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 SNS에서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은 영상들이 돌아다녔어. 고층건물의 간판이 날아가 전봇대와 부딪혀 불꽃이 튀는 장면, 도로를 주행하던 트럭이 쓰러지고 빌딩의 외벽이 부서지는 장면. 누가 보아도 영화 같지만, 이 모든 게 실제 상황이었어. 9월 4일, 최악의 태풍 ‘제비’가 일본 서부지역을 강타했기 때문이야.
자연재해보다 무서운 피자배달
이 모든 처참한 자연재해 상황 중에서도 특히 ‘사람에게 소름 돋게 만드는’. 네티즌의 분노를 자아낸 한 영상이 일본 트위터로부터 세계각지로 퍼져나가는 중이야.
문제의 영상에는 한 피자회사의 배달원이 나와. 강풍과 비바람을 홀로 맞서며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 위에 서 있어. 배달원은 넘어지려는 오토바이를 붙잡으려 애써보지만, 트럭도 넘어지는 마당에 오토바이가 멀쩡하겠어? 오토바이는 곱게 접어서 세워놓은 종이박스처럼 쓰러져 버렸어. 당연히 내용물이었던 피자도 엉망이 됐겠지. 배달원이 쓰러진 오토바이를 붙잡고 몇 초간 고개를 숙이며 일어나지 못하는 영상이야.
전 세계 수많은 네티즌이 이 영상을 보고 각국의 언어로 전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
“저런 상황에 배달을 시키다니. 시킨 사람이 너무했다.”
“배달을 시켰다고 진짜 배달을 하다니. 회사가 너무했다.”
음… 어느 쪽이 문제일까?
태풍 속에서도 피자 배달을 시키는 고객. 태풍을 뚫고 피자를 배달해주려는 회사. 이 둘은 편리함과 이익추구를 가지고 서로 거래를 하고 있어. 고객은 태풍에 밖으로 나가기 힘드니 편리한 배달 서비스를 주문하고, 회사는 고객의 주문에 맞춰 편리함과 피자를 제공하고 돈을 받지. 수요와 공급이 어우러져 회사와 고객 모두 평화롭게 만족시키는 거야.
아. 근데 잠깐. 영상 속에서 넘어진 피자 배달원은?
회사와 고객 모두 안전한 거래를 하고 있는데 어째서 혼자 태풍 속으로 내몰리는 사람이 생기는 걸까?
당일배송, 모두에게 편한걸까?
이번 여름은 정말 더웠지. 에어컨 없이는 1분도 견디기 힘들 정도였어.. 최고기온이 40도를 찍었었지. 그때 마침.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 사료가 떨어진거야. 소셜머너스에서 고양이 사료를 주문하면서 손가락을 꼽아보며 생각했어. ‘남은 사료로는 3일치 밖에 먹일 수 없을 것 같은데. 요즘 너무 더우니까 택배가 한 일주일쯤은 걸리겠지? 어떡하지..’
근데 웬걸? 사료는 일주일 걸려 도착한게 아니라 주문한 다음날 바로 도착했어. 우와. 우리나라 택배 짱이다. 하지만 기쁜 마음 한켠에 서서히 불편함이 자리잡았어. 문 앞에서 받은 사료 한 포대를 거실로 들고가는 것만으로도 이마에 땀이 나는데. 이 날씨에 평소같이 배달했다는거야? 조금 이상하지 않아?
올해 6월 “저희 아빠는 CJ(대한)택배 기사입니다”로 시작하는 삐뚤삐뚤한 글씨의 꼬마의 편지가 트위터에서 공유되며, 돌아다녔던 것 기억해? 편지를 읽어보면 아이는 겨울방학이 되어도, 여름방학이 되어도 아빠가 자기와 함께 놀러 갈 수 없다고. 아빠는 몸이 다쳐서 수술을 해도 회복되기도 전에 일을 하러 간다고. 아빠가 아플 때는 쉴 수 있게 하루만이라도 휴가를 달라는 내용이야.
태풍 피자 배달원 영상에 “일본은 역시 이상한 나라야”라는 댓글도 있던데. 우리나라라고 해서 딱히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야. 우리나라 택배 노동자의 근무 환경은 굉장히 열악해. 명절도 휴가도 없이 하루 13시간 이상을 일하고 있어. 근로기준법 주당 최장 근무시간 52시간(’18년 2월 28일 국회 통과)인데 어떻게?
택배노동자와 간호사 같은 ‘근로시간 특례업종’ 종사자들에겐 남 얘기야. 택배노동자는 주당 평균 70시간 넘게 일하고 있어. 그 중 하루 7시간의 분류작업은 무급으로 하게 되면서도 차량 구입비, 통화비, 기름값, 심지어 유니폼 티셔츠까지 택배기사 본인이 구매하게 되어 있지. 최장 근무시간을 단축한 이번 근로기준법 개정안에서 ‘특례업종’을 기존 26개 업종에서 5개 업종으로 대폭 단축(453만 명 → 112만 명)했지만, 여전히 100만 명 넘는 노동자가 개정된 법의 보호망 바깥에 있어.
택배기사가 어떻게 일을 하게 되냐면, 대한통운 같은 본사가 대리점을 통해 택배기사와 계약을 맺는데, 택배 기사를 개인사업자(자영업 사장 같은거야)로 계약을 맺게 만들어. 이런 형태의 노동자를 ‘특수고용노동자’(특수형태근로종사자, 참고 기사)라고 하는데, 개인이 사장이고, 경영 책임자지만 본사와 계약을 맺어 브랜드 이름 값으로 수수료를 떼가는 시스템이지. 이를테면, 빨간펜 같은 학습지 선생님도 특수고용노동자인거지. 대표적인 특수고용노동자는 다음과 같아.
- 택배기사
- 퀵서비스기사
- 대리기사
- 골프장 경기보조원(‘캐디’)[footnote]대법원 2014. 2. 13. 선고 2011다78804 판결로 노동조합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한다는 방향으로 법원의 판단이 확립되고 있다. 관련 기사.(편집자)[/footnote]
- 보험설계사
- 화물차 지입기사
- 학습지 교사[footnote]지난 ’18년 6월 대법원은 학습지 교사를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관련 기사. (편집자)[/footnote]
택배회사들은 이런 특수고용구조를 이용해서 수수료를 떼가고, 배달원은 택배 물류 한건당 700원 정도의 수익을 받게 해. 우리가 구매할 때 배송비는 2500원인데. 기사 아저씨가 700원만 받는다면, 남은 1,800원은 어디로 가는걸까? 게다가 휴일수당. 야근수당도 없이 일해야 하는데, 택배기사들이 개인사업자(사장)라는 이유로 택배에 필요한 차량, 주유비, 유니폼, 통화료등을 다 본인이 부담하게 하고, 회사에 수수료를 뜯기지만 제품이 파손될 경우엔 100퍼센트 본인의 책임으로 변상해야하는 부담을 안고 있어. 수익과 권리는 회사 본사가 가지고 있지만, 위험부담과 책임은 택배기사 개인이 오롯이 져야하는 부당한 시스템인거지.
“여러분 아시죠? CJ대한통운, 롯데, 한진택배, 로젠택배, 드림택배. 이 분들이 대부분 시장을 차지하고 있고. 그렇게 해서 이 분들이 대리점에 위탁을 먼저 줘요. 그리고 위탁대리점이 이 분들을 정규직 노동자로 고용해야 할 텐데, 또 개인사업자로 고용합니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대표적인, 간접 고용되어 있고. 그래서 대리점에 항의하면 이건 본사가 우리에게 수주를 덜 줘서 어쩔 수 없다. 이런 식인 거죠.”
– “택배노동자들 하루 14시간 일해도 건당 700원”, 안진걸 참여연대 사무처장 인터뷰 (SBS, 김성준의 시사전망대, 2018.01.23) 중에서
근래에 들어 부쩍 많아진 당일배송 등 속도 서비스 경쟁은 고객인 우리의 입장에서는 편리함을 안겨주지. 회사 입장에서는 고객을 놓치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한 절호의 마케팅이야.
하지만 이 당일배송 때문에 다치는 배달원들이 많대. 택배기사 입장에서는 딱히 더 많지도 않은 수익에, 제품이 파손될 위험도 본인이 져야하고, 점심,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는 등. 몸을 혹사 시키게 만드는 일이야.
우리나라의 배달원들 역시 일본의 피자배달원처럼, 편리함을 추구하는 고객과 회사의 이익추구 사이에서 혼자 위험한 태풍으로 내몰린 신세와 다르지 않다는거야.
청년실업이 몸 쓰기 싫어하는 청년들 탓?
청년 실업문제가 크다는 뉴스가 해마다 쏟아져나오고 있어. 이런 주제의 대화에는 꼭 어르신들이 쓴소리가 따라붙지. 가령, 이런 식이야.
“일자리 문제가 나라 탓이고 하는거 다 순~ 젊은 청년들이 일하기 싫어서야. 편한 자리에만 앉고 싶어 하니까 그렇지. 요즘 청년들은 몸 쓰는걸 싫어하잖아. 일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요즘은 동남아 사람들이 다 일하잖아. 요즘 젊은이들은 나라 탓만 하니 원 쯧쯔…”
말씀은 고맙지만, 이런 어르신들의 주장에는 우리가 실제로 마주하는 현실이 빠져있어.
한국청년들이 기피해서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일엔 어떤 것이 있지? 인건비 절약을 위해 세 명에게 시킬 일을 한 명이 맡게 한다던가. 노동 대비 급여가 적은 곳들이지. 노동자 처우를 개선시켜야 사람들이 일하러 몰릴 것인데 기업이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서 과도한 욕심을 부리고 있는 것까지 청년들이 게으른 탓으로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옳은걸까?
생각해보자. 힘이 세고 건강하고, 몸쓰는 걸 좋아하는 청년이 있어. 하루에 물건 십만개를 배송하겠다는 성실한 포부와 자신감이 넘치는 청년이지. 근데 이 청년이 택배기사가 되면, 본사의 지원 하나 없이 본인 부담으로 빚내서 트럭도 사야 되고, 회사 유니폼도 본인이 사서 시작하면서 배달노동자니까 당연히 매일 밤늦게까지 배달해야하는데 야근수당 한 푼도 안 주는 근무환경인 줄 알면, 근데 본사에서 수수료는 떼가고, 계약해지에 대한 부담감은 계속 안고 해야 하는 일인 줄 알면, 아무리 몸쓰고 싶어도 택배기사 하고 싶을까?
청년 일자리 문제는 어르신들의 잔소리와는 달리, 게으름이나 몸 편하게 앉아서 일하고 싶은 욕심과는 다른 문제야. 정당하지 않은 노동구조와 불안한 미래를 떠안고 싶지 않은거지.
“우리 때는 다 그만큼 고생하면서 돈 벌었어. 요즘 청년들이 고생할 줄 몰라서 그러는거야.”라는 말은 전근대적 노동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어떤 문제의식도 없이 살아왔다는 뜻이고, “외국인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는데 우리나라 청년들은 불평만 해”라는 말은 얼핏 외노자들의 성실함을 존경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외노자들에 대한 회사의 꼼수와 부당한 임금지급을 정당한 것이라 인정하자는 것과 같아.
우리는 이걸 기억해야 해. 나쁜 환경 속에서도 서로에게 ‘고생하지 않으려고 한다’며 몰아세우는 것은 서로를 태풍 속으로 내모는 것과 같아. 거기엔 수요와 공급의 안락한 조화, 기계적인 편리함은 있지만, ‘이 태풍에 사람이 다치진 않을까’하는 인간에 대한 걱정과 존중은 사라져. 마침내 우리가 찬바람 속에 내몰릴 때도 당연한 고생으로, 일의 효율성으로만 평가받는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는거야.
우리 곁을 따뜻하게 만드는 불편함
세상에 당연한 고생은 없어. 남들 쉴때 수당 못받고 일하는게 당연한 사람은 없어. 당연하게 돈 벌려고 하는 사람에게 희생되는 사람들이 있는거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이 불온하다고 말해. 사회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생각일 뿐이라고. 글쎄. 그럼 모두가 희생을 감수해서 군말없이 회사를 위해서만 일하게 되면 그들의 말처럼 기업이 성장하고, 나라가 강해져서, 모두가 배불러질까?
우리는 모두 노동자인 동시에 소비자야.
출근할 때는 직장인이 되지만, 퇴근 후에는 고객이 되지. 일하는 노동자들이 뼈 빠지게 일해도 제 임금을 받지 못하고 계속 일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돈이 통장에 잘 안 모이게 되니 소비생활이 위축되겠지. 퇴근하고 고양이 카페에 가던 김 씨도, 주말엔 가족들과 외식을 하던 이 씨도, 퇴근 후 쇼핑을 즐기던 박씨도. 힘들게 일하지만 통장은 넉넉치 않으니 더 이상 그런 소비활동을 못하게 될거야. 그럼 회사들은? 고객이 없어 이윤을 얻지 못하는 회사들은 노동자들에게 주던 돈마저 없어지고 문을 닫아야 돼.
고용주들이 근시안적인 욕심에 노동자들의 생존권마저 무시하며 일을 시키는 것은 거시적으로는 회사도 국가경제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거야.
다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필요한 건, 태풍을 뚫고 나가는 맷집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야. 조금이라도 남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장이라면, “태풍이 불지만 고객의 주문은 받아야되니 배달하게”라고 하지 않겠지.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이미 이런 사람들이 많아.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부당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의 말에 기울여야 해. 사회가 종종 그들의 입을 막기 때문이야. 불편해지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어떤 불편함은 우리를 건강하게 지켜주기도 해. 누군가를 태풍 속으로 몰아넣는 기계적인 안락함이 지배하는 세상에선. 너든 나든. 누구든 언제든 벼랑으로 내몰릴 수 있으니까. 이런 일에 불편한 감수성을 갖는 건 나쁜 게 아니야. 건강한 거야.
첫 댓글
댓글이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