렇지 뭐. 다 썩었어. 그런다고 바뀌겠어?’

그렇게 정치와 나의 삶을 구분해 정치를 타자화하는 것이야말로 후진 정치를 꽃피우는 길입니다. 시민이 정치의 주체입니다.

정치가 일상에 스며들어 모두가 스스로 정치의 주체로 활동하는 사회는 유권자가 무서운 줄 알기 때문에 투표로 심판받기 전에 정당 안에서 자정이 이루어집니다. 제 주변을 비춰보면 정치가 일상의 대화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타자화는 여전합니다. 정치적이라는 말은 욕 비슷하게 사용되고 정치에 대한 신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최근 소셜미디어에서는 쿠르드계 난민이 가족과 떨어져 추방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안전벨트 착용을 거부한 스웨덴 승객들의 기사가 화제였습니다. 탑승자가 단체로 벨트를 매지 않아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었습니다.

스웨덴 당국은 그를 이민자 구금시설로 보내 추방이 일시적으로 유예되었습니다. 스웨덴 이민자지원그룹네트워크의 산나 베스틴 대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건은 이제 언론은 물론 이란의 주목까지 받게 되었다. 이민 당국이 이번 사건을 다시 생각하고 올바르게 결정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산나 베스틴 대표)

모든 문제는 결국 정치로 귀결합니다. 정치를 포기하면 우리가 마주하고 싶은 사회로 가는 길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이득이 될지보다 보편적 가치와 원칙이 정책 결정의 잣대가 되는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사회에 살고 싶습니다.

“무엇으로써 지혜는 측정되는가. – 지혜의 증가는 불만의 감소에 의해 정확히 측정될 수 있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방랑과 그림자’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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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초대필자, 작가

자칭 스웨덴 전문가. 비밀에 싸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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