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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우리는 국가에 살고 있는 것일까?

국가 없는 삶이 상상이 안 되는 지금은 이 같은 질문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천년 전 유럽에서 이 질문은 정반대의 차원에서 의미가 전혀 없었다. 천년 전 유럽 대륙에서 국가는 결코 지배적인 통치 양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다양한 민족 집단을 거느린 제국, 제국 영토 안의 대영주, 단일 도시에 기반한 도시국가, 도시들끼리 구성한 도시연합, 종교단체들와 연계한 기사단 등등이 각자의 영역과 무력을 갖고 있었다. 국민국가라는 것은 오직 그 원형만이 간신히 고개를 빼들고 있던 상황이었고, 그 같은 체제가 장기적으로 대륙을 제패하게 될지는 전혀 확실하지 않았다.

1190년 유럽과 지중해 권역 지도
1190년 유럽과 지중해 권역 지도

500년이 지난 1490년에는 이런 상황이 조금 더 국가쪽에 호의적으로 바뀌었는데, 자잘한 영지나 도시국가들이 보다 강력해진 일부 국민국가들에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수백년 동안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 등이 형성되면서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베네치아 같은 도시국가들은 지중해의 강력한 실력자였고,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같은 거대 제국들의 위용은 대단했다. 국민국가는 이 때도 그저 경쟁 체제에 불과했지 지금 같은 지배적 체제는 아니었다.

500년이 지나 1990년의 상황은 그러나 확연히 달라졌다. 도시국가들은 진작에 통합됐다. 예컨대 베네치아나 제노바는 모두 이탈리아라는 국민국가의 구성이었다. 결코 이전과 같이 독자적으로 주권을 분할한 정치체체가 아니었다. 도시국가들이나 소영지들은 안도라, 리히텐슈타인 같은 소국에서 그 잔재를 남겼을 따름이었다.

제국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오스만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은 모두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무너졌다. 동쪽의 광대한 소련 제국이 그나마 과거 제국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이 나라도 내부 시스템은 국민국가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그마저도 얼마 안 가 무너질 예정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이 국민국가라는 체제가 유럽에 국한하지 않고, 남극을 제외한 전 세계의 육지를 뒤덮고 있었다. 990년에는 누구도 이와 같은 일을 상상하지 못했다.

국민국가는 어떻게 지배적인 체제가 되었나  

1천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유럽에서 국민국가가 그토록 지배적인 체제로 다른 모든 체제를 눌러버릴 수 있던 것일까? 찰스 틸리의 [유럽 국민국가의 계보: 990~1992년] [footnote]원제: Coercion, Capital, and European States: A. D. 990~1992.[/footnote]는 이 질문에 대한 저자만의 독창적이고, 장대한 대답이다.

[유럽 국민국가의 계보: 990~1992년], 찰스 틸리 저/지봉근 역 | 그린비 | 2018 http://www.yes24.com/Product/goods/62089729
[유럽 국민국가의 계보: 990~1992년], 찰스 틸리 저/지봉근 역 | 그린비 | 2018

1. 전쟁

틸리의 가장 핵심적인 논지, 그러니까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결국 전쟁이다. 유럽 안에서 수많은 정치체들은 1945년까지 지속적인 전쟁을 벌여왔다.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 민족, 지도자, 도시 등은 굴욕을 맛 보았고 영토를 잃었으며 최악의 경우는 아예 사라지기까지 했다. 반대로 전쟁에서 이긴 측은 영광을 쟁취했고 돈과 땅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폭력적 경쟁 과정에서 가장 적합한 체제가 바로 국민국가였다.

도시국가나 제국이 사라지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민국가가 아닌 모든 정치체들은 결국 국민국가와의 전쟁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많은 도시국가들은 흡수되었고, 제국은 쪼개졌으며, 그도 아닌 경우 자신들이 스스로 구체제를 버리고 국민국가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전쟁, 적자생존, 모방학습 등의 결과가 누적되자 국민국가가 세계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왕국에 패배한 칼레 해전(1588년 8월 8일)을 묘사한 '아르마다의 패배' (루터버그 작)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왕국에 패배한 칼레 해전(1588년 8월 8일)을 묘사한 ‘아르마다의 패배’ (루터버그 작)

2. 강제와 자본 

그렇다면 왜 국민국가가 가장 전쟁에 특화되었을까? 여기서 틸리는 아주 인상적인 두 개념을 들고 나오는데 바로 강제(Coercion)자본(Capital)이다. 이 책의 원제가 [강제, 자본, 유럽 국민국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강제는 타인에게 하기 싫은 걸 하게 만들 수 있는 무력, 권력이다. 국가를 비롯한 정부 조직을 통해 수행되며 하향식이다. 자본은 생산수단이나 교역을 통해 축적되고 재투자되는 돈이다. 촌락에서 낮은 수준의 교역중심지, 지역적, 국가적 교역중심지, 국제적 교역중심지로 집중되는 상향식이며, 당연하게도 도시에 축적된다.

전쟁을 수행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강제를 얼마나 축적하고 집중시켜놨는지다. 그래야 다른 국가나 도시들이 하기 싫어하는 걸 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본도 여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군대가 돈을 엄청나게 먹어대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결국, 효과적으로 강제수단을 사용하려면 그 기반이 되는 자본을 착실히 모을 수밖에 없다. 결국 장기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국가체제 속에서 우뚝 서기 위에서는 강제와 자본 모두를 대량으로 동원해야한다. 이를 위한 최적의 체제는 바로 국가였다.

전쟁을 위해선 강제(력)와 자본이 필요하고, 강제와 자본을 관리하고 축적하기 가장 유리한 시스템이 바로 국민국가다. (출처: Duncan-CC-BY)
전쟁을 위해선 강제와 자본이 필요하고, 강제와 자본을 관리하고 집중하며 축적하기 가장 유리한 체제가 바로 국민국가다. (출처: Duncan-CC-BY)

세 가지 경합 모델 

하지만 찰스 틸리는 지금의 형태로 국가가 만들어지고 강화되는 게 결코 처음부터 고정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왜냐면 자본과 강제를 집중시키는 전략이 상황에 따라 천지차이였기 때문이다.[footnote]여기서 모델을 설정하는 걸 보고 정말 감탄했다.[/footnote] 틸리는 국가 형성에 있어서는 세 가지 경합하는 모델이 있었고, 누가 어떤 모델을 선택할지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 상이했다고 말한다. 모델은 다음과 같다.

1. 강제집중전략

자본은 빈약하지만, 강제는 집중되어 있는 지역에서 발생하는 전략이다. 동유럽과 같이 국제적 무역중심지가 없는 곳이 이에 해당한다. 교역망이 빈약하다는 것은 강력한 힘을 지닌 상인집단이 없다는 뜻이고 화폐경제, 시장화가 덜 진행되었다는 의미다. 강력한 상인집단의 부재는 곧 대영주와 왕, 황제에 대한 견제수단의 부재를 뜻한다. 따라서 강제력과 자본의 동원은 철저히 하향식으로, 또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 강제집중전략은 상대적으로 거대한 국가, 관료기구를 창설하게끔 한다. 조세방식 때문이다. 화폐화가 잘 진행되어 있을 경우 거래되는 화폐나 판매되는 물건에 세금을 붙여 조세를 거두면 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관료제로 효율적으로 조세제도를 운영할 수 있다. 반면 화폐화가 빈약할 경우 세금의 근거는 인두세, 토지세가 되는데 이 같은 근거를 파악하고 징수를 집행하기 위해 육중한 관료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러시아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노브고로드 같은 자본집중적 도시국가들이 존재하긴 했으나 그 힘은 역시 미약했다. 스텝 지역에서 오는 유목민의 침략을 빌미로 자원을 징발할 수 있던 모스크바의 국가기구가 훨씬 더 강력했다. 모스크바의 지배자들은 인근 지역에 대영주를 파견하고 그 지역의 직접적 지배는 영주들에게 맡기는 전형적인 느슨한 제국을 건설했다. 다만 영주들은 차르에 대한 충성을 언제나 확고히 해야했고 군사적 의무를 다 할 필요가 있었다. 틸리에 따르면 이 모델은 강제가 ‘집중’은 되어 있으나 ‘축적’은 빈약한 경우다.

러시아 제국(1721 – 1917)의 문장
러시아 제국(1721 – 1917)의 문장

2. 자본집중전략

강제가 한 지배자에게 집중되지는 않았지만, 상대적으로 자본이 풍부하게 축적되어 있는 도시 지역에서 발생하는 전략이다. 북이탈리아부터 리옹을 거 저지대 한자동맹 도시까지 이어지는 대교역망에서 잘 발견된다. 강제집중전략이 유럽의 변경지역에서 주로 발전하는 것과 대비되는데 이 때문에 틸리는 유럽의 국가지형은 동심원구조를 띤다고 주장했다.

도시는 유력 상인 가문들에 의해 과두정으로 운영되었다. 도시 배후지의 농업지역은 도시가 직접 통치했고, 주변의 대영주들과는 권력을 거의 공유하지 않았다. 또한 관료체제는 강제집중 지역에 비해 훨씬 더 날씬했고 효율적이었다. 이는 경제의 화폐화, 시장화가 잘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물건을 표준화된 가치 기준에 맞춰 계량할 수 있었고 도시 지역은 유능한 회계인력을 보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국가들은 상대적으로 강제수단을 덜 사용하고도 다른 나라들을 때로는 압도하는 자본을 축적해낼 수 있었다.

베네치아가 자본집중전략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며 교역네트워크의 중심으로 부상한 베네치아는 상인과두정이라는 상대적으로 강제가 분산되어 있는 체제로 유럽을 호령했다. 대신 이들은 막대한 자본을 활용해 도시 민병대를 육성하고 효율적이고 강력한 해군을 구성했다. 베네치아는 자본으로 구성한 강제를 바탕으로 상업과 교역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더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오늘날 베네치아(베니스)의 모습
오늘날 베네치아(베니스)의 모습

3. 자본화된 강제 전략

한편 대영주의 권력이나 상인의 권력이 한쪽을 압도하지 못하고 균형 상태를 이룬 곳들이 몇몇 있었다. 이 지역은 베네치아나 제노바처럼 독립된 도시국가도 아니고, 상당히 큰 농경민들로 구성된 국가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나 초기 프로이센처럼 상업망이 빈약한 지역도 아니었다. 그래서 상인들은 왕과 영주들에게 고개를 숙여야 했으나 왕과 영주들도 상인의 손을 빌려야할 때가 많았다.

따라서 통치자는 전쟁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기로 결정했을 때 상인들의 저항을 맞닦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상인들은 자본을 대주는 대신 자신들의 정치, 경제, 사회적 이익을 실현시킬 대표권을 요구하게 된다. 이를 수락할 경우 정치권력은 더 많은 자본을 동원해 더 큰 강제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국내 문제에 있어서 정치권력의 자의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게 된다.

영국이 이 길을 걸은 가장 대표적인 나라였다. 이후의 프랑스, 프로이센도 이 모델을 따랐다. 영국의 대헌장은 영주들에게 권리를 확보시켜주는 문서였다. 하지만 전쟁수행을 위한 전비조달을 위해 점차 유력한 상인귀족들이 의회에 대표권을 늘렸고, 오랜 줄다리기 끝에 마침내 명예혁명으로 투쟁을 마무리하게 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서 중 하나인 '대헌장'(혹은 마그나 카르타, 라틴어: Magna Carta). 1215년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해 서명한 문서로 왕권을 법에 의해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서 중 하나인 ‘대헌장'(마그나 카르타, 라틴어: Magna Carta). 1215년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해 서명한 문서로 왕권을 법에 의해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자본화된 강제 전략을 채택하게 만든 것은 전쟁이었다. 영국은 처음에는 네덜란드, 이후에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위해 더 많은 자본을 동원했고 계속해서 더 많은 대표권을 상인들에게 주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나라들도 영국과 경쟁을 해야했기 때문에 영국의 전략을 모방했다. 그 결과 전쟁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국가가 동원해야할 강제와 자본도 비례해서 커졌다. 틸리는 이 사이클을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전쟁을 만든다”라는 유명한 말로 정리한다.

자본화된 강제의 동원은 필연적으로 몇 가지 부산물들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강력한 조세행정이 가능하고, 지방 대리인 통치를 종식시킬 중앙집권이다. 국가 권력은 상인들에게서 추인 받아 확보한 더 큰 강제력으로 내부의 지방권력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과거 독자적 군사력을 구축하던 영주들은 점차 무기를 내려놓게 되었다. 이 과정을 집행한 용병들도 국가가 군사력을 국유화하면서 사라진다.

한편으로 조세기반을 확립하고 체계적으로 걷기 시작한 행정체계는 점차 전문화되고 확대된 관료제로 자리잡게 된다. 이 관료제는 본디 군사적 목적을 위해 설치되었으나 관료제의 관성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잔류하게 된다. 이후 유럽 국가들이 경제, 사회 전반에 개입하게 되면서 막강한 중앙관료들이 투입되어 전문적 사무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에 개입하는 강한 국가가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

국민국가 이외의 다른 경쟁자들은 이런 자본화된 강제 전략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처음에는 더 높은 수준의 강제를 확보한 자본집중국가인 네덜란드가 치고 올라올 수는 있었다. 하지만 더 방대한 크기의 자본화된 강제 전략을 구사하는 영국에 의해 네덜란드는 밀려났다. 그 대신 경쟁자로 부상한 것은 좀 더 강제에 무게추를 놓은 프랑스였는데, 이들 또한 자본화된 강제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결국 프랑스는 영국 수준의 조세행정과 신용을 확보하지 못해 군사적 경쟁에서 점점 뒤쳐지게 된다. 특히 7년 전쟁과 미국독립전쟁을 거치며 재정은 정말 위기상태까지 치닫게 되는데 루이 16세가 삼부회를 소집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부르주아 계층은 강제수단 동원을 위해 우리로부터 자본을 끌어다쓰고 싶으면 귀족과 성직자에게도 끌어다쓰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강제를 보유한 세력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 같은 사회집단 간의 권력과 현재 작동하는 제도 사이의 불균형은 임계점을 넘어 폭발했고, 그것이  곧 프랑스 혁명이 되었다.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 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1789년 작
시민들에게 공격받는 바스티유 감옥, 장 피에르 루이 로렌트 휴엘, 1789년 작

혁명은 이후 프랑스의 봉건질서를 산산조각 냈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각국이 혁명에 개입하면서 프랑스는 더 격렬한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려들어갔다. “전쟁은 국가를 만들고 국가는 전쟁을 만든다”에 따르면 이는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냈다. 당연히 전쟁은 더 거대해졌는데 대체 어디서 더 많은 돈과 남성을 끌어다쓰느냐의 문제다.[footnote]틸리는 강제력 동원의 핵심은 ‘사람’이 아니라 ‘남성’을 동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다.[/footnote]

혁명으로 타오르게 된 봉건질서에 대한 증오는 이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하게 해주었다. 종래 존재하던 프랑스의 많은 지방 유력자들을 쓸어버리고 부르주아가 통치, 관료기구를 접수해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버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기구가 바로 더 많은 돈과 남성을 펌프처럼 뽑아올려줄 것이었다. 이 전략은 기존의 경쟁을 하찮은 수준으로 만들어버릴 정도였고, 마침내 근대적 의미의 ‘중앙집권형 국민국가’를 탄생하게 될 신호탄이 된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렇게 회고한다:

“사물을 보는 통상적인 방식에 따라 보면, 1793년의 모든 희망은 아주 제한된 군사력에 걸려 있었는데,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그런 군대가 출현했다. 전쟁이 다시 갑작스럽게 민중의 문제가 되었는데, 그 민중의 수가 삼천만 명이고 그 모든 개인이 스스로 국가의 시민이라고 생각했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작)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작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외젠 들라크루아, 1830년 작. 1830년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작품. 대혁명 이후 개인은 자기 자신을 ‘국가의 시민’이라고 생각했다.

이 혁명전쟁은 영국과 프로이센을 또 다시 자극해 근대적 국민국가로 나아가도록 고무했다. 이탈리아나 러시아 같이 더 자본 혹은 강제집중전략에 가까웠던 지역들도 점점 자본화된 강제로 향하도록 움직였다. 그렇지 못한 폴란드는 아예 사라졌다. 왕실이 대영주로부터 협력을 끌어내지 못해 강제를 충분히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시아, 합스부르크, 오스만 같은 제국들은 이후 제1차세계대전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쪼개졌으며 계승 국가들은 완연한 국민국가로 가는 길에 올라야 했다.

군부와 국가의 관계 

틸리의 마지막 문제의식은 1992년 집필 당시 세계에서 군부와 국가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있었다. 주지하다시피 유럽의 국가체제는 그 막강함으로 다른 대안적 정치질서가 존재하던 모든 곳을 굴복시켰다. 그리고 정복자들은 식민지에 유럽식 국가구조를 이식했다. 많은 논자들이 국가구조의 이식을 통해 근대적 전환을 더 압축적으로 이루어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했고 갑작스럽게 덧씌워진 국가 시스템은 많은 부작용과 함께 제3세계에서 실패했다. 수많은 나라에서 군부가 움직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고, 이들은 자신들의 막강한 강제력을 내부 통제와 억압에만 사용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틸리는 세 가지 원인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첫째, 미약한 상업 클러스터를 가진 지역에서 국가가 이식된 경우 민간 영역(자본)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데 있다. 많은 경우 군부가 자신들이 민간영역보다 더 유능함을 강조하면서 권력을 채갔다.

둘째, 냉전이 군부의 강제력 형성을 도왔다는 데 있다. 군부는 과거 영국이나 프랑스가 했던 것처럼 국가 내부의 다양한 세력과 협상을 거치며 성장한 게 아니라 초강대국의 지원을 통해 형성되었다.

셋째, 제2차세계대전 이후 다른 국가와의 전쟁이 극도로 억제되었다는 데 있다. 만약 군이 정기적으로 군사력을 타국과의 전쟁에 소모한다고 가정해보자(과거 유럽이 그랬다). 소모된 군사력을 다시 보충하기 위해 돈과 남성을 끌어오려면 필연적으로 내부 사회집단들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런 군사적 경쟁이 수십년 이상 치열하게 전개되었다면, 제3세계 국가들도 과거 명예혁명기 영국이 겪었던 갈등을 안 겪었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억제는 강제력을 순전히 축적할 수 있게 해주었고 축적된 강제력은 내부를 향해 돌려지게 되었다. 틸리는 이 때문에 냉전이 종식된 지금 이 시점에서 군부 정권들이 존립 근거를 잃기를 조심스럽게 희망한다. 아프리카를 제외하고 그의 예측은 거의 맞은 듯 하다.

위키미디어 공용(SpLoT, CC BY 2.5)
위키미디어 공용(SpLoT, CC BY 2.5)

자유? 평등? 박애? 

4년 전에 이 책과 똑같은 내용의 서양사학과 교양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선생님께서 수업 중 여러 번 강조한 학자가 바로 찰스 틸리다. 4년 전 수업 내용을 다시 떠오르면서 아 그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이런 거였구나, 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 선생님이 강조했던 바를 요약하며 글을 마친다.

프랑스 혁명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을까?

자유? 평등? 박애? (웃음) 여러분 중 자유평등박애를 위해 총들고 싸우라 하면 싸울 사람? 어떻게 그걸로 사람들을 전쟁터로 끌고가서 싸우게 하고 돈을 내라고 하겠어. 그게 아니라, 전쟁 수행을 위한 인적, 물적 자원의 동원, 재정 조달이 핵심이야.

전쟁 수행을 위해 상비군을 만들어야 했고, 상비군에 쓸 돈을 마련하려고 조세제도를 갖췄고, 그 조세제도를 굴릴 관료제를 설치했고. 그 결과 더 강력해진 상비군이 지역 세력들에게서 더 많은 돈을 뜯어내고… 이 과정에서 정치, 경제, 사회적 이익과 대표권을 요구하면서 근대 국가가 갖춰지게 되었다고.

자유? 평등? 박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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