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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드라마 [더 닉] (The Knick, 2014)[footnote]’닉'(knick)은 니커보커(Knickerbocker)의 줄임말이고. 복수형인 ‘닉스'(knicks)는 니커보커스(Knickerbocker)의 줄임말이다. 이는 뉴욕에 정착한 네덜란드 출신 이민자를 뜻한다. 미국의 유명 프로농구팀 뉴욕 닉스의 ‘닉스’가 바로 이 뜻이다.[/footnote]의 제일 인상적인 포스터는 의사들이 모두 손을 하늘 위로 치켜든 모습이다. 이 자세가 괜히 나오지 않았다. 깨끗이 씻은 후, 아무것도 안 만지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손을 올린 것이다.[footnote]물론 이 드라마가 그리는 20세기 초의 미국 외과 의사들은 수술 시에 수술 장갑을 끼고 했었다고 한다. 고증에 안 맞는 셈이지만, 극적 효과를 위해 일부러 씻은 맨손을 보였다.[/footnote]

그런데 의사들은 언제부터 손을 씻었을까?

 

더 닉(The Knick, 2014)
더 닉(The Knick, 2014)

‘죽음의 집’으로 불린 산부인과 병동 

지금은 상식이지만, 당시로선 놀랍게도 ‘손 씻기’를 처음 주장했던 인물이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헝가리인 의사 이그나스 젬멜바이스(Ignaz Philipp Semmelweis, 1818-1865)다[footnote]그는 독일어 이름 ‘이그나스 젬멜바이스’로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그는 독일어를 완벽히 익히지는 못 했다고 한다. 게다가 빈 종합병원에서 쫓겨난 이유 중 하나가, 그가 ‘헝가리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헝가리어로 그 이름을 발음하면 ‘솀멜베이시’ 정도로 표기할 수 있겠다.[/footnote].  원래 빈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갑자기 전공을 의학으로 바꿨는데, 사실 이런 경우는 그때나 지금이나 상당히 드물다. 의학을 공부했다가 법학으로 바꾸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말이다.

이그나스 젬멜바이스 (Ignaz_Semmelweis, 1860년경 모습, 퍼블릭 도메인)
손 씻기의 탄생, 이그나스 젬멜바이스 (Ignaz Semmelweis, 1860년경 모습, 퍼블릭 도메인)

핵심은 그가 빈 종합병원(Allgemeines Krankenhaus der Stadt Wien)의 산부인과 병동에서 일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는 기묘한 광경을 목격한다. 당시 빈 종합병원(이거 지금 19세기 중반 이야기입니다)의 산부인과 병동은 1동과 2동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동은 의대생 훈련을 위한 곳이었고, 2동은 산파 훈련을 위한 곳이었다.

19세기 중반 당시는 아직 세균의 존재가 알려지기 전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이 아픈 이유가, 주변 공기의 독기에 있다고 여겼었기 때문에, 창문을 열고 문에 구멍을 뚫는 식으로 대처했었다. 당연히 산부인과 병동의 사망률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젬멜바이스가 관찰해보니 1동 임산부 사망율이 2동보다 훨씬 더 높았다.  1동의 사망률은 2동 사망율의 두 배가 넘어가는 수준이었고, 1846년의 경우는 무려 세 배가 넘었다.

빈 종합병원에서만 그때 매년 700여 명의 임산부가 사망해서 산부인과 병동의 별명이 ‘죽음의 집’일 정도였다. 그러나 벽에 구멍 뚫는 정도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난망했고, 이전에 수술했던 환자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수술대가 놓여 있는 수술실은 그 자체로 더러웠으며, 산부들의 침대도 곤충들이 많고 체액 때문에 끈적거렸다.

[AndreasS], catching the last light, CC BY https://flic.kr/p/bw4xHa
[AndreasS], catching the last light, CC BY
혹시 1동의 의대생 훈련에 있어서 시체 해부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이전까지 의대생들은 마네킹으로 실습했었지만, 당시는 시체를 해부하는 것으로 실습하던 시기였다. 산욕열에 걸리는 산부들은 대체로 1동에서 시체 해부하던 의대생들이 그대로 환자를 다루기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닐까? 심지어 병원 오다가 거리에서 출산하는 임산부들의 사망률도 1동보다 낮았었다.

그러나 위대한 발견에는 희생이 필요한 법, 1847년 동료 의대 교수가 해부 실습을 가르치다가 우연찮게 해부하던 학생의 칼로 찔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 교수가 산욕열로 죽은 산부들과 동일한 증세로 사망했었다. 해부하는 칼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비극적인 죽음… 사후 ‘어머니의 구세주’ 

그때 의학계는 모든 환자에게는 각자의 병이 있을 따름이어서 환자 개개인마다 치료법이 다 다르다는 인식이 있었다. 모두 손이나 씻으면 된다는 식의 해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었다. 게다가 당대나 지금이나 의사들은 최고 엘리트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집단인지라, 손이나 씻으라는 제안에 대해 거부감이 컸다고 한다. 한마디로 당시 의사들은 안 씻으려 했었다.

젬멜바이스의 제자들은 스승의 제안이 배척받는 광경을 참을 수 없었다. 유럽 각국에 서한을 보내고, 그의 발견에 관해 알리기에 나선다. 문제는 그가 직접 논문을 쓰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동료나 제자들이 알리는 바람에, 유럽 각국의 의료계는 혼동스러워했다.

이유가 있었다. 그의 지위가 불안정했었다. 그의 계약기간이 끝났고, 연장이 안 된 것이다. 그는 빈 종합병원을 떠나 헝가리로 옮겨야 했고, 이때부터 그의 수난이 시작된다. 정신적으로 버틸 수 없었다. 그는 공개서한을 통해 자기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의사들을 ‘살인마’로 규탄했고,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며, 일종의 치매 증상도 보였다.

그의 부인과 동료들은, 그를 새로 지은 병원에 가보자고 ‘꼬셔서’, 그대로 빈 정신병원에 수감시켜버렸다. 정신병 담당의가 아닌 세 명의 의사가 그가 정신병 상황임을 진단내리고, 구속복을 입혔으며, 정신병원의 직원들이 그를 어두운 병실로 데려가서 매우 때렸다. 이때의 후유증으로 2주 후 젬멜바이스는 사망한다.

젬멜바이스의 방법은 그가 사망한 직후,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가 세균을 발견하고, 영국의 조셉 리스터가 손 씻기를 포함한 수술 전 세균 절차를 마련하면서, 그때서야 과학적인 방식으로 인정을 받는다. 그도 이제 ‘어머니들의 구세주’라는 호칭을 받으며 부다페스트 병원 앞에 동상도 세워졌다. 현재의 코로나19 사태에서 구글이 그를 기념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의학적인 개념으로서 손씻기를 '정립'한 이그나츠를 기념한 구글 두들(구글의 로고)
이그나스 젬벨바이스를 기념한 2020년 3월 20일 구글 두들(구글의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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