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Psy)의 젠틀맨(Gentleman)을 뮤직비디오(이하 ‘뮤비’)로 이제야 접했다. 이 글은 그 노래와 뮤비에 관한 해석이면서 온갖 설왕설래를 바라보는 내 마음의 움직임이다.
반어와 아이러니의 세계
뮤비 젠틀맨은 소리로 흘러나와 귀에 꽂히는 가사와 눈으로 들어와 박히는 그림이 서로 의도적으로 어긋난다는 점에서 반어적이다. 나타난 표현과 내포된 의미의 의도적인 불일치를 미학적 무기로 삼는 아이러니의 세계를 우리는 이미 ‘강남스타일’에서 본 적 있다. 그 세계는 그저 과장으로 부풀려진 환상에 머물지 않고, 2013년 대한민국을 함축한다. 사회적 정치적 상징으로 표현된 리얼리티 코리아.
왜 반어인가.
이 질문은 젠틀맨 뮤비를 이해하는데 있어 아주 본질적인 질문이면서 동시에 부질없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마치 이렇게 들린다.
왜 박근혜인가.
이미 어쩌다보니 우리 시대는 박근혜 대통령의 독선이 지배하는 세계다.
(청문회의 신기원 윤진숙이 장관되는 놀라운 세계! 박근혜 초대 내각의 화려한 면면!)
입으로는 “I’m mother father gentleman.”(나는 엄마 아빠 신사)라고 노래하지만, 뮤비는 어른(엄마 아빠 신사)의 세계를 희롱하고, 배반하는 장난꾸러기와 사춘기 악동의 이미지로 점철한다.
보이는 이미지와 흘러나오는 소리, 부르는 이름과 불리고 싶은 이름이 서로 엇갈리고, 남자의 욕망과 여자의 욕망이 서로 어긋나며, 기성세대와 자식세대가 서로 만나지 못한다. 그런 갈라진 분열의 세계에서 싸이는 “알랑가 몰라”라고 물으며 스스로 답한다. ‘왜 박근혜야하는 건지!’라고. “왜 화끈(말끔)해야 하는 건지”는 이렇게 뒤틀린 세계의 정체를 박근혜 시대와 등치시키는 의미심장한 말장난처럼 들린다. 그 환청으로 젠틀맨의 세계를 들여다보기 전에 대한민국이 바라보는 젠틀맨을 우선 살펴보자.
약소국 컴플렉스와 문화의 국가대표화
젠틀맨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정서는 싸이라는 ‘국가대표’ 똘아이가 얼마나 그 똘기로 국위를 선양할거냐는데 모아진다. 굳이 표현하자면, ‘대중문화의 국가대표화’라고나 할까. 이런 마음은 마치 김연아의 스케이팅을 바라보는 조마조마함으로 싸이의 젠틀맨 관련 기사들과 소식들을 찾아보게 만든다. 그 이상한 감정은 마치 삼성 갤럭시가 애플 아이폰의 매출을 뛰어넘으면 내가 삼성 주주라도 된 것처럼 기쁜 그런 묘한 감정이다. 물론 그 감정은 온갖 언론과 미디어들을 통해 유도되고, 확대재생산된다.
그 이상한 감정,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지난 한 세기만 대한민국 역사를 되돌아봐도 그 감정 이해하고도 남는다. 쇄국으로 국력은 점점 더 쇠락하고, 그나마 문호를 개방했더니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해 버린 나라. 해방하고 나서는 같은 민족끼리 비극적인 내전을 치른 뒤 여전히 분단된 유일한 나라.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개천용’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미군 트럭을 쫓으며 ‘김미초콜렛! 김미초콜렛!’하던 대한민국은 반도체와 휴대전화, 조선과 철강, 자동차로 세계를 호령하는 “초일류” 글로벌 기업을 가진 경제 강국이 되었다. (일류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초’일류라는 표현은 얼마나 초라한가, 얼마나 빈곤하게 그 마음의 허함을 담고 있나.)
그뿐이랴. 중국, 일본, 동남아는 물론 영원한 마음의 ‘본토’ 미국으로까지 한류를 수출하기에 이른다. 싸이를 새로운 얼굴마담 세운 한류는 유튜브의 빌리언 히트를 발판으로 미국의 가장 대중적인 인터넷 라디오 서비스 판도라닷컴에까지 ‘K-Pop’ 코너를 만들고야 만다. 우리는 어느새 문화 강국으로 성장했다. 문화라는 게 국가대표들끼리 경쟁하는 토너먼트, 혹은 마라톤 같은 기록경기라면 말이다. 창조경제 만세! 문화 융성 만만세다~!
우리 시대는 박정희 시대보다 나은 시대인가
박근혜로 부활하는, 아니 그 의식적 뿌리를 제공하는 시스템의 숙주로서는 한번도 죽은 적 없던 박정희의 세계는 2013년 대한민국에서 비로소 만개한다. 세계 최고, 동양 최대를 부르짖던 박정희의 약소국 컴플렉스는 부모세대에게는 이미 의식 깊숙이 내면화된 감정이다.
그렇게 기성세대는 투쟁과 혁명에 가까운 저항(80년, 특히 87년 대항쟁)의 시대를 지나 동유럽 연방의 독립과 소비에트의 해체(90년대 초)를 목도하고, 결국은 IMF 직격탄(97년)을 맞는다. 그래서 신기섭의 지적처럼, 지금 우리 시대의 뼈대는 ’87년’으로 상징되는 혁명과 개혁의 체제가 아니라, ’97년’으로 상징되는 반동과 보수의 체제다.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개천용으로 잘 나가다가 경제적으로 망할 수도 있다는 공포는 상상을 초월하는 집단 트라우마를 만들어냈다. 그런 집단 히스테리, 집단적인 공포가 애국주의로 포장된 채 장롱에서 온갖 금붙이를 모아내는 시대의 집단 퍼포먼스로 승화한 것이다. 물론 가축보다 착하고 순한 국민의 금붙이들이 결국은 대기업 배불려 주고, 국제 투기자본에 봉 노릇 하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말이다.
박정희 시대는 동양 최대의 세종문화회관과 “불가능은 아무것도 아니다”의 원조인 경부고속도로의 ‘하면 된다’ 신화가 이순신이라는 구국의 ‘국가대표 영웅’의 아이콘 뒤에 숨어서 인권을 짓밟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철권통치를 이어간 시대였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이 시대가 그 박정희 시대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초’일류 글로벌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노조의 삼성에서 어린 생명들이 상당히 의심스러운, 하지만 끝끝내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가는 시대. 그런 허허로움을 국가대표 대중문화, 국가대표 스포츠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시대. 그 야만을 끝끝내 떼가수들의 탐스러운 허벅지와 소년들의 샤이니한 웃음에 숨기는 시대. 그리고 한편에선 ‘젊은 것들의 만원 커피를 피상적으로 타박’하는 시대. 그게 우리 시대의 정체가 아니던가 말이다.
환청으로 다시 듣는 젠틀맨
다시 뮤비 젠틀맨으로 돌아와보자. 시각적으로 뮤비는 더 이상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듯이 노인들을 대거 등장시키며 시작한다. 그리고 가학적으로 보일만큼 싸이의 장난질이 계속되고, 싸이와 가인이 한 쌍으로 과장된 성적 제스처를 이어간다. 청각적으로는 젠틀맨 뮤비의 청각적 인상을 결정짓는 “(아임) 마더 파더 젠틀맨”이라는 후렴구를 반복하면서, 결국은 가인과 싸이의 수줍고, 장난스런 NG 장면들로 이 뮤비는 끝난다.
“(아임) 마더 파더 젠틀맨”
‘(아임) 마더 퍼커 젠틀맨’
“알랑가 몰라 왜 화끈해야 하는 건지”
‘알랑가 몰라 왜 박근혜야 하는 건지’
싸이의 미끄러운 혀에서 흘러나오는 이 말장난, 아니 내 귀에 들리는 이 환청은 젠틀맨의 정치사회적인 의미를 증폭시킨다. 왜 박근혜이어야 하냐는 질문으로 시작한 이 아이러니의 노래는, 그 환청(착청)이 의도적이었는지는 별론으로, “나는 엄마 아빠 신사”가 아니라 ‘나는야 X같은 젠틀맨’이라고 이 거룩한 시대의 위선을 아주 의도적이고, 저질스럽게, 그리고 노골적이고, 천박하게 반어적으로 고발하는 듯 하다.
그래서 수줍은 듯 쑥스러운 마지막 NG 장면은 마치 사춘기 소년소녀의 일탈적인 해프닝, 혹은 [보니 앤 클라이드]의 질주가 끝난 것 같은 허무를 스스로 인정한다. 이것은 사춘기 남자 아이의 몽정에 나오는 꿈이기도 하다. 즉, ‘젠틀맨’은 어른의 노래가 아니라 사춘기의 노래다. 이 노래는 성숙한 사회 고발이 아니라, 말초적 본능을 에너지 삼아 질주하는 사춘기의 일탈적 욕구가 만들어내는 알 수 없는 분노와 야유다.
4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노래와 뮤비에 담긴 이 극적인 서사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형상화되었는지는 차치하고, 젠틀맨 뮤비의 이야기 구조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위선적인 사회에 대한 분노를 숨기면서 노골적인 섹스 코드로 자신을 위장하지만, 그 노골적인 섹스 코드 안에 숨겨진 건 사춘기 소년(혹은 노인)의 자기 연민이다. 물론 그 자기 연민은 아주 폭력적인 방식으로, 때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분노와 장난으로 표출된다.
그래서 뮤비를 지배하는 정서는 가부장 마초나 가학적인 남성 우월주의라기보다는 아직 성장하지 못한 사춘기 소년의 공포와 그 반작용에 훨씬 더 가깝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하지 못한 채로 욕망과 소망이 뒤엉킨 ‘엄마, 아빠, 신사’와 ‘X같은 젠틀맨’이 공존하는 지옥의 한 철. 그 시간을 대한민국에 사는 청춘들은, 아니 우리들 대부분은 여전히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화끈해’와 ‘말끔해’를 기어코 ‘박근혜’로 듣는 건 나의 정치적 욕망과 그 결핍이 만들어 내는 환청이리라. 하지만 어쩌면 이 세계야말로 진실의 목소리를 숨기는, 혹은 거짓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무수히 많은 결핍들이 만들어내는 환청의 세계가 아니던가.
미스터 젠틀맨을 찾아서
이 세계를 만든 모순의 재료는 바로 당신의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점점 더 잊혀지는 공동체에 대한 소망, 그 어긋남에 다름 아니다. 이 꿀이 흐르는 자본주의는 당신의 욕망을 점점 더 부추기면서 동시에 위선적으로 금욕적인 시선을 당신에게 강요한다. 그렇게 당신은 사춘기를 제대로 통과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렸다.
미끄러운 혀. 탐스러운 혀. 욕망을 집어 삼키는 입. 그 속에 담긴 그 부드러운 혀. 떡을 물어뜯는 이빨과 오뎅을 핥아먹는 그 혀(가인과 싸이의 노골적인, 하지만 유치해서 실소를 자아내는 그 장면들). 그 혀에서 나오는 발음할 수 없는 존재들. 직접 욕할 수 없는 권력들. 그 혀는, 그래서 우리의 결핍이 만들어내는 그 환청으로, 욕망의 실현을 방해하는 상징들(어린 아이에 대한 괴롭힘으로 상징되는 양육과 교육에 대한 공포, 여성에 대한 도를 넘은 장난으로 상징되는 연애도 결혼도 점점 더 불가능한 사회 등), 그리고 그런 상징을 구조화시킨 ‘젠틀맨’을 조롱하며 노래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조롱은 자신을 향한다. 싸이 자신이면서, 그 싸이를 보는 남성, 가인을 바라보는 여성 모두가 그 조롱과 비판의 주체이자 동시에 대상이 된다.
알랑가 몰라
왜 화끈해야 하는 건지 (왜 박근혜야 하는 건지)
아임 마더 파더 젠틀맨 (아임 마더 퍼커 젠틀맨)
그렇게 젠틀맨 뮤비는 세상을 엿먹이는 유치하고, 똘기 가득한 미성숙의 세계, 사춘기의 작정한 일탈로 만들어진 세계면서 동시에 사회에 대한 공포로 만들어진 세계다. 그 세계는 말초적인 욕망과 유치한 장난이 몽정의 꿈처럼 가득하다. 그리고 가인은 싸이의 욕망을 함께 이해하면서 그 장난스럽고 위험한 일탈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 둘은 쑥쓰러운 듯 자신의 실수(마지막 NG 장면들)를 끝내 부끄러워 한다.
그렇다면 금욕적이고, 근엄한 시선으로 젠틀맨의 뮤비 속에 담긴 과장된 일탈의 이미지만을 탓할 일 만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 여전히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사춘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그렇게 친구로서 함께 그 일탈적 욕망이 자라는 숙주를 바라보고, 그 유치한 일탈 속에 숨겨진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게 진짜 어른, 젠틀맨이니까.
퇴행은 퇴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