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가 이 말을 했다는 걸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감탄하며 웃었다.
“작가는 정말 좋은 직업이다. 글을 쓰지 않는다면.”
글을 쓴다는 것의 어려움과 괴로움,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은 물론 작가라는 정체성은 오로지 글을 쓰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자기 업에 대한 명료한 인식까지. 이 모든 걸 위트 있게 단 한 마디에 담았다. 비단 작가만이 아니라 다른 어떤 직업도 그 일의 핵심과 연결만 짓는다면 모든 문장이 각각의 직업 세계에서 참의 명제가 될 것이다.
영화배우는 정말 좋은 직업이다. 연기를 하지 않는다면. 외과 의사는 정말 좋은 직업이다. 수술을 하지 않는다면. 군인은 정말 좋은 직업이다. 목숨을 걸고 적과 싸우지 않는다면. 당연하게도 이 모두가 역설의 문장이다. 무대에서 노래하지 않는 가수가 좋은 가수일 리 없고, 나라를 지키지 않는 군인이 좋은 군인일 리 없다. 카피라이터는 어떨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카피라이터는 정말 좋은 직업이다. 프레젠테이션을 하지 않는다면.”
수줍음 많은 후배
자질이 훌륭한 카피라이터 후배가 있었다. 다 좋은데 수줍음이 많았다. 묵묵히 카피 쓰고 아이디어 내는 건 참 잘하는데 기획팀과 논쟁적인 회의를 할 때는 늘 침묵했고, 광고주와 만날 일이 생기면 필사의 노력으로 안 가고 싶어 했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잘 못 한다는 이유로 프레젠테이션은 언제나 사양했다.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그에게 말했다.
“이 일은 숨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클라이언트의 과제를 놓고 광고 회사 간 치열한 승부를 벌이는 프레젠테이션만 프레젠테이션이 아니다. 나의 의견이나 주장에 매력을 느끼게 만들고 공감을 이끌어냄으로써 결국 설득에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이런 관점으로 보면, 세상만사가 프레젠테이션 아닌 게 없다.
동료 크리에이터들에게 내 카피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일도 말할 것 없이 프레젠테이션이며, 회식이나 식사 자리 심지어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는 짧은 시간 안에서도 본인의 능력을 어필하거나 팀에 필요한 지원을 받아내도록 회사 임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프레젠테이션이다. 그뿐인가 부모님께 슬쩍 전화해서 사위인 남편을 혹은 아내인 며느리를 자연스럽게 칭찬하도록 하는 것도 프레젠터로서 내 능력을 시험해 볼 기회다.
카피라이터, 커뮤니케이터, 프레젠터
카피라이터는 곧 커뮤니케이터이고, 커뮤니케이터의 승패는 프레젠테이션에서 갈리는바, 좋은 카피라이터는 좋은 프레젠터일 수밖에 없으며 프레젠테이션을 못 하는 좋은 카피라이터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오직 허황한 관념 속에서나 가능하다.
킥오프를 위한 회의실에 모여 있는 모든 사람은 프레젠터의 후보다. 나는 임원이 아니니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아니니까 등의 이유로 스스로를 배제하면 안 된다.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 프로젝트의 최종 결과물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자가 우리 중에서 왜 내가 아니어야 하는가’ 이를테면 이렇게 말이다.
‘영 타깃이 대상인 만큼 우리 중에 가장 젊은 내가 프레젠테이션을 가장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아트웍이 중요한 프로젝트니까 아트 디렉터인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프레젠터의 당위성을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 손흥민을 보라. 골 찬스는 가만히 그라운드에 서 있다고 해서 오는 게 아니다. 나에게 공이 올 거라 믿고 죽어라 달리는 자에게 오는 법이다.
실전 프리젠테이션, 기억할 몇 가지
실전 프레젠테이션에서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몇 가지를 공유해 보겠다.
1. 말의 순서만 달라도 감흥이 달라진다.
-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으며 봉준호는 말했다. “어렸을 때 항상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다. 영화 공부를 할 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고 책에서 읽었다. 그 말은 마틴 스콜세지의 말이었다.” 만약 똑같은 얘기를 “마틴 스콜세지가 책에 이렇게 썼었다”로 시작했다면 그렇게 시상식장을 전율케 할 수 있었을까? 네버!
2. 확신은 말끝에 있다.
- 우리말에 성조나 억양은 없지만 강세를 말끝에 준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용두사미를 경계할 것. 말의 앞 부분은 기세 좋게 시작했다가 말의 끝은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3. 불필요한 말은 말 그대로 불필요하다.
- 말과 말 사이에 “그…”라든지 “어…그니까…”같은 말이다.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충분할 것을 굳이 “해보도록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는 식으로도 말하지 말자. 솔직히 좀 바보 같다. 바보의 제안에 귀 기울여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는가.
4. 스크린을 보지 말고 청중의 눈을 봐라.
-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몰라 스크린을 보는 것보다 더 최악은, 다음 할 말이 뭔지 보려고 스크린을 보는 것이다. 프레젠테이션의 내용은 머릿속에 거의 들어 있어야 한다. 들어있지 않다면 둘 중 하나다. 얘기의 흐름이 엉망이거나, 프레젠터로서의 준비가 소홀했거나.
5. 리허설을 실전처럼 하라.
- 연습이 해가 될 리는 없으며, 프로젝트를 함께 준비했으나 현장에 가지 못하는 동료와 후배들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6. 듣는 입장에서 할 말을 정리해보라.
- 파워포인트 문서를 스크린으로 보면서 프레젠터의 설명을 듣고 있는데 프레젠터가 텍스트를 그대로 줄줄 읽기만 한다면, 듣는 입장에선 무척 지루할 수밖에 없다. “저희 결론은 이 한마디입니다”라고 말하고, 정작 결론은 스크린의 문장을 눈으로 잠시 읽게 하자. 몰입도가 높아지는 좌중의 분위기가 느껴질 것이다.
7. 두 다리로 똑바로 서라.
- 건들건들 움직이는 게 능숙해 보이는 줄 안다면 착각이다.
8. 나는 전달자이고, 전달하려는 내용을 저들은 모른다는 걸 명심하라.
- 내가 얼마나 잘 생겼는지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는 아무도 관심 없다. 프레젠테이션은 모델 오디션도 아니고 스피치 경연대회도 아니다. 우리가 준비한 걸 내가 전달만 하는 거니까, 생각해보면 긴장해서 떨 이유란 게 전혀 없다.
9. 콘텐츠, 시작과 끝
- 위에 열거한 것들 다 소용없다. 프레젠테이션할 내용이 별로라면. 프레젠테이션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첫째도 콘텐츠, 둘째도 콘텐츠, 셋째도 콘텐츠다.
뮤지컬에서 주연 배우의 사고를 대비해서 똑같이 준비하는 배우를 ‘커버’라고 부른다. 『오페라의 유령』 내한 공연 때 브래드 리틀이 딱 한 번 공연에 못 섰는데 앙상블 배우가 커버를 맡았다고 한다. 그날의 관객들에겐 그 커버가 오페라의 유령이다.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있는 모든 스태프는 다 커버다. 자, 다음 프레젠테이션은 누가 할 것인가
그렇다. 바로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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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남의 마음을 흔드는 건 다 카피다’ (이원흥, 좋은습관연구소, 2020)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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