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이 죽었다.
죽음은 많은 말을 불러 말문이 막히게 한다. 가슴이 파도치는 걸 참고 기다렸다. 우리는 곧장 말해버리는데 익숙하니까, 무언가를 유예하는 법을 자꾸 까먹어버리니까, 서둘러 결론을 내기보다 잠시라도 혼란 속에 머무르고 싶었다. 이틀 하고도 삼일이 지났다. 휘몰아치는 말들 중 어떤 건 가라앉고 어떤 건 떠오르길 반복했다.
엄마와 박근혜
이상하게도 박근혜 탄핵에 반응하던 엄마의 얼굴 같은 게 수차례 떠올랐다. 엄마는 박근혜 관련 이슈에 항상 공분했다. 그녀는 전라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러 폭력을 겪으며 살았고, 딸만큼은 다르게 살길 바라 몸을 갈아 좋은 교육을 시켰다.
어찌된 영문인지 엄마를 디디고 맞이한 더 좋은 세상에서 딸이 자주 마주치는 건 박근혜 지지자들이곤 했는데 그들은 으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내 엄마의 지지분한 생 따위는 모를 그들은 선한 얼굴로 박근혜를 옹호했고 딸은 그 모순을 엄마에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박근혜는 탄핵되었다. 탄핵 선고에 뛸 듯 기뻐하던 엄마는 박근혜가 교도소로 이송되는 모습을 보며 크게 슬퍼했다. 원하는 일이 일어났는데도 눈물을 흘렸고, 입 다문 박근혜 지지자보다 상실감을 드러냈다. 티비 앞 하염없이 멍해지는 그녀가 나로선 의아했다.
“엄마, 박근혜가 벌 받길 오래도 바랐잖아?”
엄마는 자신이 분노했던 이유도, 박근혜가 벌 받길 바랐던 이유도, 벌 받는 박근혜를 보며 슬픔을 느끼는 이유도 같다고 했다. 사람은 다친 것을 볼 때 어쩔 수 없이 다친 얼굴이 된다고 했다. 승리한 사람이라기엔 자부심이 보이지 않는 엄마의 얼굴은 어딘가 훼손된 듯 보였다.
요 근래 겪는 일들을 상기하며 나는 어떤 문장보다도 그 얼굴을 곱씹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내가 알고 싶고 말하고 싶은 모든 게 거기 있는 거 같았다. 나는 배운 말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엄마의 얼굴만한 문장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스물 둘, 어떤 처절한 승리
또, 오래전 집주인 할아버지의 형상도 수 번 떠올랐다. 스물 둘에 주먹보다 두꺼운 곰팡이와 썩은 물 누수가 심각했던 집에 살았다. 엉터리 리모델링으로 입주자 전체가 고통 받았다. 집주인 할아버지는 잠적했고, 능력없는 시공자만 사태를 무마하고자 쩔쩔매며 빌라를 오갔다. 옆집 남자는 가만 안둘 거라며 시공자를 윽박지르고 문을 걷어찼다.
굽신대던 시공자는 엄마나 내 앞에선 침을 뱉거나 반말을 일삼았다. 옆집 남자는 집주인과도 고함치며 통화했다. 여자만 사는 가구는 우리집이 유일했고 집주인은 우리집 전화만 유일하게 피했다. 집안에서 옆집 남자에 가장 가까웠던 건 나 하나 뿐이어서, 마침내 몇 달 만에 집주인이 빌라에 나타난 날 나는 4층부터 1층까지 그를 따라가며 옆집 남자처럼 고함쳤다.
“가만 안둘 거야!”
옆집 남자처럼 고함쳤다. 그는 계단을 굴러떨어지 듯 황급히 도망쳐 내려갔다. 그의 흰 뒤통수에 대고 발악하는 나를 골목의 사람들이 힐끗거렸다. 세 모녀는 그 일이 있고서야 다른 집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다.
나는 그때 서늘하고 지저분한 빌라의 계단에 서서 축축한 난간을 붙잡고 헐떡였다. 이겼어, 해냈어.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이십 대 초반의 나는 승리가 그런 식으로 서럽거나 불쾌할 수 있을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연민과 분노, 정당함과 초라함, 성취감과 수치심 따위가 섞였다.
내게서 도망치던 그는 돈이 많고 가부장적이고 문제를 회피하고 우리 집에 커다란 피해를 입혔는데도 불구하고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였다. 그는 다리를 절면서 뛰었고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주름지고 마른 입술로 가쁘게 숨을 쉬었다. 집주인 할아버지는 내 인생 최초로 나로 인해 겁먹은 남자였다. 마치 피해자는 그 같았고, 그후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가해자를 해쳤다는 감각과 함께 살게 되었다.
미투, 훼손된 얼굴과 유해한 존재를 감수한다는 것
소환되는 이런 장면들이란 묵직해 일상 내내 자국을 남겼다. 내 마음에 탄력이 없는 건지 무게가 무거운건지 분간되지 않았다. 가라앉지 않고 남아있는 글자를 주워보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그냥 당시 내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그 얼굴은 피해자의 얼굴 어느 한 귀퉁이와 닮아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녀가 그간 명확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는 걸 나 조금은 이해하고 있다고, 그녀 가까이 있어줄 수 있을까.
당장 명확하게 느껴지는 건 하나 뿐이다. 원하지 않는 부당한 일에 휘말리거나, 체념과 지속이 같은 말인걸 깨닫거나, 죄책감이 태반인 승리를 힘없이 움켜쥐거나, 그도 아니라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막막해지거나 하는 일이, 그니까 내 의지와 무관하게 삶의 파편 혹은 파손된 삶이 주어지는 일이, 여성인 내가 한 명의 사람으로 존재하려 할 때마다 벌어진다는 것.
누군가 나를 해할 때 나 역시 상대를 무슨 식으로든 다치게 해야만 이전 삶의 부분이라도 돌려받았다. 사람들은 피해자만큼이나 가해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온전한 무해함을 믿고, 빠르게 선택하고 정리하고 생각을 도출해 유해함 바깥으로 간다.
그러나 이상한 말 같지만, 피해자조차 대상을 해치는 데서 자유롭지 않다. 무해하고 싶어하는 현대인 누구도 그런 감각을 피하라고 배운다. 그런 감각은 삶을 훼손하니까. 내게 미투 운동의 의미는 거기 있다. 때론 정당한 그 감각을 더는 피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는 여성들에게서, 훼손된 얼굴과 유해한 존재로도 기어이 살아가기를 선택한 여성들에게서, 그것이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한 측면임을 인정하는 여성들에게서 나는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배웠는데.
책임 없는 죽음 그리고 무해함에 관하여
박원순은 죽었다. 무해하고 싶어서 죽었다. 살아있는 누군가의 파손된 삶에 어떤 책임도 없이 죽었다. 죽음은 착잡하고 슬프지만, 여기 애도의 책임이 있을까. 다른 책임을 소거한 그가 그 책임만큼은 과연 남겨두었을까.
연인은 몹시 화가 나서는 박원순이 다 알고 그런 일을 해왔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가 이 사안에 그렇게 화내는 사람임에 감사해하며 그 말에 반박했다.
“아니야, 박원순은 정말로 몰랐을 거야.”
나는 그 점이 요 며칠 내가 느낀 가장 큰 절망이라고 말했다. 안희정이고 박원순이고 화환을 보내는 이들이고 전부 제 행동이 여성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 지 사고해본 적조차 없었을 거라고도 했다. 그러니까 그들 모두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무해함을, 인간의 무해함을 믿었을 거라고 했다. 심지어 자신의 유해함을 돌아보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런 걸 아는 건 항상 왜 여자들 뿐일까. 엊그저껜 대법관 후보들의 판결을 정리하며 또다시 절망했다.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어, 욕을 하는 내 앞에서 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이나 결론보다 결국 물음이 남는 주말이었다. 이를테면, 이제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삶을 줄 수 있을까. 삶은 왜 그럴까. 정당함조차 왜 인간의 어딘가를 영구히 훼손시킬까. 사람은 왜 다친 걸 보기만 해도 저 자신이 다칠까. 자기 자신을 다치게 하면서도 왜 자신을 망가뜨린 사람의 다친 얼굴을 보고 상처받을까. 자기 자신이 다쳤음에도 왜 자신을 다치게 한 상대가 다칠까 봐 망설일까.
모두가 이토록 자신이 무해한 사람이길 바라는 걸 나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개인의 기본 값이란 타인을 상처 주는 데 있다고 가정해야 맞는 게 아닐까. 타인을 훼손하는 것이 그토록 두렵다면, 가장 먼저 다름 아닌 자신의 무해함부터 의심해야하는 게 아닐까. 횡설수설해보지만, 모르겠다. 그저 나는 피해자를 도울 일을 찾을 뿐이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