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상존하는 생태의 잔인함’
오래전 남긴 메모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건축학개론을 보고 나왔을 때의 개인적인 감각은 그랬던 것 같다. ‘건축학개론’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이긴 했지만 도드라진 부분이 눈에 띄진 않았다. 도전적인 주제의식이나, 표현양식은 물론이거니와 반영되고 있는 사회를 말하기에도 복고적 취향 이상의 그 무엇을 찾기는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되새겨보는 것은 무언가 응어리진 마음을 말하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과의 재회
이 영화는 꽤 성실한 대중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감정을 적당히 자극적인 드라마 속에 실어 내었으니 말이다. 상업 장편영화를 만듦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중심 서사의 이야기로서의 힘과 그 속에 공감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다.
이 영화는 소재로 등장하는 집짓기처럼 투박하지만 성실하게 이야기를 쌓아나간다.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을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나게 된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는 조금씩 살을 붙여가며 좀 더 보편적인 이야기로 나아간다.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빼앗겼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평범한 듯 힘을 가지는 요소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계급감정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사실 사회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계급이라는 것을 생활 속에서 인식하고 살았겠는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물질적인 부의 차이가 있음을 인지하는 것은 사실상 매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차이를 인식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기에 대부분 사람들은 적응이라는 맥락에서 적당히 잊고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런 균형에 균열이 일어나며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는 감각이 다가오는 순간은 바로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순간이다. 사랑을 느끼는 순간은 새로운 경의의 문에 다가가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세계의 잔인함에 발 딛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가장 힘 있는 설정은 사랑하는 여자를 강남 출신의 선배에게 빼앗긴다는 것이다. 그녀가 사실 나를 사랑했고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술에 취해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주인공과 관객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갈등 수위를 높이기 위한 극적 장치일 뿐이다. 그럼에도 승민(이제훈 분)이 서연(배수지 분)을 엎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선배를 보는 장면은 바라보기 괴로운 순간이었다.
재력 있고 사회적 계층이 높은 이에게 사랑을 빼앗겼다는 감정은 계급사회에서 일반적인 남성이 한 번쯤은 느끼며 지나가는 보편적인 좌절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도전해 보지 않았던 사랑 역시도 마찬가지의 감정적 상흔을 남겼을 수도 있다. 첫사랑은 사회적으로 규율되지 않았기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좌절은 다시 적응이라는 맥락에서 의식의 바닥으로 가라앉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기에 첫사랑은 스크린에서 끊임없이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좌절의 경험을 우리는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 어긋남이라고 하기에는 필연적이며, 계급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더 숙명적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자원을 가진, 혹은 매력이 있는, 적응에 특화된 개체가 짝짓기에서 우위에 서는 현상은 인간에게도 엄연히 일어나는 일이다. 생태는 도덕적 가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무정하고 잔인한 법이다. 무딘 듯 서툰 듯한 이 영화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인간의 존재 양식을 무심하게 그려낸다.
아 짜증 나! 엄마가 알아서 해
이 영화가 상당한 울림이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잔인함을 좀 더 보편적인 영역으로 확장했다는 점에 있다. 이는 승민(엄태웅 분)과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잘 표현되어 있다. 승민은 결혼을 앞두고 있고 부인과 미국으로 갈 예정이다. 그는 결코 어머니에게 살갑게 굴지 않는다. 어머니가 재개발되는 가게를 어떻게 할지 묻지만, 머리 복잡하니까 그냥 엄마가 알아서 하라며 면박을 준다.
그가 어머니에게 모질게 구는 것은 결코 악의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늙어가는 어머니의 육체를 안타깝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며, 자신이 버린 게스(geuss) 짝퉁 옷에 오랫동안 입고 있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전망도 없이 구질구질하게 쇠락해가는 어머니의 삶이 싫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자신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미국을 가지 않고 어머니와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 큰 자식이 부모에게서 독립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홀로된 어머니를 두고 떠난 다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잔인한 것은 잔인한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홀로 늙고 홀로 죽기 마련이다. 영화는 짝짓기 과정에서 느끼는 잔인함을 부모와 자식이 관계로까지 확장함으로써 좀 더 보편적인 생태에 대한 감정에 이르게 한다.
술에 취한 서연은 승민에게 의사 남편과 이혼 소송을 하면서 많은 위자료를 뜯어냈다며 자신의 과거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서연이라는 한 인물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생명이 살아가는 한 모습으로 보였다는 것이 이 영화가 가진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 그럼 난 어떻게 하냐? 나도 먹고살아야지.’
누가 너 찌질한 거 몰라서 그러냐?
건축학개론은 남성들을 위한 변형된 멜로드라마라고 불러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환경적 제약 속에서의 사랑의 고통, 고양된 감정이라는 요건을 무난히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남성들이 텔레비전 앞에서 공개하지 않았던 감정적 상처에 대해 어두운 스크린 앞에서 은밀한 공감을 보내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비록 친구들과 함께 수지가 정말 예뻤노라고 이야기했겠지만, 자신이 가장 찌질했던 그 순간, 아마 처음으로 절실하게 자신이 던져진 자리를 안 순간을 돌이켜본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그와 함께 그들은 사회-내-존재로서 삶의 또 다른 단계로 진입하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잃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삶을 통해 배우는 지혜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정신적 보상행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루하루 급속히 잃어가기를 강요하는 한국 사회 속에서 ‘건축학개론’은 그 강요의 속도가 느렸던 이전 86세대의 잃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속도에 걸맞게 이 영화는 무난하게 또 다른 착하고 예쁜 여자와 한 가정을 이룬 성숙한 남성의 서사로서 막을 내린다.
그것은 거짓말이나 큰 허세가 아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이 시간을 청춘으로 보내는 친구들에게 잃어버린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쓰라고 한다면 어떤 결말을 맺게 될 것인가 궁금해진다. 첫사랑은 비슷하게 다시 회고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어느 자리에서 쓰이게 될 것인가? 이 영화를 처음 본 당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 사이의 시간이 얼마나 사회의 공기를 깊이 바꾸어 놓았는지 상기하게 된다.