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안팎에서 터져 나오는 비판과 철회 압력에 결국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안철수 두 공동대표가 8일 기존 입장에서 후퇴했다. 당 ‘전당원투표 및 국민여론조사 관리위원회’가 9일 여론조사와 전당원투표를 실시해 기초선거 정당공천폐지 여부를 50%대 50%으로 반영하는 방식으로 합산한다. 조사 결과는 10일 발표할 예정이다. 안철수는 기자회견장에서 “국민과 당원이 선거 유불리를 떠나 약속을 지키는 정치에 대해 흔쾌히 지지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회견 전에 열린 의원총회에서도 “정치생명을 걸고 이번 문제를 돌파하겠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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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공천이 지방자치를 위해 좋다고 생각했지만…
논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먼저 몇 가지 정리해야 할 게 있다.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나 안철수가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무공천을 공약으로 제시할 때만 해도 나 역시 무공천이 지방자치를 위해 더 좋은 제도라고 생각했다. 공천이란 보수 양당이 풀뿌리까지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인식도 자리 잡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상식처럼 여기듯이, 그저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게 깨지기 시작한 건 대선 즈음한 시점에 지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당공천폐지는 풀뿌리민주주의에도 반하고 정치발전에도 역행한다는 강력한 반론을 진보정당에서 고군분투하는 당직한테 들으면서부터다.
다행히도 당시 나는 서울시와 6개 구청 담당 기자였다. 구청장과 구의원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틈날 때마다 정당공천에 대해 물어봤다. 대다수는 정당공천제에 부정적이었다. 거의 항상 등장하는 폐해는 바로 ‘공천권을 쥔 지역구 의원이 일삼는 전횡’이었다. 의원 사무실 뒤치다꺼리부터 선거운동원 노릇, 심지어 상납 얘기까지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 표현했듯이 “지주와 소작인” 관계였다. 아울러 ‘소속 정당에 따라 극한 대립을 일삼다 보니 구의회가 파행을 겪는다’는 의견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기초의회 비례대표제도의 성과들
물론 다른 의견도 있었다. 여성 구의원들은 대체로 정당공천을 지지했다. 풀뿌리 정치가 발전하려면 여성 등 사회적 약자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기초의회에 진출해야 한다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91년 첫 지방선거 이후 여성 당선자는 전국을 통틀어 40명(0.9%)뿐이었다. 1995년에는 72명(1.6%), 1998년에는 56명(1.6%), 2002년에는 77명(2.2%)에 그쳤다. 그런데 2006년 지방선거에선 여성 기초의원 당선자가 434명(15.1%)으로 늘었다. 2010년에는 600명을 넘어서면서 21.6%까지 치솟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2006년부터 도입된 지방의회 비례대표 제도가 있기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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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대표제도란 말 그대로 100% 정당공천이다. 각 정당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노선, 지향점에 따라 비례대표 후보들을 내세우고 지지를 호소한다. 유권자들은 지지하는 정당과 노선 등에 따라 정당에 투표하고 지지율만큼 ‘정당공천’을 받은 후보들이 국회의원 혹은 기초의원이 된다. 북유럽이나 독일처럼 정당명부 비례대표를 중시하는 선거제도를 가진 나라는 여성의원 비중이 높고, 그렇지 않은 미국이나 영국에서 여성의원 비중이 낮다는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현재 여성 구의원들은 거의 비례대표로 구의회에 진출했다. 그러므로 정당공천폐지는 여성의원 증가라는 개혁 의제와 충돌한다. (다만, 새정치연합은 기초의회 비례대표의 경우 일부 지역에 한해 공천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
문제는 정당공천이 아닌 지역구의원 공천
지역구 의원 전횡도 모든 곳에서 공통된 얘기는 아니다. 지역구 의원이 누구냐에 따라 의원과 구의원의 관계는 천지차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생전에 김근태 의원은 도봉구에서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는데 그를 따랐던 한 도봉구 구의원에 따르면 김근태는 오히려 기초선거 출마자들에게 어떻게든 지원을 해주려고 노력했고 많은 지원을 못해주는 걸 미안해 했다고 한다. 결국 현실에서 문제는 정당공천이 아니라 ‘지역구의원 공천’인 셈이다. 그건 정당공천을 강화하고 지역구 의원이 전횡을 일삼지 못하도록 ‘규제’를 가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정당공천이라는 게 그렇게 오래된 제도도 아니다. 1991년 첫 지방선거부터 2002년 지방선거까지는 기초의원 정당공천이 아예 없었다. 지방선거에서 정당공천을 한 건 두 번밖에 안 된다. 햇수만 따지면 정당공천을 한 것보다 정당공천을 하지 않은 기간이 더 길었다. 정당공천폐지를 주장하는 분들은 정당공천 없던 기초의회가 지금보다 더 좋았던 옛 시절이라고 볼 근거가 하나라도 있는지 답해야 한다. 정당공천 없는 구의회와 정당공천 있는 구의회를 모두 경험한 현직 구의원에게 물어보니 “정당공천이 생기고 나서 더 좋아졌다”고 답했다.
무늬만 무소속, 빨간 무소속과 파란 무소속
그 구의원이 얘기해준 요지는 이렇다. 정당공천이 없을 때는 모든 구의원이 무소속이다. 하지만 빨간 넥타이 매고 다니는 무소속과 파란 넥타이 혹은 노란 넥타이 매고 다니는, 무늬만 무소속이다. 앞서 여성 구의원 얘기도 했지만, 실제 지역 기득권층이 구의회를 완전히 장악하는 곳에서 생활정치는 다만 ‘지역 토호들 생활을 보살피는 정치’일 뿐이다. 선거는 혼탁해지고 지역 대표성은 오히려 떨어진다. 정당 소속이라는 건 어쨌든 일탈을 제어하고 의원 간 경쟁을 유도하는 측면도 존재한다. 오히려 일당독재를 막기 위해서라도 정당 색깔을 분명히 유권자들에게 알리는 게 더 좋다.
@hubris2015 "무공천 약속을 지켰습니다"라고 해놓고 안철수와 같이 찍은 사진을 크게 걸어두는 무공천도 아니고 공천도 아닌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공천으로 뭘 해결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요. pic.twitter.com/jWevdkmG8g
— 팝콘 (@popinpot) April 8, 2014
미래지향적인 논쟁, 더 많아져야 한다
의회가 맨날 싸운다며 비판하는 분들이 있다. 내 생각은 정 반대다. 오히려 더 많이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영국이나 미국 역사를 보면 과거에는 의사당에서 의원끼리 주먹싸움, 심지어 칼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21세기에 직접적인 폭력은 불법이다. 그러므로 의원들은 말로 싸운다. 그게 정치다. 무상급식은 치열한 담론투쟁과 격렬한 논쟁을 거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만약 아무런 고민도 없이 무상급식을 시행했다면 언제라도 없어지는 취약한 제도가 됐을 것이다. 비판받아야 할 자들은 오히려 자기들은 깨끗한 척, 선량한 피해자인척하며 자기 책임은 성찰하지 않는 언론과 국민들이다.
그런 맥락에서 1년 넘게 논쟁 중인 기초연금은 더 많은 논쟁을 하지 않는 걸 아쉬워해야 한다. 무인기 발견에 따른 방공체계 문제나 국정원·검찰 증거조작 사건, 국정원 선거개입, 늘어나는 자살률과 줄어드는 출산율, 핵발전소 안정성 문제 등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수많은 현안이 있는데도 국회와 지방의회, 언론에서 제대로 된 토론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더 많이 논쟁하고 더 많이 싸워야 한다. 그래야 더 좋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물론 그 논쟁이 미래지향적인 방향이어야 한다는 분명한 전제가 있어야 한다.
정당공천 폐지는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정당공천 폐지는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정당공천을 폐지하는 게 정치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데 정당공천 폐지를 새정치로 내세운 것부터가 비생산적인 논쟁을 촉발시켰다. 내 눈에는 차라리 ‘의원 공천’ 같은 걸 억제하면서 정당 차원에서 공정한 공천제도를 가다듬어서 제대로 된 후보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게 새정치에 가까워 보인다. 잠재적인 후보군을 조직해서 중앙당 차원에서 교육하고 훈련해 기초의원부터 경력을 쌓게 하고 장차 국회에 진출시켜 차세대 지도자들로 육성시키는 유럽 사회민주당 방식을 우리라고 못할 게 없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도 없고 경제성장도 없다. 정당공천 폐지는 정치를 부정하는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정당공천 폐지는 정치를 위한 초석인 정당제도를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 결과는 지역 토호 강화로 귀결될 것이다. 아까운 시간을 많이 허비하긴 했지만 2006년 지방선거 같은 결과를 원치 않는다면 새정치민주연합이 이제라도 정당공천 폐지 입장을 백지화하고 복지와 경제민주화 같은 대안을 제시하는 정책으로 승부를 겨루길 기대할 뿐이다. 국민들에게 더 이롭고 정치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은 정당공천 폐지가 아니라 ‘정당공천 강화’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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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인권연대에 기고한 글입니다. 표제와 본문은 슬로우뉴스 편집원칙에 따라 수정, 보충했습니다. (편집자)
잘읽었습니다. 의원공천이 문제의 핵심으로 보여지네요.
이런 기사보면 슬로우 뉴스는 참 개인 블로그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공천이슈의 핵심은 안철수의 새정치연합이 안되는거 알면서 왜 들이댔는가를 생각해봐야하는 데 있습니다.
글 첫머리에 언급하신 것을 보면 ” 당 안팎에서 터져 나오는 비판과 철회 압력에 결국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안철수 두 공동대표가 8일 기존 입장에서 후퇴했다.” 하셨는데 전혀 잘못 짚으셨지여. 새정치연합은 박근혜와의 회동을 통해 공약에 대해 두 정당의 입장을 확실히 하고 짚고 넘어가려 했으나 박근혜가 대화거부하는 바람에 새정치연합의 모양새가 빠진걸로 비췄지만 실상은 박근혜의 허물을 새정치연합이 뒤집어쓰게 된거지여.
안철수가 기자회견장에서 “국민과 당원이 선거 유불리를 떠나 약속을 지키는 정치에 대해 흔쾌히 지지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말한 뜻이 바로 그걸 증명합니다. 다시 말해 무공천이 무리수인줄 알면서도 시도한 것은 약속을 지키는 정치를 한다는 것을 부각시키려고 한거지 공천자체에 대한 문제를 잘못알고 있던게 아닙니다.
어느 정치인이 말했듯이 위화도까지 가서 회군해야 명분과 실리를 챙겨 병사들이 따르게 되는것이지 가지도 않고 회군하면 아무것도 못챙긴다는 말이 이번 이슈의 모든것을 대변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안철수도 “정치생명을 걸고 이번 문제를 돌파하겠다”고 강조한 것은 그냥 무너지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준겁니다.
지난 대선때 무공천공약이 나온 배경도 좀 세세히 짚어주시고, 안철수의 무공천제 폐지 입장에 대해 좀 더 큰 판의 시각에서 짚어주셨으면 좋은 기사가 될 뻔했는데 아쉽습니다.
안철수의 무공천 주장은 정말 전략적으로도 후지고 개념적으로도 헛다리인 것 같습니다.
안철수연구소 시절 노조 관련 에피소드만큼 황당합니다. 없애야 할 건 공천이 아니라 공천을 잘못 이용하는 사람들이죠.
빨리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고 결국 투표까지 붙이는 동안 야당이 의견을 내세워야 할 굵직한 사안들 – 국정원 사건 등을 완전 흐트러놓았습니다.
뭐하는 짓인지… 저걸 새정치로 프레이밍 하다니… 정말 민주당이 끌려다니는 것도 보면 바보 인증이고 안철수의 후진 정치 감각도 무능 인증이죠.
기사에도 있듯 각종 건물에 붙은 안철수와 함께 찍은 사진들 볼 때마다 이게 무슨 삽질인가 싶었습니다.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걸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새누리당이 먼저 치고 나갔고,
민주당이 기다렸다는듯 화답했고,
안철수로선 친노와 차별화 하기 위해 끝까지 버티는 모양새를 취한 거.
새누리당이 약속을 먼저 깼다는 이유로 책임을 전부 새누리당에게 뒤집어 씌우려 하는 거 보면 어이가 없네요. 박근혜의 허물을 안철수가 뒤집어 쓰는 거라는 대목에선 정말 뿜을 뻔.
우리나라에선 토론이 쉽지 않죠. 내 편이면 무조건 옹호 내지 쉴드. 뭐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이유가 있는 거겠죠. 분열과 반목에 관한 한 내공이 장난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