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국방부 기자들과 대변인의 설전이 화제다.

SBS 기자가 “자유시 참변에 가담한 게 아니라 사후 정리 과정에 홍범도 장군이 개입했을 수 있다는 의혹이냐”고 묻자 대변인이 “맞다”고 말한다. SBS 기자의 설명은 이렇다. “북한군을 사주해서 6.25 남침을 한 공산당은 스탈린의 공산당이다. 레닌의 공산당과 스탈린의 공산당은 아주 다르다.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차이보다 크다. 그것을 같은 공산당이라고 보면 어떻게 하나. 빨치산 논쟁 역시 마찬가지다. 1920년대 빨치산하고 김일성이나 스탈린은아무 관련이 없다. 김일성이 1912년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1919~1922년 사이에 빨치산 자격으로 전투에 참여했다고 이게 문제가 된다? 빨치산은 ‘partisan’에서 넘어온 말이고 비정규군이란 말이다. 이 당시 독립운동한 사람들 모두 빨치산이다. 김일성 태어나기 전에 활동한 걸 빨치산이라고 하면 얼마나 부끄럽고 천박한가.”

관련해서 시인 박일환님이 기고를 보내왔다. 박일환님은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개입한 정황이 없고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것도 포로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지적한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대립은 2차 대전 이후에 시작됐고 1920년 무렵은 일제에 맞서 진영을 초월해 연대하던 시기였다. “홍범도 장군을 모욕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이야기다.

홍범도 장군 관련해서 자유시 참변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제대로 알고 쓰는 이가 드물다. 흉상 이전을 추진하는 국방부도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고만 할 뿐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독립운동 역사는 초기에 사료 부족으로 정확한 사실보다는 소문에 의거해서 작성되었던 사례가 많다. 박은식의 ‘한국 독립운동 지혈사’ 같은 것들이 심한데, 거기 나온 기술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오류와 과장으로 점철된 기록이 많아 다른 사료들과 비교 검토해 가며 읽어야 한다. 그런 과정들을 생략하다 보니 문재인 정부 시절 3.1절이나 광복절 기념사를 하며 잘못된 수치를 나열하곤 했다. 봉오동과 청산리 싸움이 쾌거인 건 맞지만 일본군 사살 숫자 등은 지나치게 부풀려졌으며, 청산리 싸움을 ‘대첩’으로 표현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자유시 참변 사망자는 36명+알파

현대사와 관련된 사건들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면 최근의 연구 결과물을 살펴봐야 한다. 자유시 참변만 해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은 권위 있는 사전마저 왜곡과 과장이 심하다. 당시 사망자를 272명이라고 기술했으며, 다른 책들에서는 600~700명까지 늘려 놓았고, 심하게는 2000명 설을 유포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36명+알파 정도라는 게 사실에 가깝다. 그러니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독립군 진영이 궤멸했다거나, 일각에서 떠드는 것처럼 김구가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상해 임시정부가 타격을 받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사실과 크게 어긋난다. 홍범도 장군에게 참변의 책임을 묻는 것도 무책임한 모함에 지나지 않는다.

대한의용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했다

봉오동과 청산리 싸움 이후 일제의 대반격과 토벌로 인해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들이 설 자리가 극히 좁아졌고, 그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향한 곳이 연해주 즉 러시아 영토였다. 하지만 혁명 이후 적군과 백군으로 갈라져 내전을 벌이고 있던 러시아 측은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무장을 해제하고 들어오라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그러자 김좌진 등 일부는 다시 만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이때 러시아 측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던 독립군 부대를 통합해서 일원화할 것을 요구했으나, 각 부대 내부에서 의견 조정이 쉽지 않았고, 연해주에 거점을 두고 있던 공산주의 계열의 두 정파, 즉 상해파와 이르쿠츠크 파 사이에 주도권 다툼도 심했다. 그런 와중에 홍범도 부대가 어떻게든 통합을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이르쿠츠크 파 쪽으로 가며 저울추가 기울어졌다. 러시아의 극동공화국 측은 소수파로 남은 부대(대한의용군)에게 계속 부대 통합과 무장해제를 요구했으나 응하지 않고 버텼다.

러시아 적군 측이 조선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한 걸 어떻게 봐야 할까? 사정이야 어쨌든 타국의 무장 세력이 자국 영토 안으로 들어오는 걸 무턱대고 반기기는 힘들지 않았을까? 러시아 측으로서는 독립군을 충분히 믿지 못한 면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에 귀화한 조선인들은 토지를 소유한 부농이 다수였고, 그래서 적군보다는 백군 측에 선 이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혹시라도 조선의 무장 세력이 백군 편에 설까 봐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조선 독립군들을 적군 부대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원인도 있었다. 조선의 무장 독립군들이 보급을 위해 민가를 약탈하면서 살상을 자행했고, 그로 인해 러시아의 농민들이 자신들도 무장해서 저들과 맞서게 해달라고 요구하던 상황이었다. 아무리 독립군이라 해도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 자기 경작지와 마땅한 보급 루트가 없는 상황에서 약탈 외에 뾰족한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참고 삼아 말하자면 김좌진 역시 만주로 돌아가서는 식량 보급과 군자금 마련을 위해 비적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그 지역 농민들에게는 그냥 무장강도 이상의 존재가 아닌 상태였다. 그러다 결국 공산주의 계열의 박상실에게 피습을 받아 죽었는데, 암살의 배경에는 농민을 약탈하는 모습에 대한 응징이라는 측면이 작용했다고 보아야 한다.

홍범도 장군의 러시아 입국 신청서. 방문 목적에 “고려 독립”이라고 썼다.

홍범도 부대가 참전했다는 기록은 없다

결국 극동공화국이 파견한 칼란다리시빌리(Kalandarishvili)가 부대를 끌고 진압에 나섰으며, 여기에 이르쿠츠크 파에 속해 있고 통합파였던 자유대대(고려혁명군)가 합세했다. 하지만 이때 홍범도 부대가 참전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으며, 현대사 전공자인 전북대 윤상원 교수에 따르면 나중에 참변 소식을 들은 홍범도가 솔밭에서 통곡을 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고 한다. 더구나 진압부대가 처음부터 학살을 계획했던 건 아니었으나 사할린 부대 측과 러시아어 소통이 잘 되지 않았던 것도 비극의 한 계기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쨌거나 사망자 수가 수백 단위는 아니었고, 포로가 많았다. 이들 포로에 대한 재판에 홍범도가 재판위원으로 참여한 건 맞고, 그로 인해 지금과 같은 논란이 발생했다. 하지만 홍범도는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고, 재판위원으로 나선 것도 포로들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한 의도였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레닌과의 면담, 독립운동에 대한 치하 성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나 더, 레닌과 면담을 하고 권총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자유시 참변 때 자신들의 편에 섰기 때문이라는 주장 역시 뚜렷한 근거가 없다. 오히려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한 것에 대한 치하의 의미가 더 컸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에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시킨 러시아는 약소국들에게 희망의 등대와도 같은 존재였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2차대전 이후의 소련과 그 뒤 새로 성립한 지금의 러시아에 비추어 혁명 직후 1920년대 초반의 러시아를 등치시키면 안 된다. 2차대전 때도 소련은 미국과 함께 연합군의 일원이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대립은 2차대전 이후에나 시작된 일이므로, 지금의 기준으로 과거에 공산당에 가입했느니 마느니 따지는 건 온당치 않은 일이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역사를 지우면 남는 게 얼마나 되겠는가.

2023년 8월 28일 ‘2023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 참석한 윤석열(대통령).

철 지난 이념 전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대통령의 최근 발언들이 무척 곤혹스럽게 다가온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 이전을 추진하는 게 국방부 단독으로 이루어진 결정은 아닐 거라는 심증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의 아내가 일제로부터 고문을 당해 죽고, 두 아들을 항일전쟁에 바쳤으며, 러시아의 입국 목적을 ‘고려 독립’이라고 친필로 밝혔던 홍범도 장군을 모욕할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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