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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적.

이런 표현 들어본 적 있나. 말해 본 적 있나. 나는 태어나서 ‘실망적’이라는 표현은, 내가 기억하는 한도에서, 단 한번도 써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최근까지는.

나는 해외 축구(‘해축’)를 즐겨 보고, 그러다가 경기 전술 분석이 탁월한 한 해축 유튜브를 알게 됐는데, 그 유튜버가 문제의 “실망적”이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나는 “실망적”이라는 표현, 그 표현을 발음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 깜짝 놀랄 일은 아니지만, ‘으잉? 실망적?? 이게 뭐야???’ 속마음이 저절로 반응했고, 뭔가 가벼운 거부감마저 느꼈던 것 같다. 미묘하게 비누맛 같은 게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허브티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생각해보라. ‘희망적’이라거나 ‘환상적’이라거나 ‘몽환적’이라거나 ‘감동적’이라는 표현은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실망적”이라는 표현은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나만 그런 건 아니지?) 왜 그런 감수성이 생겨났을까. 발음을 쉽게 하기 위한 활음화와 관련이 있을까? 아니면 어떤 문법적 이유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형태의 관점으로 보면 이 사소한 미스터리가 주는 의문은 더 깊어진다. ‘@망적’으로 자주 쓰이는 ‘희망적’, ‘절망적’은 자연스러운데 왜 ‘실망적’만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지는 걸까. 의미의 관점에서 보자. ‘실망’과 유사한 의미의 마을, 그 풍경 속에 있는 ‘절망’은 ‘절망적’이라는 표현은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왜 유독 ‘실망적’은 유독 부자연스러운가.

그러니 내 국어 상식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실망적’만 왜 유독 이상하게 느껴지는 건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왜 ‘실망적’은 ‘실망스러운’으로 고쳐야 할 것 같은 강한 문법적 억압을 만들어내는 걸까.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나처럼 ‘실망적’을 궁금했던 사람이 있었고, 그는 2021년 국립국어원에 이렇게 문의한다:

“실망적이다. 실망적. 옳은 표현인가요?”

국립국어원은 이렇게 답한다:

“안녕하십니까? 견해에 따라 설명하는 방식이 다를 수는 있겠으나, 일반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자연스럽지는 않아 보입니다.고맙습니다.” (국립국어원, 2021. 6. 25.)

나만 갸우뚱하고 있나. 이 글을 읽는 분이 계시다면, 국립국어원의 답변이 뭔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견해에 따라 설명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건 도대체 어떤 견해, 어떤 방식을 말하는 걸까. 그리고 “일반적인 관점”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일반적인 것이라는 걸까. 이렇게 하나마나한 ‘안개 속의 풍경’ 같은 답변, 도무지 구체적인 근거는 1g도 없는 답을 할 거라면, ‘잘 모르겠습니다.’라거나 ‘아직은 잘 모르지만, 좀 더 생각해보고 @월 @일까지 그 결과를 알려드리겠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답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국립국어원의 정답 강박증에 빠진 것 같은, 억지로 억지로 없는 답을 쥐어 짜내는 것 같은 답변은 그야말로 실.망.적.이.다.

로저스 아저씨의 텐트 

국어원의 실망적 답변에 연상해서 떠오른 사람이 한 명 있다. 전기영화 ‘어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 후드’(A Beautiful Day in the Neighborhood, 2019) 속 실존 인물인 ‘로저스 아저씨’(Mister Rogers)다. 어린이를 주 시청자로 삼은 ‘로저스네 동네’(Mister Rogers’ Neighborhood)을 제작하고, 직접 프로그램 진행자로 출연하는 것은 물론이고, 프로그램의 테마 음악과 대사까지 직접 챙겼던 프레드 맥필리 로저스(Fred McFeely Rogers; 1928.3.20.~2003.2.27.).

영화 ‘어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2019, 마리엘 헬러)의 포스터(왼쪽)와 영화의 실제 주인공 프레드 로저스 (오른쪽, 1982년경 54세쯤 모습, 퍼블릭 도메인)

로저스는 미국인에게 ‘친절함’의 대명사였고, 아이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정다운 ‘이웃집 아저씨’였다. 로저스의 이 전설적인 방송은 로저스가 40세인 1968년 방송 송출을 시작해 2001년 8월 31일 종영될 때까지 무려 30년 넘게 31시즌에 걸쳐 912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거대한 ‘로저스네 동네’를 만들어냈다. 로저스는 마지막 방송이 끝나고 2년 뒤, 74세를 일기로 지구에서 천국으로 떠난다(로저스는 방송인 겸 장로교 목사이기도 했다).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이 배우 싫어하는 사람 찾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텐데, 명배우 톰 행크스가 프레드 로저스를 직접 연기한다. 하지만 톰 행크스가 주연한 영화치고는 이 영화 아는 사람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때 그때 바뀌긴 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내 평생에 가장 따뜻하고 감동적인 영화 10편을 뽑으면 넉넉하게 뽑을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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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아주 약한 스포일러

영화 전체 러닝타임 중 약 2분 정도에 해당하는 줄거리가 노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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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에는 아무렇지 않게 쉽게 지나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돌아보면 아주 중요했던 순간이 있다고 누군가 그랬다(장 그르니에, ‘섬’, 1933, 민음사, 서울:1993). 물론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어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에서 그 ‘텐트’ 장면이 나에게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영화 속 로저스 아저씨가 스튜디오에서 텐트를 설치하려고 한다. 아이들에게 ‘내가 텐트 설치하는 방법을 알려줄게’ 에피소드다. 텐츠 설치를 앞둔 로저스의 표정이 자상하지만 다소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한 느낌도 든다. 그.런.데….

A Beautiful Day in the Neighborhood (2019)

이게 웬 걸! 로저스는 텐트 설치에 계속 실패한다.

아이쿠, 이거 텐트 치는 게 쉽지 않구먼! (출처: A Beautiful Day in the Neighborhood, 2019)

프로그램 PD와 스태프가 그 모니터 속 모습을 보며 유쾌하게 웃는다. 그러면서 “저희가 대신 설치해드릴까요?”라고 묻는다. 로저스는 “음, 아니요, 저는 이게 좋은 거 같은데요. 안 그래도 될 것 같아요”라고 답한다. 그러니까 텐트 설치에 계속 실패하는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모습을 방송에 그대로 쓰자고 말한다.

마침 로저스에 관한 기획기사(‘영웅 특집’ 기사)를 쓰기 위해 현장에 와 있던,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기자(로이드 보겔)가 로저스에게 의아해하며 묻는다. “텐트 말입니다. 왜 설치를 거절하셨죠?” 로저스가 답한다:

“어른들도 때론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걸 아이들도 알아야 하니까요.” 

몇 해 전 영화를 보면서도 지금 다시 생각해도, 이 얼마나 어른스러운 모습인가. 이 얼마나 성숙한 태도인가.

국립국어원이 항상 모든 질문에 완벽한 답변을 할 수는 없을 거다. 듣고 있으면 저절로 행복지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행복해지기 위해 조금은 노력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느끼게 하는 노래, 이상은의 ‘비밀의 화원’ 속 가사처럼, “누구나 조금씩은 틀”리고, “완벽한 사람은 없”다.

어려운 일을 나눌 수 있는 축복 

누구나 때때로 실패할 수 밖에 없고, 실수하며, 그래도 된다. 다른 나라 사정은 전혀 모르지만, 우리나라처럼 실패에 관한 공포가 극단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만연해 있고,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정서로 자리한 나라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때때로 실패하는 모습을, 그 모습을 가장 보여주기 싫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들, 연인들, 아이들에게도 그냥 담담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그렇게 때로 실패하는 모습을 서로 때론 담담하게 때론 진지하게 때론 가벼운 마음으로 봐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근에 아주 재밌게 본 미드 [레지던트 에일리언] (‘이웃집 외계인’)에서 여 주인공을 한 살에 입양한 인디언 아버지는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괴로워하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힘든 일을 나눌 수 있는 건 축복이야.”(“It’s a gift to share something hard with someone you love”, S2E11, 37m). 때론 시니컬하고 썰렁하면서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B급 정서 코미디를 좋아한다면 ‘레지던트 에일리언’(웨이브)도 강추다.

‘레지던트 에일리언’ 시즌1, 시즌2 소개 이미지(출처: 웨이브)

각설하고, ‘어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 아직 넷플릭스에 있나 궁금해서 찾아보니 아직 있다(글쓰는 현재 시각 2023년 2월 4일). 그런데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는 마지막 날: 2월 27일”로 표시된다. 쓰다보니 웨이브 드라마, 넷플릭스 기한 임박 영화를 홍보(?)하는 글처럼 흘러갔는데, 자유연상으로 쓰여진 글에 무슨 그런 목적이 있을 리 없다. 웨이브도 마찬가지고.

다만, 모쪼록 넷플릭스 가입하신 분이 있다면, 그런데다가 이 잡문을 끝까지 읽었다면, 그럴 확률이 높지는 않겠지만, ‘어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를 놓치지 마시라! 2월 27일까지만 볼 수 있다! 넷플릭스 말고 웨이브만 가입한 분이라면 ‘레지던트 에일리언’도 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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