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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경고 등: 

이 글은 영화 『기생충』에 관한 스포일러를 ‘아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비평(해석)입니다. 불가침의 진실을 주장하거나 과학적인 사실을 입증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다양한 해석과 기고(editor@slownews.kr)를 환영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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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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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은 하층민을 비하하는 텍스트인가.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그런 의도를 연출을 통해 드러내고 있는가. 이 글은 이 질문에 관한 답이다.

 

S#.1  ‘빈곤층다움’, ‘실업자다움’에 대한 편견

  • 아빠 기택: (아마도 엄마 충숙과 함께) ‘대만 카스테라’를 비롯한 여러 자영업을 해봤지만, 흔히 그렇듯 잘 안되었다. 피자 상자를 접는 솜씨는 형편없지만, 탁월한 ‘코너링’ 솜씨로 ‘그 이선균’의 칭찬을 받을 만큼 운전 일에 소질 또는 경력이 있다. ‘발레파킹’(대리주차)처럼 지속하기 어려운, 소위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 엄마 충숙: 투포환 선수 시절 메달도 땄을 만큼 자기 일에 열심이고 인정도 받았던 사람이다. 피자 상자를 접는 등의 ‘부업’ 같은 일을 챙기는 살림꾼이다.
  • 아들 기우: 수능을 네 번이나 본 기우는 ‘SKY’를 노릴 만한 높은 점수로 암시된다. 목표 대학을 수정하지 않는 융통성 부족을 답답하게 볼 수는 있겠지만, 공부를 소홀히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가세가 기울어진 집안의 성적 좋은 입시생으로서 ‘대학 간판’에 집착하는 건 어리석으면서도 합리적이기에, 택하기 쉬운 ‘계획’이다.
  • 딸 기정: 대학은 가지 않았지만, 그래픽 편집 프로그램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만큼 ‘자기계발’을 열심히 한 20대 초반 청년이다. 하지만 IT 디자인 업계에서, 더구나 고졸이,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열정페이’ 단기직을 전전하기 십상이다. 기정은 비록 자기가 잘 하는 분야에 취직하지는 못했지만 하객 알바도 뛰고 단돈 만원이라도 더 받기 위해 부케를 받는, 쉽지만은 않은 일까지 소화한다. PC방의 금연 규칙을 무시하는 민폐를 뭐라 할 수는 있겠지만, 열심히 살지 않는 청년이라고 낙인 찍기는 어렵다.

기생충

영화가 시작하면, 네 명이 모두 백수인 가난한 기택네가 등장한다. 다들 건강한데도 집에 있다.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초장부터 갈리는 지점이다. 기택네 가족은 그냥 봐서는 실직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불충분한 듯 묘사된다. 이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영화 『기생충』이 그 제목부터 시작해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것 아니냐며 우려하고 비판했다.

실제로도, 가족 네 명이 전부 백수인 상황부터 말이 안되며 한심하다고 혀를 차는 이들이 적지 않고, “피자 상자도 제대로 못 접는 주제에 바라는 게 많다”고 힐난하는 포털 댓글이 높은 호응을 받기도 했다.

기생충
기생충 (2019, 봉준호)

하지만 이런 걱정이나 비난은, 일단, 부주의한 관람에서 나온 착각이다. 기택네가 찌질하고 한심스러운 백수로 여겨질 법한 대목은, 자세히 묘사되긴 하지만, 그들 가족의 일생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영화의 설정과 대사들은, 축약하여 지나가지만, 기택네 가족이 생애 내내 열심히 살았음을 보여준다.

『기생충』의 한가롭고(?) 능청스러운 ‘전원 백수’ 가족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자연스레 나올 수 있는 비평이기도 했지만, 모종의 편견을 드러내는 징후이기도 했다.

‘가난한 실업자는 어떤 일이든 가리지 말고 필사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게으르고 나태한 것이다.’

선입견의 안경을 쓴 이들에게 기택네 가족이 지난 시간 열심히 노력해 왔다는 사실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적정 일자리가 부족한 한국에서 살다 보면, 자영업 풍파에 휩쓸리면, 고졸에게 배타적이고, 대학 간판이 중요한 사회에서 부대끼다 보면, 사지 멀쩡한 네 가족이 동시에 백수일 수 있다는 생각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단지 그들의 눈에 비친 것은 ‘가난한 주제에 절박함이 없다’는 심히 못마땅한 광경이었다.

결연한 의지, 죽도록 노력함, 필사적인 발버둥.

우리는 이런 자세를 갖추지 못하면 죄의식을 느끼는 시간을 살아왔다. 이런 죄의식은 각고의 노력으로 큰 성공을 거둔 이들에게 찬사로 나타나기도 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손가락질로 나타나기도 한다. 전자의 박수갈채를 그만둘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후자의 비난은 이제 좀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자초지종을 살피지도 않고 반사적으로 날리는 빈자를 향한 냉소는 언제든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사회적으로도 건설적인 논의를 방해한다. 기택네 가족만큼이나 열심히 살았다면, 밑으로 떨어지지 않아야 올바른 사회다. 모든 것을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지만, 구조적 문제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S#.2 『기생충』의 리얼리즘이 야기한 불만과 비판

가난한 백수에 대한 편견은 가난한 가족에 대한 편견과도 맞닿아 있다. 적잖은 사람들이 기택네처럼 가난한 가정 식구들이 사이가 좋음에 의아함을 느꼈다. 저런 화목함은 개연성, 리얼리즘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다. 봉준호 감독조차도 “요즘 가족답지 않게 뭉쳐 다닌다”고 부연했을 정도다.

불화가 심한 하위층 가정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다. 가난한 가족이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 모습이 그렇게나 현실성 없는 설정인지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설령 희소한 사례일지라도, 분명 그런 가족도 존재한다. 적어도 나는 『기생충』이 꽤나 리얼하게 가난하지만, 사이 좋은 가족을 묘사했다고 보았다.

참 꺼내기 싫은 이야기지만, 기택네 못지않게 가난했던 적이 있다. 일 년에 몇 차례 일가족이 모두 모였을 때, 다들 신용불량에 암담한 형편이었지만, 나름 며칠 동안 웃음꽃을 피웠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냈다. 현재는 개인적인 이유로 나만 사이가 별로인데, 아무튼 그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경제적 사정 등을 생각하면 곡을 해도 모자란데, 신기할 만큼 화기애애하다. 농담들이 센스가 있고 예민한 부분은 의식적으로 잘 피한다. 서러운 순간이나 충돌이 일 때도 있지만 이내 잦아든다. 형편만 더 좋았다면, 더 자주 보고 더 즐겁고 더 서로를 챙겨주었을 사람들이다.’

내 아내의 가족도 비슷하다. 굉장히 갑갑한 사정이고 가족 특유의 불화도 겪지만, 기택네만큼은 아니어도 잘 지낸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그에 맞춰 화목함을 찾고, 슬퍼하고, 또 서로를 챙긴다.

가난하면 식구들끼리 화목하면 안 된다?
가난하면 식구끼리 화목하면 안 된다? 가난해도 화목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아내와 나는 기택네의 화목함에서 알지 못할 편안함을 똑같이 느꼈는데, 얘기를 나눠보니 리얼리즘을 구현했기 때문이었다. 각자 겪어온 ‘가난의 화목함’이 기택네를 통해 재현됐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 그 너저분한 욕실 변기 옆에서 와이파이를 훔쳐쓸 만큼 궁핍한 기택네 가족은 땅이 꺼지는 한숨 대신 묘한 천연덕스러움을 보여준다. 얼핏 보면 가난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사를 치는 그들의 연기를 보노라면, 절로 내 가족의 ‘현실 속 연기’를 떠올리게 된다.

나와 내 아내 가족의 ‘가난한 화목’에는 그 밑바닥에 ‘연기’가 깔려 있다. 피차 난감한 처지임을 잘 알고 있는데, 이런 사정은 의식적으로 무시하는 ‘연기’다. 고통을 잊고 쾌락을 찾으려는 본능에 따른, ‘실시간 망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할 뿐이지 정말로 가난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기택네 가족은 사무칠 만큼 궁핍하지만 겉보기에 사이가 좋다. 이것은 이들 가족이 빈궁한 백수 신세이면서도 겉으로는 마치 별일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일관성이 있는 설정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현실과 똑같은) ‘연기’이고 ‘겉보기’이지 속사정마저 그런 것은 아니다.

짐짓 태평해 보이는 이 가난한 백수 가족한테는, 한국 사람들이 고정관념으로 기대하는 ‘빈곤층다움’이나 ‘실업자다움’이 부족했다. 가족 사이에서도 백수로서의 자세에서도 그러했다. 많은 관객이 그런 캐릭터 설정에 불만을 갖거나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는 현실 속 가난한 이들이 서럽지 않은 척, 힘겹지 않은 척 매일같이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거나 혹은 잊어버렸기에,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S#.3 맥거핀에 이른 ‘냄새’

[toggle style=”closed” title=”맥거핀? “]

맥거핀(MagGuffin) 혹은 맥거핀 효과(MagGuffin effect)는 스릴러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이 고안한 연출 기법이다. 평론가 정성일은 히치콕이 직접 설명하는 맥거핀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라디오 방송 ‘정은임의 영화음악’에서 들려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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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안에 있는 한 승객이 특별해 보이는 상자를 들고 있다. 다른 승객이 그 상자 속에 있는 물건이 궁금해져서 그 상자를 든 승객에게 묻는다.

“저, 실례지만, 상자 속에 있는 게 뭔가요? 아주 특별해 보이는데 말이죠.” 

“아, 네. 상자 속에는 맥거핀이 들어있습니다.” 

“맥거핀이요? 그게 뭔데요?” 

“아, 맥거핀은 스코틀랜드에 사는 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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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서 핵심은 스코틀랜드에는 그런 새(맥거핀)가 없다는 점이다. 사실 세상 어느 곳에도 ‘맥거핀’이라는 새는 없다. 이 예시에서 중요한 점은 상자(=맥거핀)는 사실 존재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실제로는 사건을 진행하고, 극적인 긴장을 유지하는 데 아주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해준다는 점이다. 그 효과를 맥거핀 효과라고 한다.

맥거핀은 대개 사물이나 생물이지만, 어떤 관념이나 상황일 수도 있다. 맥거핀은 관객에게 극적인 긴장감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만, 사건이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끝내 그 의미가 설명되지 않고 남겨진다. 하지만 그렇게 결과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관객의 긴장감과 호기심을 붙잡고 영화적 시간이 흘러갔다는 점이 바로 맥거핀 효과의 핵심이라는 점은 앞서 설명한 바다.

유명한 사례로 [사이코] (1962, 히치콕)에서 여주인공 마리온이 훔친 가방, [바톤 핑크] (1991, 코엔 형제)에서 연쇄살인마 찰리의 상자, [미션 임파서블 3] (2006, J.J. 에이브람스)의 ‘토끼발'(Rabbit’s Foot) 등이 있다.

맥거핀은 국어사전에도 표제어로 등재된 바, 그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맥거핀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어떤 사실이나 사건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꾸며 독자나 관객의 주의를 전혀 엉뚱한 곳으로 돌리게 하는 속임수.”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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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에서 냄새는 영화를 가로지르는 화두다. 감독도 관객도 냄새를 해석하고 무수한 설을 풀어놓는다. ‘어떻게 냄새를 역해 한다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는 반문부터 ‘동익의 무례한 냄새 선 긋기는 살해의 이유가 될 만큼 함의가 크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나는 ‘냄새’가 오히려 중요한 지점들을 가린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집 아들내미의 생일잔치가 벌어지기 전날, 기택네 가족은 그들이 벌인 잘못에 벌이라도 받듯 반지하 집이 침수된다(딸 기정이 검은 오물이 솟구치는 변기에 앉아 초연한 썩소를 지으며 담배를 무는 씬은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나 역시 많은 이들의 후기처럼 반지하 집이 침수된 경험이 있지만, 다행히 영화가 심각한 트라우마를 일깨우지는 않았다.

정작 내게 가장 무섭고 잔인하게 다가왔던 것은 체육관에서 수재민들과 쪽잠을 잔 기택네 세 가족이 느닷없이 박 사장네 집으로 불려가는 상황이었다. 며칠을 몸과 마음을 추스려도 모자를 판임에도, 기택네 가족은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갑작스런 출근 요청을 받고는 이를 거절할 의지도, 도리도 없었다.

기생충

나는 이런 불가항력이 너무 공포스러웠다. 어느 공장을 다니던 시절, 죽도록 괴로운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하루라도 쉬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던 트라우마가 떠올랐다. 절대적으로 ‘쉼’이 필요한 순간일지라도, 세상과 돈은 종종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넋이 나간 얼굴로 주인집 사모님을 따라 카트를 끌던 기택의 모습은, 얼이 빠진 채 자동차 부품을 나르던 내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동익과 연교의 냄새 타박이 아니어도, (나와) 기택의 자존과 존엄은 처참히 무너진 상태였다.

기생충

봉 감독에 따르면 기택의 자존감이 붕괴되는 결정적인 순간은 박 사장이 캠핑에서 돌아온 밤, 간신히 박 사장의 집을 빠져나온 기택이 반지하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터전이 물에 잠겼을 때다. 바로 이때 기택의 정신과 육체의 토대가 붕괴된다. 그런 상태로, 기택은 갑작스런 출근을 하고 동익과 연교의 시중을 든 것이다. 나에게는 이런 ‘절대적 무력’의 처지가 너무 잔인하게 다가왔다. 냄새로 인한 모욕감은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다.

낯빛이 어두운 기택에게 동익은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시냐”는 염려 대신 아이를 기쁘게 할 인디언 연기와 감정 노동을 주문한다. 평소보다 싹싹하지 않게 기택이 대꾸하자, 동익은 경멸적인 표정과 말투로 “어차피 주말수당 받고 일하시는 거, 그냥 일의 연장이라 생각하시”라고 내뱉는다. 기택은, 노동을 파는 기택 스스로에게도, 노동을 사는 동익에게도 존엄이 없는 비인격체였다.

기택네 가족과의 다툼 와중에 아내 문광을 잃은 근세는 기우를 수석으로 내려치고 정원파티에 난입하여 기정을 칼로 찌른다. 거의 공황에 빠진 기택은 기정의 흉부를 지혈하려 하지만, 아프게만 할 뿐이다. 근세와 충숙의 사투가 벌어지고, 충숙은 바비큐용 장포크를 근세의 옆구리에 꼽아 살해한다. 근세의 밑에 깔린 자동차 키를 찾으러 간 동익은 근세의 냄새에 코를 쥐어 잡으며 오만상을 찌푸린다. 이 모습에 기택의 활시위가 기어이 끊어지고, 기택은 끝내 동익을 살해한다.

최종적으로 기택의 활시위를 끊은 것은 근세의 악취를 못 견디며 몸부림치던 동익이었지만, 끊어지기 일보 직전까지 활시위를 팽팽히 당겨온 것은 동익도 냄새도 아니었다. 냄새는 영화 안팎으로 매우 중요한 화두이지만, 그에 초점을 맞춰 파국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다.

감독의 말처럼, 기택이 정신적으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은 동익과 무관한, 폭우로 인해 반지하의 집이 물에 잠겼을 때다. 동익의 모멸적인 냄새 타령은 기택의 붕괴를 ‘거들 뿐’이다.

나는 『기생충』에서 딱 하나의 스포일러를 알고 봤는데 바로 송강호가 이선균을 찔러 죽인다는 것이었다. 핵심 줄거리를 알아버려 관람 전에는 좀 속상했지만, 관람 중에는 모종의 개운함(?)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그 훈훈하고 교양 넘치는 생일파티 장면에서 “그래, 이쯤 왔으면 이선균쯤은 찔러야 뭔가 온당한 피날레 같다”고 생각했다. 법이나 윤리에는 어긋나겠지만, 내 상상의 자유는 아무튼 이렇게 펼쳐졌다.

 

S#.4 ‘해맑은’ 통보가 부른 칼부림

『기생충』은 영화 외부적으로 칸에서의 쾌거와 더불어, 합당한 근로계약과 노동여건 하에서 촬영이 진행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찬사를 받았다. 반면에 영화 내부적으로는 고용주의 권한이 비대했고, 피고용인의 권한은 왜소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감독과 관객이 모두 (영화 외부에서의 문제의식과는 달리) 별다른 의문을 갖지 않았다.

기택네 가족 중 엄마 충숙을 뺀 세 명은 주인집 아들의 생일이었던 주말에 원래는 쉬도록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동익과 연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당일 아침에 전화를 걸어 아들의 생일파티에 나오라고 지시한다. 기택네 가족이 거부하리란 생각 따윈 추호도 하지 않는 ‘해맑은’ 통보였다.

기생충

『기생충』이 영화 외적으로 지향한, 그 선진적인 노동여건이 우리 사회에 정착하려면 고용주가 저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 사전에 합의 없는 갑작스런 출근 요청에는 양해부터 구해야 하고, 비상상황이 아닌 한 피고용인이 거부해도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을 체화해야 한다. 이런 교양이 ‘표준근로계약서’에 또박또박 박히는 사회가 『기생충』의 근로기준법 준수에 찬사를 보냈던 이들이 바라 마지 않는 사회다.

주인집의 갑작스런 호출을 받은 기택네 가족은 어느 누구도 이를 거부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재난과 불상사로 인해 휴식이 절실한 상태였지만, 겨우 생일파티임에도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듯 응대했다. 냄새 때문이든, 간밤의 충격적인 사건 때문이든 관객들도 이에 대해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했다. 영화 안팎으로 서글픈 일이다.

기택네 가족이 비록 범법을 저질렀지만, 피고용인이기에 사전에 합의가 없고 경우도 없는 고용주의 출근 요청에는 거리낌 없이 거부할 권한이 있어야 한다. 노동자의 자기 시간이란, 정당한 이유로 노동을 중단해도 피해를 입지 않을 노동자의 권한이란, 노동자의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다.

부질없는 ‘만약’이지만, 만약 기택네 가족이 출근할 수 없다고 스스럼없이 전했다면, 심신을 추스르며 해결책을 강구하는 시간을 가졌다면, 따사로운 정원의 칼부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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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5 에필로그

『기생충』은 이야깃거리가 정말 많은 영화다. 여태 한 이야기보다 더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불호를 표하는 이들도 많지만, 나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 박 사장네 집 지하 벙커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온 문광의 남편, 근세의 존재 하나만으로도 내게는 훌륭한 영화다. 지하인간 근세는 극도로 영화적인 허구인데,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그토록 리얼할 수가 없었다.

하층민을 기생충처럼 나쁘게 묘사하고 희화화해서 불편하다는 반응은 좀 의외이기도 했다. 기택네 일가족이 불법과 모함까지 동원하여 일사천리로 취직하는 과정이 블랙코미디의 영화적 허용을 감안해도 개연성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라면 몰라도, 하층민을 부정적으로 그려 싫다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가난한 이는 악인도, 성인군자도 아니다. 사람이기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때로는 법도 어긴다. 기택네 가족도 그저 인간답게 입체적인 군상들이었다. 영화의 줄거리상 얄밉고 한심해 보이거나, 악덕이 부각되기도 했다. 이런 하층민 캐릭터가 영화에 등장했을 때 거북한 이들이 적지 않다면, 그만큼 사회에 여유가 없음을 방증하는 게 아닌가 싶다.

가난한 가족은 화목하면 안 되나? (기생충, 2019, 봉준호)
가난한 가족은 화목하면 안 되나? (기생충, 2019, 봉준호)

나 또한 필라이트를 즐기며 충분히(?)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기택네 식구들의 삶을 보면서 수치심이나 불쾌감보다는 마음 짠한 동질감을 많이 느꼈다. 가난하면 정말, 기택네처럼 비굴하게 무기력하게 살 수 있는데 영화가 참 리얼하다고 반색했다. 특히, 기택네는 일자리를 구했어도 시종일관 조마조마하고 위태로웠는데, 늘 그렇게 살아온 현직 하층민의 입장에서 찐득한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다.

문광네와 기택네가 아귀다툼을 벌이는 것도 불편하거나 비현실적이라기보다는 생생하게 다가왔다. 일자리 경쟁이 치열하다 못해, 문자 그대로 ‘생존’ 경쟁이 돼버린 것은 무슨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기생충』은 그 마지막에 ‘지하에 갇힌 기택’과 아들 기우의 ‘근본적인 계획’을 통해 하층민에겐 출구가 없다고 서술한다. 이런 결말에 많은 관객들이 막막하다며 무력감을 표하거나,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우리 사회 빈부격차의 씁쓸하고 암울한 실태를 묘사한 것은 알겠는데, 해법도 대안도 영화에는 없다는 거다.

나는 영화나 문학 같은 예술·인문 분야에서 사회 문제를 고발하고, 해법까지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고발만 해도 좋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술 작품이나 ‘인문학’을 통해 다른 전문 분야의 해답을 구하거나, 그것을 찾지 못했다고 답답함까지 느낀다면, 이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회 문제의 해법, 『기생충』을 예로 들면 격차나 실업, 주거여건 같은 사회문제의 해결책은 영화나 문학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참고가 될 만한 영감이나 단서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정교한 대책은 애초에 나올 수 없다. 정책 담당자와 연구자, 더 넓히면 전달자인 언론이 해야 할 일이다. 사람들도 이로부터 해법을 찾아야 한다. 영 시원찮겠지만, 이런 과정이 타당한 방식이다.

영화가 환기해주는 현실문제에 대해 그 해결책이 없다고 불평하는 반응을 보면, 우리 사회의 정치, 전문가 집단, 언론의 만성적인 역량 부족을 절감하게 된다. 고질병들이 오래도록 차도가 없는 데다 고장 난 녹음기처럼 공허한 대책만 읊어대고 있으니, 생뚱맞게도 영상예술의 전문가에게 전혀 다른 분야에 대한 해법을 요구한다. 영화 밖의 반응이 영화 안처럼 블랙코미디 같은 모습을 띠는 것이다.

송강호의 말을 빌리면,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을 통해 『살인의 추억』이 성취한 리얼리즘에서 좀 더 철학적으로 성숙했다. 나 역시 동의한다. 더 세밀하게 현실과 인간을 포착하면서 전보다 성숙해졌다고 생각한다. 멋진 작품을 선사해준 봉준호 감독에게, 영화에서 너무나도 쓰라리고 절묘했던 리얼리즘의 대사를 전하고 싶다.

“리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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