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익이 지난 21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한 발언이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혼밥’(혼자 밥 먹는 것)을 ‘자폐’에 비유한 것.
참고로 황교익의 발언 전문과 정리글 그리고 관련 기사는 아래 링크를 참조하시라.
- 김어준의 뉴스공장, tbs (’17. 4. 21.) [footnote]황교익 출연일은 4월 21일, 하지만 TBS홈페이지가 개별 방송에 관한 개별 주소(URL)를 제공하지 않으므로 독자가 그 홈페이지를 찾아가 해당 방송일을 찾아야 한다. [/footnote]
- 황교익의 “혼밥은 자폐” 발언 전문 정리 (임예인, YEINZ.NET): 방송을 듣기 힘든 분들을 위한 텍스트 정리본.
- 황교익, “혼밥은 마음의 병이고 사회적 자폐” 발언 논란 (중앙일보, ’17. 7. 24)
황교익의 발언은 당시(’17. 4. 21.)에는 큰 화제가 되지 않았으나 디스패치의 보도에 의해 발굴되었으며, 황교익은 페이스북을 통해 디스패치가 “사회적 자폐”란 발언을 “사회적 자폐아”로 바꾸어 쓴 것은 미개한 일이라며 디스패치를 “쓰레기 언론”이라 지칭하는 등 반격에 나섰다.
나는 연예인 사생활을 캐내는 디스패치를 좋은 언론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싸움에선 결코 황교익 편을 들어줄 수가 없는데,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1. 자폐란 발언 자체
자폐는 많은 선입견과 싸워야 하는 질병이다. 황교익은 이미 자신이 자폐아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사회적 자폐란 사회적 영향에 의한 자발적 고립을 뜻하는 단어라고 주장하였으나, 혼밥을 매우 부정적인, 인간성 자체의 결핍 증상으로 묘사한 맥락에 비추어 볼 때 이런 핑계만으로 면죄부를 주긴 어렵다. 그가 ‘자폐’란 용어를 사용한 맥락은 이와 같다.
황교익: 밥을 혼자 먹는다는 것은 소통을 거부하겠다는 것. 인간 동물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인 소통의 방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김어준: 인간관계의 스트레스, 감정노동 때문에 단절돼더라도 혼자 밥을 먹는 것일 수도 있다.
황교익: 그걸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싫다고 해서 혼자서 어떤 일을 하겠다 숨어드는 것은 자폐인 것이다. 단절시키고, 나 혼자 밥 먹고 생각하고, 나 혼자만의 말을 하는 순간, 박근혜 대통령에게서 보지 않았나.
덧붙이면, 황교익은 여기에서 ‘자폐’라고만 얘기했다. 사실 황교익의 ‘자폐’ 발언을 ‘사회적 자폐’로 교정한 것은 김어준이었다.
2. 인간이 동물에 비해 먹이가 부족했다는 주장
황교익이 ‘혼밥은 사회적 자폐’라는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논리도 이상하다. 다음과 부분을 보자.
황교익: 왜 이렇게 음식을 쾌락으로 만들었느냐 하면, 먹을 수 없는 음식도 먹어내기 위한 전략이다. 동물들은 입에 넣으면 먹을 만한 것들만 먹는다. 인간은 먹이 활동을 잘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먹지 못할만한 것도, 그러니까 입에서는 거북한, 거부해야 돼는 맛들도 먹어내야 하는 생존의 조건이 있었다.
인간이 요리를 시작하게 된 이유에 대한 가설은 다양하지만, 적절한 식재료 가공을 통해 독소를 제거하거나 중화하고 더 많은 열량과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가설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반면 황교익의 가설의 핵심인 “동물에 비해 인간이 먹이 활동을 잘할 수 있는 동물이 아니”라는 주장은 쉬이 이해되지 않는다. 농경이나 목축이 시작되기 이전에도, 인간은 선사시대 때부터 뛰어난 지능과 기술로 대형 동물까지 사냥했다.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은 소수 육식 동물을 제외하면 다른 동물들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 인간은 식량을 저장하고 가공할 수도 있다.
3. ‘거울 신경’을 통해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주장
또 이런 이야기도 했다.
황교익: 음식에 쾌락을 붙이는 일이 뇌 속에 있는 신경세포에 의한 작용으로 만들어진다. 먹지 못할 이상야릇한 음식을 먹어내는 것은 본능이 아니라 문명이다. 혼자 이 맛을 쾌락으로 만들기 힘드니까 다른 사람의 쾌락을 머릿속에 복사하는 그런 능력을 만들었다.
인간의 머릿속에 거울 신경이라는 것이 발달해 있다. 인간의 모든 문명의 시작은 거울 신경에서 시작하는 것이라 봐야 한다. 거울 신경이란 것은 상대방의 감정, 쾌락, 슬픔, 모든 것을 복사하는 신경조직. 우리 뇌 속에 있다. 거울 신경이 크게 발달하니까 모든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맛없는 음식을 먹어내기 위해서. 이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고도의 문명을 만들어냈다.
황교익이 말하는 거울 신경 세포란 90년대 원숭이의 뇌에서 발견한 신경세포다. 다른 개체의 행동을 관찰할 때와 자신이 같은 행동을 할 때 모두 활성화되는 세포로, 다른 개체의 행동을 자신의 행동처럼 보이게 한다고 믿어지고 있다.
문제는 황교익의 말과 달리 인간의 거울 신경 세포는 관찰되지 않았고, 뇌 영상 촬영을 통해 그런 것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수준의 추측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거울 신경 세포가 인간 문명의 시작이라는 주장도 근거가 미약하다. 황교익이 말하는 것처럼 상대의 모든 것을 복사하는 무시무시한 복사기인 것도 아니다. 유사과학적 담론이다.
또한, 황교익 주장대로라면 거울 신경 세포가 분명히 존재하는 원숭이야말로 문명을 건설했어야 했으며,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는 조류도 문명을 건설했어야 했다.
4. 노숙인이 되는 원인을 혼밥과 무리하게 연결
황교익은 또 이렇게 말했다.
황교익: 소통을 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 예를 본 적이 있다. 밥 먹을 때 소통을 거부하는, 적극적으로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노숙자. 다들 밥을 받고 바로 벽 쪽에 가서 고개를 푹 숙이고 밥만 먹는다. 옆에 사람을 돌아보거나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인간들간의 소통 방법을 완전히 잃은 것이다. 뇌에 큰 고장이 발생한 것이다. 노숙자는 경제적 능력이 없는 것에 발생하는 게 아니라 마음의 병이 굉장히 큰 것,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자세 때문에.
그는 혼밥과 노숙인을 무리하게 연결했고 부당하게 비판한다. 노숙인이 발생하는 이유는 개인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이 혼재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경제적 실패, 가정 문제, 노동력 상실부터, 사회적으로는 안전망 부재, 가정 폭력 등을 들 수 있다. 또 황교익의 주장과 달리 많은 노숙인은 노동과 직업 교육 등의 사회 활동 재참여에 적극적이며, 빅이슈와 같은 잡지가 노숙인들의 자립을 돕고 있기도 하다.
노숙인이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다며 혼밥족의 대표 격으로 내세우지만, 이는 전형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논리로 보인다. 노숙인은 사회적 안전망과 사회관계로부터 단절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주위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황교익은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밥 먹는 양태를 관찰하기 위해 양해를 구하고 노숙인 사이에 끼어 무료 급식을 먹어봤다고 얘기한다. 이 과정에서 노숙인들이 벽만 보고 밥을 먹는 것을 보고 소통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굉장히 부실한 논리다. 오히려 황교익이야말로 진정 그들의 이해를 구하고, 그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자세가 있었는지 되묻게 되는 에피소드가 아닌가?
5. 혼밥을 모든 소통의 단절로 이해하는 무리한 논지
황교익: 혼자서 밥을 먹는 일은 인간의 유구한 600만 년 전통에 벗어나는 일이다. 혼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일단 소통을 하지 않겠다는 사인이라고 볼 수 있다.
김어준: 인간관계의 스트레스, 감정노동 때문에 단절돼더라도 혼자 밥을 먹는 것일 수도 있다.
황교익: 그걸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싫다고 해서 혼자서 어떤 일을 하겠다 숨어드는 것은 자폐인 것이다.
혼밥을 비판하는 그의 논지가 이처럼 모두 부실하거나 아예 잘못되었다. 거기에 소통의 방식이 밥만은 아닐 것인데, 혼밥을 모든 소통을 거부하는 행위처럼 묘사함도 이상하다.
소통의 방식은 다양화되고 있으며, 한 가지 소통 방식만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황교익이 밥을 먹으면서도 대화하지만,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통해서도 대화하듯이, 모두가 그렇다. 혼밥을 한 번 했다고 해서 영원히 누군가와 밥 먹는 것을 거부하고 영원히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아니다.
황교익: 개인의 취향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파편화돼 있는 사회다. 개개인이 행복한 사회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김어준: 밥을 혼자 먹는 것, 일인 가정에 대해 이상한 게 아니라고 하는데…
황교익: 그러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친구나,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가족과 함께 밥을 먹으려고 하는 생각을 해야 한다. 식성을 바꾸어야 한다.
나는 이 발언에서, 황교익이 과거 둘러앉아 엄마의 밥을 나눠 먹는, 시쳇말로 ‘정상 가족’에 경도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일전에도 백종원 열풍이 80~90년대생들에게 엄마의 음식, 엄마의 사랑이 결핍되어 일어나는 현상이라 진단한 바 있다.
물론 그것도 아름다운 모습이다. 다만, 가족 모두가 진실로 주체적으로 그와 같은 가족이 되기를 바랐을 때에 한해서 그렇다. 과연 그런가? 정말 엄마의 선택은 주체적이었던가? 딸들의 선택은? 혹 아들들의 선택은? 심지어 아버지의 선택은? 모두 정상 가족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맞추고 있지 않았던가? 다만 한 밥상에 둘러앉았다 해서 그것을 진정한 소통이라 부를 수 있을까? 세상은 변했다. 정상 가족은 없다.
황교익은 파편화된 현대 사회가 과연 개인이 행복한 사회인지를 되묻는다. 난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미혼자들, 여성들, 성소수자들, 일인 가족들에게 특히 그렇다. 때로 혼자 밥을 먹더라도 그들은 훨씬 자유롭고 편안하게 자신이 원하는 소통을 하고 있다. 우리는 소통하지 않는 게 아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훨씬 제대로, 진심을 소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