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x type=”note”]한 지역 활동가께서 경실련의 정당공천제 폐지 주장을 비판하는 칼럼을 보내왔습니다. 필자는 원고를 보내오면서, 객관적인 자료에 기반을 두진 않았지만 활동가로서의 체험이 담긴 글로 읽어달라는 당부를 전했습니다. (편집자 주) [/box] 지난 2013년 4월 2일 경실련에서는 ‘기초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폐지를 촉구하는 지방자치 관련 전문가 140인 공동선언문 발표’(이하 ‘경실련 공동선언문’)가 있었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촉구한 140명의 지자체 전문가
경실련 공동선언문은 ‘정당공천제는 폐지되어야 하고, 지방의 살림살이는 지역주민들에게 맡기고 지역주민의 의견을 존중하며 책임질 수 있는 지방정치인들에게 돌려 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 듣기도 좋고, 그래야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경실련 공동선언문에서 말하는 지방 살림살이 돌려받을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까?
경실련 공동선언문을 작성한 사람들 생각에는 선량하고 믿음직한 주민과 지역정치인들이 정당공천제 때문에 탄압이라도 받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혹은 정당공천제를 없애면 시민활동가들이 대거 의회에 진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짧게나마 지역에서 활동한 나에게 경실련 공동선언문의 주장은, 심하게 말하면, 망상으로 들린다.
지역의 운동 역량은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정당공천제가 없어진다고 활동가들이 의회에 진입할 준비가 돼 있을까? 공동선언문 140명의 ‘전문가’들은 정말 그렇다고 믿는 것일까?
“동네 기초의원 후보가 누군지 대충이라도 아십니까?”
일부에서는 정당공천이 폐지되면 지방토호세력이 발호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시민들의 높은 정치의식을 무시한 처사이다. 시민들은 공적단체를 통하거나 또는 자발적인 참여와 추천을 통해 슬기롭게 대처해 나갈 것이다. – ‘기초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폐지를 촉구하는 지방자치 관련 전문가 140인 공동선언문 발표’ 중에서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내가 직접 체험한 일이 떠올랐다. 2010년 지방선거 당시 일이었다. 선거철만 되면 방문자가 많아지는 어떤 사이트에서 누군가가 경품을 걸고 사이트 방문자들에게 질문했다.
‘여러분 동네에서 출마하는 지방의원 후보들의 면면을 대충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거나하게 술을 사겠습니다’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그 질문에 답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홈페이지는 정치에 관심이 사람이 모여 이야기하는 온라인 공간이었다. 서울시장은 누가 좋네, 경기도지사는 누구는 안 되겠군 등의 정치평론은 전문가 뺨치는 수준으로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사는 동네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 후보는 누가 나왔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이것이 내가 목격한 현실이다.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다른 곳이라고 사정이 다를까.
지역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도 별로 없는 마당에 “시민들은 공적단체를 통하거나 자발적인 참여와 추천을 통해 슬기롭게 대처”할 것이라고? 이런 주장을 확신에 차서 할 수 있다는 용기가 부러울 따름이다.
정당공천이 없었던 황금시대?
경실련 공동선언문은 지방의 중앙 종속이 정당공천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정당공천제를 하지 않을 예전이 지금보다 더 낫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내 기억만으로는 정당공천이 없었던 예전이 정당공천이 있는 지금보다 더 나았었다고 이야기할만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오히려 정당공천제가 없어서 실질적으로는 정당이 공천 권리를 맘껏 행사하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전혀 지지 않는 모습을 우리는 이미 경험하지 않았나?
가정적인 사례 하나를 떠올려보자. 내가 사는 동네에서 보궐선거를 한다고 치자. 그런데 정당공천제는 없다. 즉, 정당은 어디든 후보자를 공천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보 공보물에는 떡하니 ‘@@@당이 추천하는 무공천 후보’라는 문구가 박혀있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이런 모습이 과연 경실련이 바라는 정당공천 없는 새로운 시대일 것인지 의문이다.
이야기를 잠시 돌려 보자. 이러저러한 사람들을 만나 정당공천 이슈에 관해 토론하고, 논의하다 보면 이들이 일정한 경향성을 띄게 되는 걸 발견한다. 내 자신, 개인의 많지 않은 한정적 체험에 불과하지만, 지역에 관한 관심이 없으면 없을수록 정당공천제를 폐지하거나 심지어 지방의원들을 없애는 것에 찬성하는 비율이 높다.
기초의원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알기나 하시나
이런 일이 있었다. 지역의 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계신 신재안 씨 이야기다. 어느 날 SH공사에서 신재안 씨에게 느닷없이 집에서 나가라는 통보가 왔다. 이유가 기가 막혔다. 16년도 전에 가출한 부인이 지방에 집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신재안 씨는 한 지역의원을 찾았다. 그리고 그 의원이 이리저리 방법을 찾으면서 언론에 기사가 났다. 지역 의원의 노력 끝에 SH공사는 명도소송을 취하하고 더 나아가서는 서울시에 이와 관련해서 제도적으로 개선을 건의해달라는 말까지 하게 만들었다.
더 나은 지역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지방의원은 신재안 씨 사례에 등장하는 의원이 아니라도 많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지방의원은 거의 일하지 않고, 딱히 할 일도 없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서울 시장의 인허가권 숫자보다 구청장의 인허가권 숫자가 더 많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들이 무시하는 구의원들이 감시해야 하는 예산이 수천억 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문제는 정당공천제가 아니다
나는 의심한다. 바로 그런 무관심과 무지 때문에 기초의회 의원을 없애도 된다는, 혹은 정당공천제를 폐지해도 된다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닐까? 경실련은 그런 시민의 무관심에 편승해서 정당공천 폐지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닐까? 경실련이 바라는 훌륭한 지역활동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할 해법도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당공천제가 모든 죄악의 근원인양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질없다. 시민도 없고, 활동가도 없이 이런 탁상공론이 다 무슨 소용인가?
마지막으로 경실련과 같은 전국단위 시민단체에 한소리를 하자. 평소에 딱히 지역정치 등에 관심도 없어 보이다가 이런 식으로 갑툭튀(주: 갑자기 툭 튀어 나옴)를 해버리면 곤란하다. 깜짝 스포트라이트를 받을지 몰라도 지역에서는 짜증이 날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은 한 번쯤 해보기 바란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경실련이 과연 지역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얼마나 진심으로 걱정하는지 근본적인 의문까지 생기는 선언이었다. 물론 이런 의문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