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실용서를 좋아한 적이 없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실용서는 언제나 내게 비실용이었으니까. 뜬금없이 이 말을 꺼내는 이유는 이 책이 실용서가 아니라는 걸 이제라도 고백하기 위해서다. 실용적인 뭔가를 기대하고 여기까지 읽었는데 이제 와서 이러면 어쩌라는 거냐! 항의를 하고 싶으시더라도 참아주길 바란다.
이미 화가 났더라도 잠깐만 가라앉혀주길 바란다. 지금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여행에서 가장 실용적인 말 한마디를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려는 참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디를 여행하든 두고두고 잘 써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한마디! 물론, 이후의 장에서는 다시 이런 실용적인 정보가 제공되지 않을 예정이므로 어쩌면, 아니 정확하게는 이 책 전체에서 지금 이 부분이 가장 실용적인 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서론은 좀 닥치고 본론으로 들어가라고? 이렇게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는데, 차마 본론부터 시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때가 된 것 같다. 본론을 시작할 때가. 음음. 목소리를 가다듬고. 지금부터 여행에서 가장 실용적인 말 한마디를 공개하겠다. 그건 바로,
“What’s your favorite?”
겨우 이거냐고? 겨우 이거다. 설마 진짜 저 말이냐고? 그렇다. 이게 무슨 중요한 비밀이라고 그렇게 뜸을 들였냐고? 중요하다.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써먹은 결과 한번도 통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마법의 주문처럼 이 질문을 하는 순간 모두가 진심이 되었다.
모두가 내 여행을 완벽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고심했다. 생전 처음보는 사람들도, 앞으로 볼 일이 없는 사람들도 모두. 말 그대로 모두. 오로지 저 한마디 때문에.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건요?”라는 이 평범한 한마디 때문에.
리스본에서의 일이었다. 그날은 모든 관광지가 공짜로 개방하는 날이라 아침부터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그랬더니 저녁이 되자 한 발자국도 못 뗄 정도로 지쳐버렸다. 그때 눈앞에 구세주처럼 중고 CD 가게가 나타났다. 남편이라도 기력을 회복할 차례였다. 남편은 CD 한 장 한 장씩 다 살펴보며 에너지를 회복하고 있는데, 음악에 무지한 나는 그 옆에서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설렁설렁 CD 재킷이나 구경을 하고 있다가, 가게 점원이랑 눈이 마주쳤다. 가게 점원이 웃고 있었다. 그 가게를 다 털어가겠다는 기세로 CD들을 확인하는 남편을 보며. 그 웃음을 놓치지 않고 나는 가게 점원에게 물어봤다.
“저기…… 저희 지금 이 식당에 가려고 하는데…… 여기 어때요?”
“아, 거기, 화려해요. 그리고 비싸요. 관광객들이 많이 가죠.”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거죠?”
“솔직히 그 돈 주고 갈 곳은 아니에요. 근데 뭐, 가봐도 나쁘진 않을 거예요.”
“그럼 혹시 추천하고 싶은 식당이 있어요?”
가게 점원은 식당 이름 몇 개를 댔다. 그래서 나는 질문 하나를 더했다. 바로 그 마법의 질문을.
“What’s your favorite?”
“생선? 고기?”
“생선이요.”
“아…… 정말…… 러블리한 식당이 있어요. 슈퍼슈퍼 어메이징. 지금 가면 안 기다리고 먹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진짜 최고인 곳이 있어요. 근처에.”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인터넷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영업시간을 확인하고, 전화를 걸어 빈 테이블을 확인하더니, 지도를 그려주었다. 여기 생선이 최고라고.
중고 CD를 잔뜩 사들고 그곳에 갔다. 형광등 불빛 아래 여섯 개의 테이블. 포르투갈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푸른색 무늬의 벽 타일들. 역시 푸른 문양의 접시들. 여기까지는 별로 특이할 게 없었다. 하지만 메뉴판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나는 다시 한 번 마법의 질문을 꺼냈다. 그 순간, 아저씨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눈을 부릅뜬 생선들을 가지고 나왔다. 여기서부터 이 식당은 특별해지기 시작했다.
“오늘 잡은 생선들이에요. 왼쪽부터…….”
“우리는 생선 바보들이에요. 추천해주세요.”
“그럼 이 생선을 먹어봐요. 맛있을 거예요.”
CD가게 언니의 추천을 믿고 여기까지 왔으니, 이젠 아저씨를 믿을 차례. 우리는 아저씨가 추천하는 생선구이를 주문하고 아저씨가 추천하는 와인도 함께 주문했다. 포르투갈에서만 마실 수 있는 와인이었다. 오늘 우리를 기어이 여기까지 이끈 여행의 신을 믿자며 한참 기다리고 있으니 삼십 센티미터는 가뿐히 뛰어넘을 생선 두 마리가 우리 식탁 위로 올라왔다.
“엇, 우리는 한 마리 시켰는데요?”
“이게 한 마리예요.”
“두 마리인데요?”
“주방장이 한 마리로는 모자란다 생각했나 봐요. 그래서 두 마리를 구웠고, 근데 당신들은 한 마리를 시킨거니까, 이게 한 마리인 거죠. 맛있게 먹어요.”
우리는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다가 우하하하 웃어버렸다. 아저씨는 우리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우리는 다시 서로를 쳐다보고 우하하하 웃었다. 우리 진짜 제대로 찾아왔구나. 이거 양 봐. 다 먹을 수 있을까? 잠깐만 사진 좀 찍자. 나 정신이 없다. 뭐지? 이 식당은?
먹어봐. 아, 떨린다. 이거 냄새부터 너무 제대로인데. 아, 이 속살 봐. 부드럽고, 부드럽고, 부드러워. 어떻게 이렇게 촉촉하게 굽지? 이 와인은 진짜 이 생선이랑 베프구나. CD가게 언니한테 절해야겠다. 이거 무조건 다 먹는 거야. 나는 다 먹을 수 있어. 이걸 어떻게 남겨.
우리는 먹었다. 포크를 내려놓을 수가 없는 맛이었다. 어느새 커다란 뼈 두 개만 접시 위에 남았다. 아저씨가 또 찡긋 웃었다. 우리는 두 손가락을 들어주었다. 아저씨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가 시작이었다. 어디에서든지, 무엇을 묻든지, 이 마법의 질문을 덧붙이면 사람들의 얼굴에 진지함이 깃들었다. 그저 “네가 제일 좋아하는 건 뭐야?”라고 물었을 뿐인데 ‘나에게 인생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고민하는 얼굴로 바뀌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취향을 동시에 다 불러내서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다른 이유도 없고, 순전히 나를 위해서. “What’s your favorite?”이라는 질문을 하는 낯선 한 사람을 위해서. 상대가 진지하게 너의 결정을 믿겠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그 질문을 여행 내내 써먹었다. 와인 숍에서의 일이었다. 와인을 추천해달라는 말에 주인은 서너 개의 와인을 추천해줬다. 그리고 다시 꺼낸 나의 회심의 한마디, “What’s your favorite?” 와인 가게 사장님은 추천한 와인 한 병 한 병을 다 쳐다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내가 이걸 좋아하나? 아니, 이걸 좋아하나? 난 뭘 좋아하나? 고심 끝에 주인은 한 병을 골랐다. “그럼 그걸로 살게!”라고 말하고 계산을 하려는 찰나, 주인이 바코드를 찍어보더니 찡긋하며 말했다.
“심지어 이건 지금 세일 중이야. 원래는 13유로인데 지금 세일해서 8유로야.”
맛이 어땠냐고? 다음 날 그 와인 가게에 다시 가서 한 병 더 샀다. 한국에 가져가기 위해서. 그렇게 맛있는 와인은 또 처음이라서.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못났든, 당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나는 당신이 들려주는 말들을 사랑한다. 그게 거짓투성이여도 상관없다. 당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당신을, 나는 당신이라고 부르려 한다. 당신이 들려주는 말들을 당신의 진심이라고 여기려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믿고 싶어하는 것을, 내가 함께 믿고 싶기 때문이다.[footnote]김소연, [시옷의 세계], 마음산책, 2012[/footnote]
나의 이름은 여행객.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하지만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만났으니, 잠깐만 진심을 보여주겠니. 너의 보석을 내게 보여주겠니. 나는 여행객. 너의 보석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길 사람. 그 보석이 이 도시에서 가장 빛난 보석이라고 믿어버릴 사람. 기꺼이 믿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나의 이름은 여행객. What’s your favorite로 너의 진심을 알고 싶은 사람. What’s your favorite에서 슬며시 드러나는 너의 진심에 내 여행 전부를 걸고 있는 사람. 무모한 사람. 아직도 진심을 믿는 순진한 사람. 나의 이름은 여행객.
[box type=”note”]이 글은 [모든 요일의 여행] 중 일부입니다.[/bo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