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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올림’ 임자운 변호사 소송기] 방독마스크도 없이 벤젠, 시너, 디클로로메탄 혼합 유기용제 환경에 노출된 ‘서류만 관리직’인 현장 노동자가 희귀질환에 걸렸다. 하지만 직업병을 인정하지 않는 근로복지공단. 공단을 상대로 한 법적 공방의 기록.


“그동안 좋은 일이 너무 없었는데 … 참 좋네요.. 감사합니다.”

어제 일이다. 변호사 일하며 가장 좋은 때를 꼽으라면, 승소 판결 소식을 전하며 감사 인사 받을 때다. 그래 이 맛에 변호사 하지, 싶다. 1심에서 진 걸 2심에서 뒤집었다. 직업병 소송이 다 그렇지만, 이 사건도 참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원고, 관리직이지만 현장 업무에 종사


원고는 ‘전신성경화증’ 환자다. 피부나 혈관, 내부 장기가 두꺼워지거나 딱딱해지는 희귀질환이다. 이 병으로 결국 고인이 된 반올림 피해자(삼성반도체 이혜정 님. 2018년 산재 인정)도 있었다. 참 고약한 병이란 걸 그때 알았다.

원고는 굴삭기 하부 프레임을 만드는 공장에서 용접, 도장 공정 일을 했다. 원래는 현장 ‘관리직’이었으나, 병에 걸리기 2년 전부터는 현장에 상주하며 현장 업무를 직접 했다. 회사에서 빠져나간 현장 인력을 충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임시로 맡게 된 일을 수년간 계속 떠안았던 셈이다. 도장 설비를 분해하고 세척하는 일, 도장이 잘 안된 부분을 붓으로 수정하는 일은 아예 전담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작업환경이 더 심하게, 안 좋았다. 설비 표면에 도료를 분사하는 ‘도장’, 표면을 연마하는 ‘쇼트’ 작업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이었다. 여러 종류의 유해 물질이 공기 중에 뿌려졌다. 그래서 다른 현장 작업자들에게는 필터가 달린 ‘방독’ 혹은 ‘방진’ 마스크가 주어졌지만, 원고에게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관리직’이라는 이유였다. 그래서 그냥 우리가 흔히 쓰는 천 마스크를 쓰고 일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었다.

더 놀라운 건 공단 조사 과정에서 나온 회사의 진술이었다. 원고의 업무에 관해 “사무직 관리업무”, “사무직 사원으로 현장 업무는 하지 않았음”이라 했다. 개인적으로 어떤 ‘버튼’이 눌리는 지점이었다.

내가 대리한 원고는 굴삭기 하부 프레임을 만드는 공장에서 용접과 도장을 했다.

유기용제 ‘노출 수준 낮았다’는 산보연 조사의 허점


‘업무상질병’이 인정되려면 업무 중, 질병의 발병 혹은 악화 원인이 될 수 있는 유해 물질에 상당 수준 노출되었어야 한다. 원고의 업무 환경에는 ‘전신성경화증’의 발병 원인이 분명하게 존재했다. 바로 ‘유기용제’다. 문제는 그 유기용제에 얼마나 노출되었나 였다(노출 정도).

원고의 작업 환경을 조사산보연(산업안전보건연구원)‘노출 수준이 낮았다’고 했다. 두 가지 근거를 들었다.

  • 첫째는 [작업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에 기재된 노출값이 모두 노출 기준 미만이었기 때문.
  • 둘째는 산보연이 자체적으로 산출한 ‘누적 노출 점수’가 낮았기 때문.

우선 그 [작업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란 것은 산안법(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작성되는 문서인데, 거기에 적힌 노출값으로 노동자의 실제 업무환경을 평가할 순 없었다.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세팅된 환경에서 측정하는 거니까. 그리고 그 ‘노출 점수’라는 것, 대체 무슨 근거로 원고의 노출 확률과 강도, 빈도를 모두 낮게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사업주가 강조한 ‘사무직 관리업무’가 강하게 작용한 것 같았다.

벤젠, 메탄올은 대표적인 유기용제다.

1심, 판사의 ‘진료기록 감정’ 권고를 반대하다… 그리고 뒤통수


이런 문제들을 지적하며 소송이 진행되었다. 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1심 소송 말미에 재판장이 ‘진료기록 감정’을 권했다. 원고의 질병이 업무상질병이 맞는지, 의사한테 물어보자는 거였다. 나는 부적절하다고 답했다. ‘유기용제’와 ‘전신성경화증’의 의학적 관련성은 산재법 시행령에도 나와 있고, 그래서 이 사건에서는 그 ‘노출 정도’가 문제인데, 그 판단을 의사에게 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진료기록 감정 때문에 3~4개월 이상 소송이 중단되는 일도 허다했다.

판사는 ‘전신성경화증’에 관한 시행령 내용도 모른 채 진료기록 감정을 권한 것이었다. 업무상질병 소송에서 무분별하게 감정을 거치려는 관행, 산재법상 상당인과관계 판단을 의사에게 의존하려는 태도, 개인적으로 꼭 바로 잡고 싶은 문제였다. 그래서 더 힘을 주어 설명했고, 판사도 수긍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1심 판결문을 받고 솔직히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판사 역시 산보연과 같은 이유로 ‘유기용제 노출 수준이 낮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진료기록 감정을 하지 않아 의학적 근거도 부족하다’고 했다. 감정 신청을 하지 않은 건 원고와 상의한 일이었으나, 이렇게 판결문에까지 적시되고 나니 나 자신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소심, ‘진료기록 감정’ 고민에서 ‘방독마스크 미지급’ 증언까지


항소심 첫 기일에서, 나는 ‘진료기록 감정’에 관한 고민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여전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고집할 마음은 전혀 없다고, 필요하다면 바로 신청하겠다고 했다. 재판장은 가만히 듣더니, ‘무슨 취지인지 알겠다. 1심 판결문에 그런 내용이 적힌 것이 이례적이다. 지금으로서는 다른 증거조사 방법을 고민하면 좋겠다’고 했다. 참 감사했다.

항소심 재판부가 이런 주문을 했었다. ‘동일 사업장에서 유사질병 사례가 또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희귀’ 질환의 ‘유사’ 질병 범주를 어떻게 설정할지 난감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답을 해야 했다.

원/피고 쌍방에 주문한 것이었으나, 피고(근로복지공단)가 어떤 답을 할지는 뻔했다. 원고는 꽤 규모가 큰 사업장에서 협력업체 소속으로 일한 것이었다. 문제는 작업 ‘공간’이지 ‘고용관계’가 아니었으므로, 재판부의 질문에 올바르게 답하려면 해당 사업장에서 일했던 (소속 불문) 노동자 전체에서 유사질병 사례를 찾아야 하는데, 피고는 ‘고용관계’를 기준으로(즉, 원고가 속했던 ‘협력업체 피고용자’를 대상으로) 사례를 찾을 게 뻔했다.

그래서 근로복지공단에 대한 사실조회를 고민했다. 질문을 직접 던져 자료를 받아보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곧 포기하고 말았다. 근로복지공단의 전산시스템이 ‘고용관계’를 기준으로만 산재신청/보상 자료를 관리할 뿐, 근무 ‘공간’을 기준으로는 관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즉 재판부의 질문에 올바르게 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재 데이터 관리가 이토록 취약함을 또 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재판부에 그러한 사정을 서면으로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 뿐이었다.

항소심에서 나는 ‘노출 정도’에 대한 주장·입증을 보완했고, 증인 신청도 했다. 원고와 함께 현장 작업자로 일했던 분을 법정에 세웠다. 다행히 당시 작업 환경을 차분하게 진술해 주었다. 나도 미처 알지 못했던 업무 상황까지 자세히 드러났다. “방독마스크를 끼지 않으면 안 되는 곳이었는데 왜 (원고에게는) 지급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는 진술도 나왔다.

벤젠 농약 등 방독마스크. 3M 제공.

항소심, ‘작업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 관한 명쾌한 판단


그렇게 저렇게 변론은 종결되었고, 어제 판결이 선고되었다. “1심 판결과 피고의 불승인 처분을 모두 취소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고등법원은 “법적·규범적 관점에서 이 사건 상병은 원고가 다수의 유기용제 등에 노출된 것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였거나 적어도 다른 불상의 발병 원인과 겹쳐서 유발 또는 촉진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했다. 원고가 현장 업무를 많이 했다는 점과 함께, 세 가지를 강조했다.

  1. 첫째 원고에게만 마스크가 지급되지 않았다,
  2. 둘째 [작업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로 원고의 업무환경을 평가해선 안된다,
  3. 셋째, 산보연의 ‘노출 점수’ 판단은 신뢰할 수 없다.

특히 두 번째 문제와 관련하여 법원은 이렇게 말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작업환경 측정 보고서는 측정된 구체적 수치의 크기와 그로 인한 질병의 이환 여부보다는 사업장이 유해요인에 노출되어 있는지와 그 노출 유해요인은 무엇이고, 이에 대한 관리는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기준으로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업무상질병에 관한 모든 소송에서 [작업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와 관련하여 줄기차게 주장해 왔던 내용이 이 한 문장에 정갈하게 담겼다.

그리고 또 법원은 ‘노출 기준’의 올바른 뜻이 무엇인지도 밝혔고, 여러 유해물질에 복합노출되었을 때 ‘유해성 상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결론은? “(업무상질병소송에서) 작업환경 측정 결과 노출 기준 이하라는 사정은 크게 고려할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본 업무상질병 사건 판결문 중 [작업환경 측정 결과 보고서]의 한계에 관한 가장 명쾌한 판단을 남겼다. 이 판결이 널리 알려지고 쓰여지길 바란다.

2010년부터 2015년까지(2011년도 상반기 제외) 및 동일고무벨트에 대한 2015년 하반기부터 2018년 상반기까지의 각 작업환경측정결과, 용접 흄 및 분진, 산화철 흄 및 분진, 망간 및 그 무기화합물, 이산화티타늄 등이 모두 화학물질 및 물리적 인가의 노출기준(고용노동부 고시 제2020-48호, 이하 ‘이 사건 노출기준 고시’라고 한다)상의 노출기준 미만으로 확인되었다(갑 제9호증, 을 제3호증). 그러나 아래와 같은 이유로 작업환경측정결과 노출기준 이하라는 사정은 크게 고려할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

(1) 이 사건 노출기준 고시는 산업안전보건법 제106조, 제125조,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 제144조에 따라 인체에 유해한 ‘화학물질 및 물리적 인자'(유해인자)에 대한 작업환경평가와 근로자의 보건상 유해하지 아니한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정해진 것인데(제1조), 위 고시의 ‘노출기준’이란 근로자가 유해인자에 노출되는 경우 노출기준 이하 수준에서는 거의 모든 근로자에게 건강상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아니하는 기준을 말한다(제2조 제1항 제1호).

(2) 한편 유해인가에 대한 감수성은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고, 노출기준 이하의 작업환경에서도 직업병 질병에 이환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노출기준은 직업병 진단에 사용하거나 노출기준 이하의 작업환경이라는 이유만으로 직업성 질병의 이환을 부정하는 근거 또는 반증 자료로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제3조 제3항). 즉 산업안전보건법상 작업환경 측정 보고서는 측정된 구체적 수치의 크기와 그로 인한 질병의 이환 여부보다는 사업장이 유해 요인에 노출되어 있는지와 그 노출 유해 요인은 무엇이고, 이에 대한 관리는 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기준으로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3) 원고가 사용한 시너에 벤젠과 함께 디클로로메탄 또한 함유되어 있어 2개 이상의 화학물질에 혼합적으로 노출되어 유해물질의 상가작용으로 인하여 그 유해성이 더 증가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원고의 경우처럼 벤젠이 함유된 시너에 디클로로메탄 또한 함유되어 있었다면, 이 사건 노출기준 고시 제3조에서도 언급하듯이, 2개 이상의 화학물질에 혼합적으로 노출되는 경우에는 유해물질의 상가작용으로 인해 유해성이 증가할 수 있다.

(4) 이상과 같은 사정을 종합하면, 노출기준 이하의 예시 자료들은 측정이 이루어진 그 당신의 작업환경을 나타낼 뿐이고, 원고가 근무하던 당시의 작업환경이나 정전, 설비 고장, 그 밖의 사고 등 비정상적인 상황에서의 작업환경을 나타낼 수는 없다.

항소심 법원, [작업환경측정결과 및 역학조사결과 관련]한 ‘노출기준 이하의 작업환결측정결과에 관한 판단’ 중에서, 2023.
원고는 방독 마스크도 없이 시너+벤젠+디클로로메탄 혼합 유기용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다.

사업주 ‘새빨간’ 거짓말… 어떻게 해야 할까


끝으로, 공단의 재해조사 과정에서 원고가 “사무직 사원으로 현장 업무를 하지 않았다”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한 사업주.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현행 산재보험법 혹은 산안법에는 이러한 행태를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마땅치 않다. 이런 거짓 진술을 아무리 적극적으로 해석하더라도 ‘산재발생 사실 은폐’에 해당한다고 보긴 어렵다(산안법 제170조 제3호. “1년 이하 징역 또는 1천만 원 이하 벌금”). 최대한 적극 해석하면 ‘산재보상을 위한 재해조사 거부나 방해’에 해당할 수는 있겠다. 설령 그런 해석이 나온다 한들, 고작 “300만 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될 뿐이다(산재보험법 제127조 제3항 제3호).

반면, ‘부정한 방법으로 산재보상을 받은’ 노동자는 ‘산재 은폐’ 사업주보다 더 무겁게 처벌된다(“2년 이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 벌금”. 산재보험법 제127조 제3항 제1호). 말하자면 산재보상을 부정하게 받아낸 노동자가, 그 보상을 부정하게 받지 못하게 한 사업주보다 훨씬 무겁게 처벌받는 셈이다.

아직 갈 길이 멀단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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