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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드라마를 자주 보지 않는다. 매회 놓치지 않고 봤던 드라마가 [대장금] 이후 있었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두 딸을 낳아 키우고 있고 내년이면 나이 마흔이다 보니 신데렐라 얘기 나오는 드라마에 감정이입이 되는 시기는 지났다. 두 남녀 주인공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에 가슴이 두근두근한다는 글을 보면 ‘풋~’ 웃음이 난다. 남편은? 역시 드라마라곤 보지 않는다. 두산팀 팬인 남편은 어쩌다 집에 일찍 오는 날이면 야구경기를 보는데 그마저 끝난 요즘 TV는 아홉 살, 다섯 살 난 두 딸이 독차지했다.

응답하라 1994 포스터
응답하라 1994 포스터

우리 부부를 추억으로 끌어당긴 드라마

그런데 우리 부부를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당긴 드라마가 하나 생겼으니, 바로 TvN의 [응답하라 1994]다. 우리 부부는 1994년에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입학해 2학년 5월부터 사귀기 시작, 2002년 10월에 결혼에 골인,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귄 사람과 뽀뽀하고 껴안고 결혼까지 한 그렇게 흔하지는 않은 커플이다. 남편(당시 남친)이 군대에 간 1997년 여름까지 우리는 평일엔 학교에서, 주말이면 밖에서, 1년 365일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났기 때문에 그 시절에 대해 거의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94학번이 주인공이다’, ‘그때 있었던 일들이 디테일하게 나온다’는 주변의 얘기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주로 ‘본방사수’는 하지 못하고 올레TV VOD로 (매회 1200원씩 내며) 6화까지 본 감상은, 재미는 있지만, 진짜 그때가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2000년대 학번이 “94년도엔 이랬겠지”하며 상상하며 쓰는 드라마를 보는 듯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대포동 미사일’이란 단어를 듣고 느꼈을 때의 황당함과 비슷하다. 이 영화에서 과거 부분의 공식적인 배경은 1996년도이고 감독이 처음에 구상할 때 배경으로 삼았던 연도는 1990년도인데, 대포동 미사일이 처음 발사되어 한국에 쇼크를 줬던 것은 1998년 8월이었다.

[응답하라 1994]에서 만난 어떤 위화감 

[응답하라 1994]에서 이런 위화감을 받았던 부분 중 하나는 해태가 대치동에 사는 칠봉이에게 “나라면 대치동에서 살고 싶은데”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전남 순천 출신으로 서울에 대해 잘 모르는 해태로 설정돼 있지만, 대치동이 대단히 유명한 부자 동네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94년에는 대치동이 그렇게 전국적으로 유명한 동네가 아니었다. 유명세를 탄 것은 훨씬 뒤, 2000년 전후 은마아파트 재개발 붐이 일어나면서부터다. 대치동 학원가가 ‘사교육 1번지’가 된 것 역시 1995년 대학생 과외 허용 및 보습학원 허용 조치 이후 압구정동 등에 생겨난 학원가가 이른바 ‘8학군 명문고’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 와 밀집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1998년도쯤으로 봐야 한다.

1991년 출판된 유하 시집 (문학과 지성)
1991년 출판된 유하 시집 (문학과 지성)

94년도에 전국적으로 가장 유명했던 동이라고 하면 압구정동을 들 수 있다. 당시 ‘압구정동 오렌지족’이라는 것이 사회 문제화되어 신문에도 날 정도였다. 하지만 정말 강남 출신이 아닌 담에야 서울에 살아도 압구정동이 뭔지, 오렌지족이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었다. 94년 새내기였던 나는 과 내에서 ‘사회문화학회’라는 학회(학습 동아리)에 들어갔는데, 압구정동 오렌지족이라는 새로운 문화에 대해 알아보겠다며 같은 학회 선배들 및 동기들과 압구정동에 가서 ‘로데오거리’라는 게 어디 있냐고 물어보고 다니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민망한 짓이지만 당시엔 나름 진지한 탐구활동이었다. 상당수 동기들이 지방 출신이라 압구정동 로데오거리가 어딘지 모르는 게 당연했지만 나는 서울 토박이였는데도 알지 못했다. (결국,  로데오거리가 어디인지 모르고 온종일 헤매다 헤어졌다.)

정말 그때 ‘빠순이 문화’가 있었나?

또 하나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목은 나정이의 ‘이상민 빠순이’ 설정이다. 사실 우리 때는 ‘빠순이’ 문화가 그렇게 보편적이지 않았다. 물론 인기 가수에게 소녀들이 열광하는 것은 멀리는 비틀즈 시대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빠순이 문화가 보편적 문화로 자리잡은 것은 H.O.T부터라고 봐야 한다. 그전에는 케이블TV 음악채널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빠순이 활동(?)을 하려고 해도 콘서트나 주말 인기순위 프로그램 정도밖에 갈 곳이 없었다.

물론 서태지 팬 윤진에 대한 묘사는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서태지 열풍은 대단하긴 했다. 하지만 대학 농구경기의 경우 (인기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그렇게 열광적인 팬심을 보여줄 정도의 분위기는 아니었다. 빠순이 문화는 진짜 94학번 세대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H.O.T와 젝스키스 팬들의 다툼을 보여주며 공감을 얻었던 [응답하라 1997]과는 크게 다르다.

‘남자는 논리’ ‘여자는 공감’ 대중적 코드의 기원

1993년 12월 출판된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친구미디어)
1993년 12월 출판된 [화성에서 온 여자 금성에서 온 남자](친구미디어)
남녀의 생각 차이를 놓고 하숙집 여학생들과 남학생들이 설전을 벌이는 부분도 어색했다. ‘남자들은 논리를 따지지만, 여자들은 공감을 원한다.’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경구처럼 됐지만 94년도에는 상식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남녀 간의 서로 다른 생각이 화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출간되면서부터였는데, 이게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것이 1992년도였다. 내가 대학 다닐 때 한국에서도 출간되어 큰 반향을 얻었고 지금까지도 개정판이 나오고 있지만, 이때는 ‘화성남 금성녀’라 칭할 정도로 남녀의 생각이 다르구나’라는 생각이 비로소 생겨난 때였다. 여자조차 여자의 마음을 몰랐던 때였다.

나정이는 해태에게 ‘네 여자친구가 원하는 답은 네가 금요일에 내려갈지 토요일에 내려갈지가 아니야’하고 얘기해 주지만 당시 1학년생 중 그렇게 명확히 남녀의 생각 차이를 알았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그때 여대생들은 남자들과 큰 차이 없는 촌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선배한테 ‘오빠’라고 부르는 게 너무나 어색했던 나머지, ‘형’이라고 부르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도 오빠란 소리가 얼마나 소름 돋았던지… 그렇다고 내가 남자도 아닌데 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웃기고 해서 그냥 ‘선배’라고 불렀는데, 남자 선배들은 그 호칭을 정말 싫어했다.

[응답하라 1994]이 불러오는 추억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응답하라 1994]에 등장하는 소품이나 일화 중 94년을 추억하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삐삐, KFC의 ‘비스켓’ 같은 정도다. 당시 사회적 이슈가 됐던 사건들은 그냥 TV 뉴스 속의 한 장면으로 그친다. 그러한 사건들은 나정이들의 일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94년 대학은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때는 지금은 존재조차 희미해져 버린 운동권 총학생회가 과학생회까지 뿌리 깊게 조직돼 있었던 때다. 학교에 들어가면 처음 가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알려주어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대표적인 게 5.18. 그때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폭동’ 정도로 알거나, 아예 5.18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그런 아이들에게 당시의 처참한 영상과 사진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학생들은 거리로 나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는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외쳤고, 거리에는 최루탄이 난무했다. 5.18 시위가 가장 최고조에 이르렀던 때가 1995년도인데, 그때는 거의 서울 전역의 대학생들이 운동권이든 아니든 총궐기하여 종로를 점거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운동권이 아니었던 내가 남편과 사귀게 된 계기도 그때의 시위에 참가했을 때였다.

1995년, 5.18특별법 제정 및 책임자 처벌 요구 대학생들 시위
(사진: 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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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5.18특별법 제정 요구 시위에 최루탄으로 진압하는 경찰
(사진: 경향신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뿐 아니다. 1995년은 민주노총이 창설된 해이기도 했다. 당연히 94년도에도 이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었고, 학생들의 관심도 많았다. 메이데이 행사에 대학생들도 참가했고, 대학교에서 아예 열리기도 했다. 그때 유행했던 책은 사회과학 서적들이었다. 94년도엔 특히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이 유행했던 걸로 기억난다. 과 잡기장에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치기 어린 고민이 가득했다. 지금처럼 취업난을 걱정하며 공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고(그러나 졸업 직전인 1997년 11월 갑작스러운 IMF 구제금융 신청으로 모두 아무런 대비 없이 실업자로 졸업하는 신세가 된다) 대신 대학생은 사회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1995년 11월 11일 창립한 ‘민주노총’
(사진: 출처 미상)

드라마와는 점점 멀어지는 1994년

물론 나는 1994년에 대학에 입학했던 수많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일 뿐이고, 내 경험이 일반화되기 어렵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다. 그리고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층은 94학번이 아닌 사람들이 훨씬 많다. 진짜 94년도의 대학생활을 그린다면 오히려 공감하는 시청자들이 적을 수 있다. 그러니 애초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다만 회를 거듭할수록 드라마는 94년도에서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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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댓글

  1. 말씀하신 것 처럼 작가가 1994년에 그 나이가 아니었고 그 당시 대학생이 아니었던 것 처럼 보입니다만… 사회 문화의 변화가 시작되던 시기 였던건 맞는것 같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공감도 되는 부분이 많구요~!! 글쓴이 님께서는 일반적인 대학생에서 좀더 진지한 측면에 조금 더 가 계시던 분인것 같구요. 전 중간에서 조금 더 노는 학생 위치여서인지 생각보다는 괜찮았습니다.

  2. 본인이 공감하지않는 경험이라고 그런논리만 찾아서 정리하셨는데요…95학번인 저는 100프로공감입니다. 1년차이로 이리저리 잣대로 긋듯이 조목조목말씀하시지만 95년도 일어난일이라 공감이 안되고 하는건 좀 비뚤어진 평론같습니다. 상징이1994이고 위아래로 공감하는 코드가 하나라도 있다면 동시대를 살았던 순간의 사람들과 하나가 되며 감상할수있지 않읗까요? 그리고 일례로 사회적으로 압구정이 그시절 노출되었지만 암암리에 대치동 사교육열풍과 8학군이 뜨기시작한 시점 맞구요…빠순이문화는 92년부터 대단한 문화조류였고 엑스세대의 상징입니다. 그때 ‘빠순이’라고 명명되지않울만큼 태생기이긴 했지만요..말씀하신대로 님의 경험이 일반화될수 없지만 드라마가 1994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결론에는 동의할수 없네요

  3. 저 역시 94학번인데 잘 공감하질 못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무렵부터 몇 년 동안 늘 연대와 신촌을 오갔었는데 말이지요.
    여전히 학생시위가 많았고 시도 때도 없이 신촌에 매캐한 흔적이 있었는데,
    신촌을 배경으로 해서 만든 드라마인데 참 뭐지 싶을 때가 많았어요.
    제 기억의 신촌 혹은 강북에 위치한 대학생의 학생들은
    그런 빠순이들 보다는, 고등학교 때와 달라진 대학이란 곳에서 공부를 하고 적응해 나가기에 정신 없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정말 공감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그것도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인데 말이지요.
    레포트 써내기도 바빴는데…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은 94년 신촌의 대학생 같다는 느낌을 받진 못 했어요.

  4. 그때 그시절 빠순이라는 표현은 술집작부 라는 뜻입니다 빠순이라고하면 ㅆㅂㄴ이라는 욕하고 동격이라 싸움이 크게 나고 그랬어요
    요즘 그 의미가 바뀌어 쓰인다해도 응답같은 드라마에서는 안써야하는데 참….

  5. 헐거덕…님이 생소해하던걸 우린-같은학번 동기들- 대부분 격하게 공감하며 보는걸요…혹 소수는 그렇지 않다란걸 말씀하시는듯한…암튼 저드라마는 시대를 반영하는데있어 공감가는 부분이 아주 많아요.

  6. 운동권 이셨어요? 94학번 운동권
    많진 않은데..
    다 개인적인 경험에 대입하는거
    아니겠습니까? 전 드라마 동감합니다.
    재밌구요..드라마정도는 재미만 있음
    되는게 아닐런지..물론 각자 가치관의
    차이겠지요..

  7. 님께서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92학번이고 지방대를 다녔었습니다. 94년도에는 군생활 중이었구요. 저 또 한 드라마를 보면서 여기저기 부족한 부분들, 이질감 등을 많이 발견하곤 하는데요. 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응답하라 1994’에는 드라마적 장치들이 여기저기 배치되어 있습니다. 드라마는 드라마이지요. 우리가 지상파에서 느끼지 못하는 부분들을 일개(라고 쓰고 지금은 대세) 케이블 방송에서 충족시켜주고 있다는 것에 저는 고마움을 느껴봅니다.

  8. 과거를 회상하는 부분은 여러곳에서 느낄수 있지요..
    음악, 스포츠, 날씨, 사회ㆍ정치성향, 옷차림, 대학가문화, 유명제품 등.. 한 드라마에 그것을 다 담기도 힘들지요..그렇지만 응사는 그 1994년에 일어난,,있었던 일들을 조금씩 다 보여주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 각각 좀 더 기억하는 부분은 다르니까요..첫회에 정치관련 운동권들을 조금 다루어 주었고, 지속적인 그 해의 음악들(이것만으로도 그 해로 돌아간 기분이 들지 않나요..?), 날씨,분명히 대학농구는 그 해에 정말 인기폭발이었죠. 대학생, 십대 할것 없이 말이죠.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정된 경험의 기억들로 응사가 그 시절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것을 다소 폐쇄적 비평이라 생각이 드네요..또한 응사는 그시절 정치적인 우울한 분위기를 자세히 표현하고자 하는데 목적을 둔 드라마는 아니라고 생각이 드네요..

  9. 빠른76 94학번 1인…
    오렌지족은 그당시잡지나 뉴스 신문에서도
    많이거론되던때에요 보편적으로 알려졌을때구요

    뭐 각각의시각에따라 다르겠지만…..
    농구좋아하고 서태지좋아했던터라
    방송보면 엣추억이 생생하던데…..
    imf이전 풍요롭던시절이었던만큼
    풍부했던문화코드를 중심으로하는
    에피들이 많은거뿐이지…
    뭐 그렇게 차이나게 다른건 아니던데요^^

  10. 압구정 오렌지족은 90년도 초 학번부터 유명했어요 한과에 한두명씩은 꼭 있었는데요. 빠순이도 마찬가지구요.

  11. 기억이란 누구에게나 다르게 남아있는 것이겠죠.
    아마.. 자기의 기억이 드라마에 나오길 바라는 모두의 바램이겠죠.
    모두에게 그렇게 추억으로 남아있는 시절인가보네요.

  12. 복장같은거보면별로그런걸못느끼고.
    시대를느끼게하려고뉴스를가끔이용하는부분이있는것같음ㅎㅎ.1997보단좀아쉽긴하지만그래도스토리는재밌음

  13. 저 사진 보니 옛날 생각나네… 저때 나도 전경으로 저기에 있었는데…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네.. 말년에 이게 뭔 고생이냐고 투덜투덜 흑흑… 어찌되었건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재미있으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한사람 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것이 전부인양 말하시는 것 같은데, 글쓴분이 제 선배(?) 인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제가 운동권에는 워낙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님의 말에 공감이 되는 부분이 많지를 않네요. 참고로 91학번인 제 동기들도 모두 오빠라고 불렀고 후배들한테 형이라는 소리도 들은 적은 없습니다 (아 물론 남자들한테는 들었지만요). 90학번 누나들은 반반 이었구요. 참고로 저도 서울사람 그리고 서울에서 학교 다녔습니다 ^^

  14. 응사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요. 제 느낌에도 당시의 대학생이라기보다는 고등학생의 시선에서 보면 더 맞다고 해야할 것 같아요.

  15. 제가75년생94학번인데 글쓴분은 오히려89혹은90학번아닐까 생각이들정도로 괴리감 느껴짐..우리가 새내기였을땐 운동권과거리멀었고 특별한 사람들 얘기며 솔직히 개인주의성향이 더강한세대였음..그리고 남자선배 형이라부르는 친구들 거의없었음..너무 하나하나 비판의 손가락질하며 보지마시길..드라마는 드라마이고 거기에서 보내는 몇가지 음악이나 이슈화된 기사들이나 소품 한두개정도의 신호만으로도 그시절을 미소지으며 응답할수있으니까…

  16. 제가 94학번은 아니지만..(97).대치동이라던지 하는 부분은 충분히
    이해가고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집값이 최고조를 이룬게 98이지 대치동
    어찌하였든 고등학교때 강남학원가에
    중심이었습니다 94선배보다 저희가 더공감하고 재미있네요^^

  17. 안티네~ ㅎㅎㅎ 너무구구절절 하고 본인위주로 공감대가형성안되네요 그리고 대치동은1994때 맞아요 제가그때 대치동 사는여자애랑사귀었는데 그때부터 대치동 강남부자 그런거 있었어요 너무 공부만하고 대학생활을 심각하고 고리타분하게 보내셨나보내요

  18. 저는 딱1997년에 1세대 팬덤빠순이경험이있어서 전작은 자신을 보는 기분으로 봤는데요(부모님도 딸의 미친 사춘기시절을 보는것 같았다고 합니다^^;) 막상 1994년에은마로 이사를 했고, 대치동에 20년 살아온 입장으로는 은마에사는 칠봉이=부자 라는 설정은 좀 그러더라구요. 당시 은마에 산다 라는건 못사는 대치동사람ㅠ 같은 느낌이랄까요. 막상 2000년즈음에 대치동붐이 일면서 은마가 금마라고 불릴때에도 왜??라는 의문밖에 없을정도로요..
    94년의 대학생활이란건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상상만하는 저로서는 정말 그시대를 살아보지못한 작가가 주변의 이야기를 잘 각색해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제 세대에서의 대학에 대한 환상이 반영됐다는게 느껴집니다. 다만, 뒷세대는 사회의 어려운부분을 모르기에 글쓴이가 느끼는 시대적 괴리감을 느끼기보단 드라마적 재미에 좀더 공감이 큰건 어쩔수 없지 않을까 싶어요.
    결론은! 드라마는 나름 재밋게 즐기고있고, 글쓴이처럼 실제 그시대를 살아온분의 이런이야기를 알아가는것도 흥미롭습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19. 정답 이 드라마는 다큐가 아니라고했다 그리고 운동권문제가 없으면 꼭 모든게 싫은 이런 성향의 살람들 드라마 안봐도 된다 나 94 학번 눈물나게 그립구만 혼자 착각하신모양이네요 원글쓰신분. 그리고 오히려 오랜지족을 모르고 진짜 소수나 했던 운동권을 강조하는걸 보니 역시나임.

  20. 이회창이 빠순이 발언으로 대선에서 타격을 받은 게 2000년 이후인데..

    댓글을 보니 기억은 역시 편한대로 조작되는 듯. (팬질이 없었다는 뜻은 아님.)

    90년대 중후반에 스스로를 빠순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고? 흐흐…

  21. 94년도에 대학생이었는데 농구 인기 대단했습니다. 저도 엄청 쫓아다녔지요. 중고생뿐아니라 대학생팬도 엄청 많았어요.

  22. 기억이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그러나 상당수는 맞는 것들이라고 보네요
    슬램덩크로 시작해 연대농구부의 인기 그로인한 드라마 제작
    그당시 어린 중고등학생들도 엄청 팬 많았어요.그때 전 초~중학교 넘어갈때였는데 농구대잔치 경기 중계할때 보면 교복입은 학생들 엄청 많았고 인기는 정말 장난아니었음
    뉴스에서 학생들 쫓아다니는거며 학교차 못가게 막는거며 많이 나왔었는데요?
    개인적으로 저도 이상민, 허재 좋아했지만..ㅋ
    빠순이란 표현은 서태지때부터 나오긴했지만 그땐 저리 말 쓰진 않았고
    그전에도 열성팬은 어디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때는 공연문화가 오히려 지금보다 더 많았어요(소극장,대극장. 콘서트도 계절,방학때면 전국순회로 항상 했었구요. 오히려 지금보다 공연문화나 쫓아다니는-참여하는-팬들도 많았죠.그만큼 그리 안하면 보기가 힘드니까?ㅋㅋ)
    여자애들도 농구,만화 엄청 볼때였고 저랑 언니(언니는 97학번)는 슬램덩크 나오는 날이면 서점에 미리 예약할정도였구요(그냥 동네 쬐그만 서점. 그정도로 인기 장난아니었음)

    형이라고 부르는건 특정한 경우가 있는데 주로 운동권, 자기가 좋아하는데 감정 숨기는 여자들, 남녀평등주의자(여성인권자)쪽이 많았다고 보고 오빠란 말은 아주 자연스렀웠음
    -그당시 드라마(대학생활을 많이 다룬 드라마 많았죠)에서도 꼭 여자 한두명씩 형이라 표현을 했긴 했는데 그게 특이한 경우였고 대다수는 오빠라 했음
    대치동은 뜨고 있던게 맞는데(울언니가 95~96년에 그 학원 다녔으니) 은마아파트는 좀 다르긴 한듯.(드라마 인어아가씨에서 똑같이 은마아파트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 은마아파트는 못사는 층으로 비춰지며 나왔으니까요)

    운동권 부분이 있었던건 사실이지만 80대에 비하면 약해진게 사실이죠. 즉 개인주의가 강했다는것.(물론 그때도 대학생들이 여름이면 운동하고 저도 종로,신촌가서 체류탄 마셔본적 있긴한데 생각보다 참 짧게 하던데요..)
    전 지방 살았다 서울로 92년에 왔는데 지방(청주)은 80년중후반때 맨날 시위에 체류탄에 난리도 아니었다는(전두환정권 반대)노태우 되고선 그나마 줄어든건데(그때도 또 난리였던것도 있지만)..전 미취학때인데도 기억할정도인데.일반 시민들도 가담까진 아니어도 대학생들 응원하고 그럴때였고요. 님은 저보다 6살 정도 많은거 같은데 공부만 하다가 20살때 아셨나봅니다.80년대에 비하면 정말 운동권 줄어들었어요
    그 이후 좀 성향이 바뀌었다가 90년 후반엔 한민족축제(북한)어쩌고 하다가 또난리났고.. 암튼 운동권도 성향이 바뀌어서 그닥 인정 못 받았다고 해야하나?

    님이 대학때 사회운동쪽에 관심을 가지신거 같은데 과거에 비하면 덜했다는건 맞고 또 80년대에 비해 지지를 그닥 못 받았죠.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고 경험이 다르니 어쩔수 없는것인데..
    80년대에 비하면 90년대는 희망차고 여유롭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던건 맞는거 같네요
    그리고 서울은 지방에 비함 데모도 좀 덜한거 같은데.ㅋㅋ(너무 늦게 한건가? 뭐 청주가 워낙 유명했고 시민들도 비슷한 생각이었던게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밑에지역과 가까우니까)

    그외 여성과 남성 논리도 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른거고 사람마다 표현의 차이는 있으니까요
    그외 일반 소설책들만 봐도 주로 사회운동, 데모, 의식있는 지식인, 대학생들의 데모는 주로 80년대로 그려져요(민주화운동,대통령선출제등등.)88년때 노태우 되고선 정말 데모 줄어든건데요.ㅋㅋ 공지영(예전엔 그런..님이 말하는 대학의 느낌 같은걸 그리고 고뇌하는 청춘?같은 소설을 많이 써서 어렸을때 엄청 좋아했으나 지금은 안 봄)씨 더이상아름다운방황은 없다 랑 양귀자씨 책에도 비슷한게 있는데 아마 그거 드라마로도 만들어졌을거예요.(80년대에는 절대 나올수 없는 드라마) 그런거보면 80년대학생운동과 90년대(특히 90년중후반이후)학생운동에 대해 시민들이 그닥 호응하지 않을수밖에 없는 차이들이 존재한다고 보네요

    음.. 저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삶을 산 대학생들이 더 많았다고 보긴해요

  23. 기자님의 글을 보고 약간 짜증이 났다고나 할까.

    내가 모르고, 내가 겪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모르시나요.
    화성남자 금성 여자라는 책이 나오기 전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부분에서는
    완전 빵 터짐.
    ‘기자’라는 분이 이렇게 편협해서야.

    저도 94학번이고 나름 운동권이었지만 님의 글에 별로 공감 안감.
    그때 여대생들은 남자들과 다름없는 촌스러운 사람?
    웃기지도 않네요.
    님이 그렇게 살았다고 해서 다 그런건 아니랍니다.

    자기의 생각을 글로 써서 먹고 사는 분이 맞다면 반성하시길.

  24. 저도 75에 94 공대 지방에서 서울 올라 와서 하숙 생활
    그런데요
    응답하라 1994 의 감독이랑 작가 모두 94 에요
    님 글은 정작 중요한 걸 놓치고 있네요

  25. 8학군이 뜨기 시작했고요? 뜨기 시작한건 그보다 한참 이전이었구요, 90년대에는 과학고와 외고의 득세로 오히려 8학군에 대한 환상이 사라지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26. 내가 94학번인데 글쓴님글에 공감이 별로 안가네요..그냥 본인 생각을 너무 일반화 하신듯요..

  27. 와이프랑 보면서 기자님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기자님 기사에 동감한다고 이야기했더니,
    와이프말…공대생이잖아…라고 이야기하더라구요. 물론 94년도에 저도 우루과이 라운드, 메이데이 집회 등등 쫓아다녔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 도 있겠더라구요.

  28. 모두의 소중한 댓글 감사합니다. 이 글은 제목에서 나와 있듯 “한 94학번이 본” 감상평일 뿐입니다. 당시 94학번이었던 사람들은 엄청나게 많고, 저는 그중 한 사람이니까 제 경험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는 비판에 100% 동의합니다.
    다만 그 당시는 지금과 달리 학생회 조직이 뿌리내려 있던 시기였던 것은 맞습니다. 학생회 조직의 영향으로 (굳이 집회에 같이 나가지 않더라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나 여러 학내 활동을 통해 서서히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의식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은 공통된 경험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속 ‘신촌하숙’의 하숙생이 그렇게 많다면 적어도 한명 정도는 운동권 선배에게 ‘포섭’돼 집회 현장을 따라다녔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PD가 94학번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2000년대 학번 작가가 상상하며 쓴 것 같다”는 부분은 그 점을 알고 있는데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저는 PD가 몰라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특정 부분을 거세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신대도 반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94년 각자의 추억은 모두 다르고 모두 소중하니까요.

  29. 요즘은 사극조차 퓨전사극이다 뭐다 하면서
    엉터리 고증에 역사왜곡조차 허다한데
    응답하라1994같은 가벼운 로맨스 드라마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시는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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